위로와 격려, 지지가 필요한 우리의 삶 ... 연극 '오펀스'
위로와 격려, 지지가 필요한 우리의 삶 ... 연극 '오펀스'
  • 주하영
  • 승인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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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미국 극작가 라일 케슬러(Lyle Kessler)의 1985년 작품 '오펀스(Orphans)', 김태형 연출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형 '트릿'(박정복)과 동생 '필립'(현석준). 북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위치한 연립주택에 부모 없이 둘만 남겨진 형제는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고 있지 않다. 트릿은 소매치기와 좀도둑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필립을 돌본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형 '트릿'(박정복)과 동생 '필립'(현석준). 북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위치한 연립주택에 부모 없이 둘만 남겨진 형제는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고 있지 않다. 트릿은 소매치기와 좀도둑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필립을 돌본다./사진=레드앤블루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세상에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게 된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1903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만약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기에 말을 할 수도 소통을 할 수도 없었던 헬렌은 불만에 가득 찬 채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는 “폭군(tyrant)”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 이외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아이,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아이를 ‘세상’ 속으로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가정교사 앤 설리번(Anne Sullivan)이었다.

8살 때 어머니가 죽고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학대 속에 살다 10살 때 남동생과 함께 구빈원으로 보내졌던 설리번은 트라코마(trachoma)로 인해 시각을 잃게 되었음에도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딛고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해롤드'(정경순)과 '트릿'(최유하). 2019년 '오펀스' 공연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추구한다. 기본적으로 극작가 케슬러의 원작은 '아버지 인물'로서 '해롤드'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전 세대의 다음 세대를 보듬는 마음,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불행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픈 '인간애의 감동'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젠더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해롤드'(정경순)과 '트릿'(최유하). 2019년 '오펀스' 공연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추구한다. 기본적으로 극작가 케슬러의 원작은 '아버지 인물'로서 '해롤드'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전 세대의 다음 세대를 보듬는 마음,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불행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픈 '인간애의 감동'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젠더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사진=레드앤블루

학대와 방치, 어머니와 남동생의 죽음, 시각상실과 같은 연이은 불행으로 인해 세상을 향한 분노와 억울함, 상처가 가득했던 설리번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었지만 여러 선생님들의 따스한 애정과 관심, 보살핌, 지지를 통해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경험은 천방지축이었던 헬렌을 대면한 순간 정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또 영적으로도 그녀의 삶에 등불과 같은 존재로 자리해야 할 책임감을 일깨우도록 만들었다.

설리번은 1887년 퍼킨스 학교 사감 선생님인 소피아 홉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아이의 교육이 내 삶의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꿈을 능가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요. 나는 헬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과 능력들을 끌어내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내가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암흑 속에서도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어요!”

헬렌은 1908년에 출간한 ‘내가 사는 세상(The World I Live In)’에서 설리번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의 느낌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선생님이 내게 오시기 전까지 나는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세상이 아닌 곳에 살고 있었죠. ... 내 정신은 의미 없는 감각들이 온갖 소란을 피우고 요동을 치는 무정부주의적 혼란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헬렌의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스린 것은 펌프(pump)에서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물의 촉감과 설리번 선생님이 손바닥 위에 써주었던 “물(water)”이라는 단어에 대한 첫 인식이었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트릿'(김도빈)은 자신이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트릿'(김도빈)은 자신이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사진=레드앤블루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이 있고, 각기 이름이 있으며, 언어를 통해 소통이란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렌은 자신이 찢고 망가뜨렸던 인형들을 도로 붙여놓기 위해 애를 썼고 처음으로 후회와 슬픔을 느끼며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리번은 헬렌이 온갖 사물에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도 모든 것의 이름을 묻고 잔뜩 흥분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달려왔던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난 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헬렌이 내 품 속으로 들어와 나를 껴안고 처음으로 내 볼에 키스를 했어. 내 심장은 기쁨으로 충만해서 터질 것만 같았어!”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는 미국 극작가 라일 케슬러의 1985년 연극 ‘오펀스(Orphans)’가 공연 중이다. 

“연극은 인간 정신을 기리는 예술”임을 강조하는 케슬러의 극 ‘오펀스’는 1983년 LA에서의 초연과 1985년 시카고에서의 재연이 전혀 다른 결말을 갖고 있는 “바람직한 엔딩을 찾기 위해 25번의 다시 쓰기”를 거친 작품이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해롤드'(정경순)는 아직 바깥 세상을 알지 못하지만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 '필립'(최수진)이 순수함을 간직한 채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해롤드의 격려와 지지는 필립이 독립적인 존재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해롤드'(정경순)는 아직 바깥 세상을 알지 못하지만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 '필립'(최수진)이 순수함을 간직한 채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해롤드의 격려와 지지는 필립이 독립적인 존재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사진=레드앤블루

초연 당시 LA 타임즈의 평론가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았지만 재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1987년 영화화를 거쳐 전 세계로 뻗어나가 3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관객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연극 ‘오펀스’의 힘에 대해 케슬러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 극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15년 뉴욕 헌팅턴 공연의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극 ‘오펀스’가 터키, 이스탄불,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 도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재연을 반복하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으며, 이는 분명 “우리의 일부가 인물들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고 “지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알렉 볼드윈(Alec Baldwin)이 출연한 브로드웨이 공연 이후 새롭게 출간된 ‘오펀스’의 희곡에는 헬렌 켈러의 말을 인용한 에피그라프(epigraph)와 케슬러의 후기(Afterword)가 담겨 있다.

케슬러는 ‘오펀스’의 탄생배경에 대해 1막을 쓴 후 2막을 다시 쓰기까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쌍둥이 아이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운명처럼 2막이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트릿(Treat)이 “버려짐(abandonment)”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 따뜻한 격려와 지지를 바라고 있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해롤드(Harold)의 죽음이라는 결말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25번의 수정 끝에 갑자기 깨닫게 되었음을 덧붙였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집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만을 관찰하며 살아온 '필립'(김바다)은 '해롤드'(박지일)의 따뜻함과 격려의 제스처에 쉽게 동화된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집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만을 관찰하며 살아온 '필립'(김바다)은 '해롤드'(박지일)의 따뜻함과 격려의 제스처에 쉽게 동화된다./사진=레드앤블루

북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위치한 연립주택에 부모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두 형제 트릿과 필립(Phillip)의 이야기는 관객들의 ‘연민’을 사기에 충분했고, 어느 날 우연히 두 형제 앞에 나타난 아버지 같은 존재 해롤드의 따뜻한 마음은 삶 속에 한번쯤 상처 입은 기억이 있는 관객들의 마음 역시 어루만지는 ‘위안’을 선물할 수 있었다.

케슬러는 ‘브로드웨이 닷컴’을 통해 “‘오펀스’는 나 자신의 서로 소화될 수 없었던, 치열하게 싸우고 부딪치던 무의식의 요소들을 반영한 극”이며, “우리 모두가 품고 있으면서도 건드려 본 적 없는 이슈들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필립’은 밖에 나가길 두려워하며 숨기를 바라면서도 바깥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을, ‘트릿’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고 버려졌을 때 폐부 깊숙이 느꼈던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표출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해롤드’는 이 두 가지 속성을 하나로 아우르고 봉합하는 “우리 모두가 찾고 있던 아버지”이자 진정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케슬러는 자신의 극이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극이 아닌 “우화(a parable)”이자 “도덕극(a morality play)”이라고 주장한다. 감정의 충돌, 결핍된 가족의 구원, 격려와 지지, 위로가 담겨있는 진실을 설파하는 극이란 것이다.

실제로 연극 ‘오펀스’가 전 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고아원 출신으로 시카고에서 앵벌이 신문팔이를 하다 갱스터가 된 해롤드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빈민가의 비행 소년(a dead-end kid)” 트릿과 필립을 만나 그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는 데서 엿보게 되는 ‘인간애에 대한 감동’이라 할 수 있다.

막이 오르면 운동화 끈이 풀린 채 의자 위를 아슬아슬하게 돌아다니는 필립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갑자기 창 밖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듯 책이며 신문, 빨간 하이힐과 같은 물건들을 다급하게 숨긴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김태형 연출은 케슬러의 원작과 다르게 '필립'(김바다)이 의자 위만을 밟고 돌아다니는 강박증적인 모습으로 표현한다. 운동화 끈에 걸려 넘어질 위험을 안은 채 의자 위만을 밟고 다니는 모습은 위태롭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김태형 연출은 케슬러의 원작과 다르게 '필립'(김바다)이 의자 위만을 밟고 돌아다니는 강박증적인 모습으로 표현한다. 운동화 끈에 걸려 넘어질 위험을 안은 채 의자 위만을 밟고 다니는 모습은 위태롭다./사진=레드앤블루

무대에는 텅 빈 커다란 마요네즈 통과 선반에 쌓여 있는 참치 캔들, 낡은 소파와 작은 텔레비전이 놓여있다.

케슬러의 희곡의 경우, 필립이 바닥을 밟지 못하는 강박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김태형 연출은 필립이 느끼는 심리적 불안과 억압을 운동화 끈에 걸려 넘어질 위험을 안은 채 의자 위만을 밟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필립이 2층 계단으로 올라가 몸을 숨기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트릿이 등장한다.

트릿은 큰 소리로 “필립!”을 부르며 숨바꼭질 할 기분이 아니니까 당장 나오라고 소리친다. 트릿은 자신이 소매치기로 훔쳐 온 시계, 지갑, 팔찌와 같은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으며 인내심이 바닥난 듯 거칠게 욕을 하고 필립에게 당장 내려올 것을 명령한다.

관객들은 트릿이 상당히 폭력적이며 필립은 형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조심스럽게 필립은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은 죽은 엄마의 옷들이 잔뜩 걸려있는 옷장에 숨어 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트릿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없어지는 마요네즈에 대해 불평하고, 필립은 참치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기 위해 마요네즈 두 스푼씩만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대꾸한다.

트릿은 자신이 없는 동안 필립이 무엇을 했는지를 묻고 필립은 창밖을 내다보며 온갖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가격 맞추기 퀴즈 프로그램을 시청했다고 말한다. 트릿은 소매치기 무용담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치는 사이 물건을 훔치고, 상대방이 욕설을 내뱉거나 완력을 사용할 경우 주머니칼을 꺼내 상대를 위협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트릿은 무시를 참지 못한다.

그는 동생 필립에게 “약간의 피를 보게 되면 갑자기 난리치던 사람들이 잠잠해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해 말한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술에 취한 채 '트릿'을 따라 온 '해롤드'(김뢰하)는 줄에 묶여 결박당한 상태로 잠이 들고, 필립(현석준)은 직감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님을 인지한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술에 취한 채 '트릿'을 따라 온 '해롤드'(김뢰하)는 줄에 묶여 결박당한 상태로 잠이 들고, 필립(현석준)은 직감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님을 인지한다./사진=레드앤블루

신문을 찾던 트릿은 단어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동생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혹시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잡아떼는 필립의 눈이 허공을 향한다. 관객들은 동생 필립이 혼자 글공부를 하며 지식을 늘려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뿐 아니라 형 트릿이 동생이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란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아빠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뒤 엄마마저 죽고 어린 두 형제만 남겨진 집에서 형 트릿은 동생 필립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살피며 청년이 되었다.

문을 통해 집안으로 침입하려는 사람들을 온갖 물건을 쌓아 방어하고 창문으로 넘어오려는 사람들의 손을 물어뜯으며 두려움과 싸워 온 트릿은 정글 속의 동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폭력과 분노’를 통해 가까스로 생존해왔다.

어느 날 갑자기 정글에 던져진 상처입고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 ‘트릿’이라면, ‘필립’은 그 짐승의 보호 아래 있지만 폭압 속에 갇혀 모든 것을 통제 당하는 죄수와 같다.

필립은 언젠가 형과 함께 밖에 나갔을 때 입술과 혀가 부어오르고 얼굴이 퉁퉁 부어 숨을 쉴 수 없었던 기억으로 인해 집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며, 창문조차 제대로 열어보지 못한 채 정말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살아왔다.

훔쳐온 물건들을 현금화하러 나갔던 트릿은 밤늦게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50대 중년의 남자 ‘해롤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시카고의 고아원에서 자란 '해롤드'(박지일)는 한 눈에 '트릿'이 “빈민가의 비행 소년(a dead-end kid)”임을 알아본다. 해롤드는 트릿을 TV 드라마 '앵벌이들의 합창(Dead End Kids)'에 나오는 '앵벌이 키즈'라고 부른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시카고의 고아원에서 자란 '해롤드'(박지일)는 한 눈에 '트릿'이 “빈민가의 비행 소년(a dead-end kid)”임을 알아본다. 해롤드는 트릿을 TV 드라마 '앵벌이들의 합창(Dead End Kids)'에 나오는 '앵벌이 키즈'라고 부른다./사진=레드앤블루

술에 취해 해롤드가 부르는 “만약 내게 천사의 날개가 있다면, 나는 저 감옥 담장 너머로 날아갈 텐데! 엄마 품으로 날아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텐데!”라는 노래는 의미심장하다.

원래 1924년 버논 달하트(Vernon Dalhart)의 재즈송 ‘죄수의 노래(The Prisoner's Song)’의 가사를 변형해 차용한 해롤드의 노래는 경제공황시기의 가난과 어려움을 다룬 ‘앵벌이들의 합창(Dead End Kids)’이라는 드라마에 삽입되었던 곡으로 설정되어 있다.

미시간 호가 내려다보이는 시카고의 언덕에 위치한 고아원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엄마!”를 외쳐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해롤드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 노래에 점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트릿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담장을 넘지 못하는 필립의 고립된 삶과 두 형제가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열망과 결핍 또한 담고 있다.

원래 사랑하는 연인에게로 갈 수 없는 죄수의 외로움을 노래한 원곡은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 이 슬픈 내 이야기를 들려줄 텐데. 아직 아무에게도 들려 준 적 없는 이야기를!”로 시작하는데 김태형 연출은 케슬러의 희곡보다 좀 더 많은 부분의 가사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향한 그리움, 누군가의 따스함을 필요로 하는 절절함, 죽기 전에 자유를 맛보고픈 열망은 각기 해롤드, 트릿, 필립의 내면에 자리한 억압된 욕구들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인다.

시카고에서 자신의 뒤를 쫓는 갱단을 피해 필라델피아로 도망쳐 온 해롤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트릿과 지적인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형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 필립의 삶을 바꿔주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해롤드'(정경순)는 아무리 '트릿'을 설득하려 해도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칼로 위협하자 숨겨 두었던 권총을 꺼내 당장 칼을 내려놓을 것을 명령한다. 정글과 같은 현실 속을 홀로 헤쳐온 트릿이 헤롤드의 '일자리 제안'을 곧이 곧대로 듣는 것은 쉽지 않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해롤드'(정경순)는 아무리 '트릿'을 설득하려 해도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칼로 위협하자 숨겨 두었던 권총을 꺼내 당장 칼을 내려놓을 것을 명령한다. 정글과 같은 현실 속을 홀로 헤쳐온 트릿이 헤롤드의 '일자리 제안'을 곧이 곧대로 듣는 것은 쉽지 않다./사진=레드앤블루

변화는 더 이상 끈 풀린 운동화가 아니라 노란색 로퍼를 신은 말끔한 차림의 필립과 비싼 양복을 차려입고 신사처럼 행동하는 트릿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안락한 가정의 응접실처럼 변모한 무대에 해롤드는 앞치마를 두르고 등장한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필립에게 끊임없는 격려와 지지를 보내며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는 해롤드는 트릿의 폭력성을 제어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겉모습의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새 구두를 밟거나 행로를 방해하는 등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트릿은 폭탄처럼 위험하다.

채권과 증권을 현금으로 바꿔오는 일을 맡겼던 해롤드는 총을 가지고 나간 트릿이 자신의 지시대로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덩치가 큰 흑인 남자와 벌인 주도권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실망한다.

총을 들어 살인을 행할 수 있었던 트릿의 통제 불능한 감정과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화가 난 해롤드는 권총을 수거하고, 트릿은 한번만 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한다.

해롤드는 필립의 도움을 얻어 트릿 앞에서 ‘가정 상황’을 연기하도록 만들고, 점점 트릿이 참기 힘든 ‘분노의 상황’을 연출한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잠에서 깬 '해롤드'(정경순)는 결박당한 자신을 발견하고 마술사같이 노련한 솜씨로 자신의 포박된 상태를 벗어난다. 이미 한쪽 손이 자유로워진 해롤드는 '필립'(최수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격려'의 제스처를 취한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잠에서 깬 '해롤드'(정경순)는 결박당한 자신을 발견하고 마술사같이 노련한 솜씨로 자신의 포박된 상태를 벗어난다. 이미 한쪽 손이 자유로워진 해롤드는 '필립'(최수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격려'의 제스처를 취한다./사진=레드앤블루

결국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던 트릿은 더 이상 터져 나갈 곳을 찾지 못한 감정으로 인해 기절하고 만다. 해롤드는 쓰러져 있는 트릿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기특한 마음을 표현하지만 이내 정신이 든 트릿은 자신에게 손도 대지 말라며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해롤드는 버려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어깨를 다독여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격려’의 제스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의 커다란 손이 어깨 위에 얹어질 때의 든든함, 누군가가 따뜻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안도감,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운 일이 있을 때 격려와 응원을 더해 주는 어깨의 두드림... 형 몰래 숨겨 둔 책을 통해 세상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을 간직할 수 있었던 필립은 해롤드의 격려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만 세상의 잔인함과 난폭함 속에서 수없이 공격당하며 살아 온 트릿은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자신의 통제권을 빼앗긴 듯한 박탈감과 동생의 관심에서 벗어난 듯한 결핍감은 해롤드의 격려와 지지를 자신이 독차지 하고픈 욕심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무력감,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좋으면서도 자유를 잃은 듯 느끼는 갑갑함과 더해지며 트릿으로 하여금 해롤드에게 거리를 두도록 만든다.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트릿'(박정복)은 스스로 포박을 풀고 태연하게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해롤드'(김뢰하)를 믿지 못한다. 해롤드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트릿은 그를 향해 '칼'을 겨누고, 필립(현석준)은 강박증으로 인해 금이 그어진 땅을 밟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서 있다./사진=레드앤블루
연극 '오펀스' 공연장면. '트릿'(박정복)은 스스로 포박을 풀고 태연하게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해롤드'(김뢰하)를 믿지 못한다. 해롤드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트릿은 그를 향해 '칼'을 겨누고, 필립(현석준)은 강박증으로 인해 금이 그어진 땅을 밟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서 있다./사진=레드앤블루

트릿은 해롤드의 어깨를 다독여주려는 위로와 격려의 제스처를 끊임없이 거부한다. 결국 자신을 찾으러 나갔다가 시카고에서 온 갱단의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된 해롤드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그렇기에 해롤드의 주검 옆에서 문득 자신이 진정 바래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트릿이 오열하며 무너지는 장면은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도록 만든다.

해롤드를 통해 필립은 자유와 용기를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트릿은 오랜 세월 자신 안에 깊숙이 묻어 두었던 결핍과 상처, 분노와 억울함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케슬러의 희곡은 오열하는 트릿을 품에 끌어안고 아기처럼 달래는 필립의 손길로 막을 내리지만 김태형 연출은 자신의 해석을 더한다.

김태형의 필립은 케슬러의 필립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떤 결론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겠지만 암흑 속에 갇힌 헬렌이 설리번 선생님을 만났던 순간처럼 해롤드가 두 형제에게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해롤드의 대사처럼, 그들은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며, 해롤드의 존재는 그들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월 17일까지 대학로아트원씨어터 1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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