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자유의 소중함을 박완규 열연으로 일깨워준 연극 '돼지우리'
[리뷰] 자유의 소중함을 박완규 열연으로 일깨워준 연극 '돼지우리'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8.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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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본령으로 회귀하려는 몸짓...오랜만에 접한 연극다운 연극
연극 '돼지우리' 콘셉트 컷/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연극 '돼지우리'(9월 8~22일/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획한 시리즈 '베스트 앤 퍼스트'(Best & First)의 연극 4편 중 첫 번째 작품이다. 

11일 (사)한국생활연극협회 회원 8명과 함께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대학로에서 오랜만에 연극 같은 연극을 호흡했다는 것이다.

평소 많은 작품을 관람하고 일반인들을 위한 생활연극을 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연극의 메카' 대학로가 언제 부터인가 연극 본연의 정신과 치열함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연극도 다양한 실험과 응용이 필요하지만 연극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동유럽 연극의 내한공연을 보게 되면 "연극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낄 만큼 그들은 연극의 순수한 전통을 이어내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르코대극장에서 관람한 아돌 후가드 작, 손진책 연출의 '돼지 우리'는 연극 본령으로 회귀하려는 몸짓을 읽을 수 있었고, 특히 연극이 배우예술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돌 후가드는 인종 분리정책에 맞서온 남아공의 극작가다. 1970년대 종반, 자유의 억압 상황을 처절하게 그린 후가드의 '아일랜드'가 윤호진 연출, 서인석 이승호 주연으로 실험극장에서 공연되었을 때 그 반향은 매우 컸다.

이번에 초연되는 '돼지우리'는 소련의 탈영병을 모티브로 삼아 총살을 면하기 위해 돼지우리에서 41년을 산 파벨과 그의 아내 프라스코비야의 삶을 명징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살기 위해 돼지우리에 숨어 지낸 파벨에게 인간성 회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몸부림 그 자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숨기부터 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엄청나다. 어쩌면 나약하고 겁 많은 우리 자신도 돼지우리는 아니지만 속박 받는 벽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연극 '돼지우리' 콘셉트 컷/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디지털 시대에 보면서 사유를 할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작품을 만든 손진책 연출과 이태섭의 무대디자인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무엇보다 파벨 역을 맡은 박완규 배우의 연기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다.

2016년 국립극단의 '국물 있사옵니다'(이근삼 작)에서 보인 호연으로 좋은 연기자라는 인상은 있었지만 이 배우가 이처럼 에너지 넘치고 섬세한 감정을 표출하는 열정적인 연기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아내 프라스코비야 역을 맡은 고수희도 정평을 얻은 개성 있는 연기자여서 이 둘의 앙상블이 이뤄내는 미장셴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듯 뜨거웠다.

2인극이지만 박완규의 1인극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비중이 컸다. 전쟁터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탈영해 돼지우리에 숨어 산지 10년이 되는 날 그는 자수를 하려 했지만 용기가 없어 못하고 10년 또 10년을 돼지우리에서 돼지처럼 살며 삭아져 간다.

아돌 후가드는 인간처럼 살고 싶고 자유를 향해 탈출하고 싶은 파벨의 심리와 행동을 사정없는 대사로 표출시켰다. 그 폭포 같은 대사를 박완규는 또렷한 화술로 펼치며 변신해 냈다.

바깥세상 공기를 쐬고 싶어 여장을 한 모습, "결국 내 영혼마저 이 돼지우리와 똑같아 지는 건가?"라며 알몸으로 돼지우리에 뛰어드는 장면은 처절하리만큼 강한 울림을 주었다.

대배우들도 이만한 대사량과 움직임을 소화하기 버거울텐데 40대의 박완규는 몸 전체로 무대를 휘저으며 독백보다 긴 대사들을 감정을 배합해 명료한 화술(장단음 구분에 거슬리는 부분 좀 있었지만)로 쏟아냈다.

여기에 고수희 배우의 힘이 가해져 강렬하면서도 처절한 무대를 만들어냈다. 신앙심이 깊고 생계가 더 큰 고민인 프라스코비아 역 고수희는 패배와 절망으로 흐르기 쉬운 박완규의 무게 중심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차분하게 해냈다. 다만 수 십 년 세월의 흐름에 더해 분장의 변화를 보여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돼지우리'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박완규, 고수희 배우/사진=정중헌
연극 '돼지우리'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박완규, 고수희 배우/사진=정중헌

'돼지우리'의 압권은 손진책 연출과 이태섭 디자이너가 합작해낸 별빛 쏟아지는 회전무대다. 가운데 미루나무 한그루가 서있는 초원에서 박완규 고수희가 빚어내는 그림은 '자유'와 '탈출'의 의미를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하게 전해주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파벨이 우리에서 돼지를 몰아내는 장면이었는데, 돼지 한 마리 없었지만 관객들은 통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돼지우리를 나와 먼 길에 나서는 이 작품의 라스트도 연출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것이 종말일지, 새로운 희망일지는 관객의 몫이지만 아스라하면서도 싸한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찰리 채플린 영화 말미 같은 긴 여운을 주었으면 더 감동적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은 스태프들의 힘도 컸다. 볏짚을 깔고 지붕을 잘라낸 돼지우리 세트도 상상력을 자극해 주었지만 돼지들의 꿀꿀거림과 울음소리를 효과적으로 배치한 음향(김동수)도 극 분위기 조성에 큰 몫을 했다.

아무리 좋은 연극을 해도 관객이 적었다는 점이다.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아르코가 대학로에서 국공립다운 역할을 못 해온 데도 기인한다고 본다. 외국의 국립극장들은 수준 높은 시즌 레퍼터리로 관객들의 신뢰를 얻고, 관람을 축제처럼 즐기는데 비해 그런 전통을 쌓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역량 있는 연극인들을 초청해 '연극으로의 회귀'를 꾀한 '베스트 앤 퍼스트'에 박수를 보낸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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