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철학'이 되어버린 현대적 의미의 '착함'...창극 '흥보씨'
'비움의 철학'이 되어버린 현대적 의미의 '착함'...창극 '흥보씨'
  • 주하영
  • 승인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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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국립 창극단, 고선웅 극본·연출 '흥보씨'
판소리 다섯마당 중 하나인 ‘흥보가’를 원작으로 고선웅 연출이 새롭게 각색한 국립창극단의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찔레 덩굴 밑에서 주워 온 '흥보'(왼쪽)와 황씨의 외도로 태어난 '놀보'(오른쪽)/사진=국립극장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 손에는 여의주와 같이 빛나는 ‘박‘을 들고 눈을 감은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흥보‘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유대인의 왕’이라 칭송받는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로마 병사들이 씌워주었던 ‘가시 면류관’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다른 모든 이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고행과 수난’을 상징한다. 

행복해 보이는 흥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연꽃’은 ‘장엄한 신비의 세계’와 ‘깨달음의 높은 경지’를 상징하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빛나는 ‘여의주’는 악을 제거하고 혼탁한 물을 맑게 하고자 하는 흥보의 ‘소망’을 상징한다.

최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던 국립창극단의 창극 ‘흥보씨‘의 포스터에는 이러한 ‘흥보’가 존재한다. 국립창극단의 2017-2018 레퍼토리 시즌의 마지막 작품인 창극 ‘흥보씨‘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 하나인 ‘흥보가’를 원작으로 고선웅 연출이 새롭게 각색한 창극이다.

창극 ‘흥보씨‘ 포스터

‘고전 작품의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고 평가받은 창극 ‘흥보씨‘는 이미 지난 해 4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되어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현대적 음악의 조합으로 관객들에게 재미와 놀라움을 선사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2막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고선웅 연출은 이번 공연에서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원작의 주제를 보다 명확하게 살릴 수 있는 수정대본을 통해 보다 업그레이드 된 공연을 선보였다.

‘연출의 글’에서 고선웅은 “착하다는 것이 마냥 미덕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 하지만 못된 사람들의 잘못도 결국은 다 드러나는 시대”임을 지적하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선한 게 맞습니다. 남들이 알아주고 말고는 일없지요. 선업을 쌓다보면 나중에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요?...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겨날 테지요”라고 말했다.

‘착함’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착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이다. 하지만 ‘곱고, 바르고, 상냥하다’는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느낌’의 단어들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선함‘을 실행하려는 ‘도덕적 원칙’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자연적 경향인 탐욕과 욕망, 이기심을 극복하고 ‘자유의지’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도덕적 행동을 하려는 경향, 즉 ‘선의지’가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세워야 하는 도덕적 원칙의 보편성,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고 다양성이 추구되며 훨씬 더 복잡하게 변화한 21세기에 ‘착함’의 기준이 하나일 리 없다. 시대의 흐름 속에 중요한 가치가 달라지듯 착함의 의미 또한 변화한다.

흥보씨_5 '비움의 철학'을 수행 중인 흥보.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비움의 철학'을 수행 중인 흥보./사진=국립극장 

현재의 사회는 ‘착함‘을 예전만큼 강조하지 않는다. 흔히 ‘착하다는 것이 덕이 되지 않는 시대’라고 말한다. 착하다는 것이 ‘어리석음’과 동일시되고, 함부로 배제해도 되는 ‘무시’로 연결되며, 그 모든 것을 인내하는 착함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내 착함의 탈을 쓴 ‘위선자’로 읽히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착함은 학습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착하다고 느껴야 할, 선하다고 간주해야 할 원칙들이 정해지면, 우리는 그러한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향해 착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향해 ‘착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고전 소설 ‘흥부전‘에는 욕심 많은 형 놀부와 가난하지만 착한 동생 흥부가 있다. 구렁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까지 고쳐준 착함은 금은보화라는 ‘복‘을 받고, 그러한 흥부를 시샘하여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준 놀부의 욕심은 알거지가 되는 ‘벌’을 받는다.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다리를 다친 제비는 대감님들의 본처들과 풍류를 즐기는 강남 클럽의 '제비'(오른쪽)로 등장한다./사진=국립극장 

‘흥부전‘은 ‘권선징악’의 교훈을 통해 탐욕의 위험성과 형제간의 우애의 중요성, 남을 돕는 따뜻한 마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가난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29명이나 낳은 흥부의 무책임함과 무능함을 희화화한다.

또한, 욕심 많고 이기적인 놀부지만 경제관념이 투철하고 거지들만 나오는 ‘흉박’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음을 긍정한다.

고선웅은 흥보의 착함이 단지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는 것으로만 입증되고, 그에 대한 보상이 금전적인 가치로만 이루어진다는 데 의문을 품고 “착한 흥보라서 대박난다”라는 점을 “돈과 재물 말고 다른 그 무엇을 얻는다”로 바꾸어 전혀 새로운 각색의 ‘흥보씨‘를 탄생시킨다.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화성과 금성을 왕래하는 외계인 '걸승'(사진 오른쪽)과 접선중인 흥보(왼쪽). 걸승은 흥보네 식구들의 딱한 사정을 가엾게 여겨 잠시 오색구름을 뚫고 내려와 '비움의 철학'을 가르쳐주고 떠난다./사진=국립극장 

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흥보는 더 이상 착함이라는 미덕의 대가로 부귀영화를 손에 넣은 권선징악의 주인공이 아니라 속세를 떠나 모든 탐욕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비움의 철학’을 깨우친 ‘비범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시선을 선보인다.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해 근심하던 연생원은 친척집 문상을 다녀오는 길에 찔레 덩굴 밑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고, ‘연씨 가문 흥하라고 흥보‘라 이름 지어 양자로 삼는다.

한편, 남편이 출타한 틈을 타 동네 건달과 정을 통한 황씨는 ‘놀랄 놀, 놀보‘라는 아이를 낳는다. 천성이 착한 흥보가 모든 칭찬을 독차지 하는 것에 “모과나무 뒤틀리듯” 심사가 뒤틀려 온갖 못된 짓을 하며 자란 놀보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흥보에게 거래를 청한다. “한 이십년 내가 잘 모셨으니 인제 형님도 나랑 처지를 바꿔야 맞지요.”

연생원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 재산을 모두 장남에게 상속하고, 흥보에게는 “심성이 모자란 놀보를 끝까지 잘 돌볼 것”을, 부인 황씨에게는 절대 “찔레 덩굴 일을 발설하지 말 것”을 귓속말 유언으로 남긴다.

“형제간의 우애를 지킬 것”을 당부하는 아버지 연생원을 향해 놀보가 볼멘소리로 말한다. “저는 왜 가까이 안 부르시고 다 듣게 부르십니까? 아버지는 항상 그랬어요. 형제간의 우애는 절대로 안 지키겠습니다!”

놀보의 못된 심보는 한 살 터울 형과 늘 비교당하며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자식의 분노와 비뚤어짐에 기인한다. 장남의 권한을 넘겨받은 놀보는 그간의 억울함에 대해 분풀이라도 하듯 흥보를 구박하기 시작한다.

흥보씨_11 부인 정씨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었음을 기뻐하는 흥보네 식구들. 아직 자신들에게 닥칠 어려움을 모른 채 '한 가족'임을 기뻐한다.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부인 정씨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었음을 기뻐하는 흥보네 식구들. 아직 자신들에게 닥칠 어려움을 모른 채 '한 가족'임을 기뻐한다./사진=국립극장 

재산에 관심이 없는 흥보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무덤가에 움막을 짓는다.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을 맞고 목을 매 자살하려던 정씨는 자신을 만류하고, 호랑이를 물리쳐 준 흥보와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흥보는 정씨와 함께 산을 내려오는 길에 물난리와 전쟁 통에 버려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모두 가족으로 삼는다. 그의 가족은 핏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불운한 태생과 빈곤한 환경, 고단한 삶으로 인해 고통 받아온 ‘소외층’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를 품으려던 흥보의 바람은 치매에 걸린 황씨가 흥보의 ‘출생의 비밀’을 놀보에게 알리는 순간 무산되고 만다.

놀보는 그간 열등감을 안겨준 흥보가 자신의 친형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자 먹고 입는 데 들어간 모든 비용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야 한다며 흥분한다. 흥보는 가족들을 부양하고자 머슴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놀보에게 사정하여 가까스로 외양간에 기거하게 되지만 굶주림과 노동으로 허리가 휠 지경이다.

농번기가 지나 엄동설한에 쫓겨나며 매질을 당하고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 놀보를 걱정하는 흥보를 향해 관객들은 ‘안타까움’보다는 ‘답답함’을 느낀다.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사진=국립극장 

흥보의 자식들은 마치 관객들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한다.

“알다가도 모를 우리 흥보씨! 쫓겨나며 쫓는 사람 걱정이라. 세상 사람들, 그 속 좀 들여다보소!”

융통성이 없는 착함, 무조건적인 양보, 그의 ‘착함’에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칸트에 따르면, ‘선함’을 향한 마음과 그 ‘선함’을 실현하려는 의지는 결과 때문이 아니라 의도와 동기 때문에 선하다 말할 수 있다. 옳은 행위라 여겨지는 것을 마땅히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며 ‘의무’로 받아들이고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하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것은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흥보는 다분히 ‘칸트적인 인간’이다.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서가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라는 칸트의 묘비명을 그대로 따르기라도 하듯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고집스럽게 지킨다.

문제는 그의 ‘정언명령’이 놀보와 같이 제멋대로인 동생을 향해 지켜져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관객들이 고민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탐욕을 따르는 것 외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놀보를 단지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감싸고 자신을 희생하는 ‘착함’이라니, 이 시대에 그런 착함이 가당키나 할까?

원칙을 지키는 착함보다는 착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가치가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현대는 착함보다는 ‘배려’가, 선함보다는 ‘옳음’이 더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고선웅은 흥보의 ‘착함’의 가치를 전혀 다른 곳에 가져다 놓는다. 이 때문에 ‘흥보씨‘에는 기상천외한 설정들이 가득하다. 화성과 금성을 오고가는 외계인 걸승은 배고픔에 차라리 죽겠다는 흥보의 자식들 앞에 나타나 “욕심을 버리면 먹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설파하고, 보리수나무 아래 자리 잡은 흥보는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굶주림의 수련을 선택한다.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강남의 유명 클럽에서 일하는 '제비'가 관객들을 향해 춤솜씨를 선보이고 있다./사진=국립극장 

제비는 대감님들의 본처들을 상대하는 강남 클럽의 춤꾼으로 설정되며, 그가 물어다준 ‘박씨‘는 속을 파내 나물을 무쳐 먹으면 탐욕의 마음을 비워주고 ‘비움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화평’의 씨앗이 된다.

성인의 경지에 이른 흥보는 갑질을 일삼다 관아에 끌려갈 신세가 된 놀부의 곤장을 대신 맞아달라는 부탁을 앉아서 천리로 내다보고, ‘골로 가는 언덕‘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형틀에 묶인다.

어이없이 전개되는 ‘흥보씨‘의 이야기는 주리를 틀고 곤장을 쳐도 이실직고를 하지 않는 두 형제 앞에 ‘관찰사’가 등장해 ‘독박’을 제공한 후 결말로 이어진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석 달 열흘 동안 설사를 하게 된다는 ‘독박죽’을 먹은 놀보는 칙간을 보내달라며 데굴데굴 구른 다음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속이 텅 빈 후에야 진실을 깨닫게 된다”는 독박의 효험이었을까? 놀보는 말한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지요. 모두가 합심하여 나를 벌주는구나. 달게 받아야지. 비우니까 속이 편쿠나!”

모든 장남의 권한을 흥보에게 되돌려주고, 우애를 확인한 두 형제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외친다.

“비워내고 게워낸 마음 없을 무, 무심이야. 그때서야 속 빈 속에 본마음이 들어차네. 비워야 하리 텅텅! 그때서야 울리리 텅텅!”

창극 ‘흥보씨‘ 공연 장면. '모년모월모일부 일체 권한 양도'라는 장남 권한 이양 계약서를 쓰고 있는 놀보(왼쪽)와 흥보(오른쪽)./사진=국립극장 

어쩌면 놀보가 비워낸 것은 탐욕이 아니라 ‘분노’와 ‘이기심’이라는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향해 따스함을 보일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비뚤어진 분노, 과욕을 불태울수록 허해지는 빈곤한 마음, 그것인지도 모른다.

‘착함’보다는 ‘이기심’이 필요한 시대, 무조건적인 ‘희생’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든 시대, ‘비움의 철학’이란 가치가 마음에 쉽게 다가오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마음이 각박해져 웃음 대신 분노가 들어차는 시대, 그 속에서 “비워야 하리 텅텅!”이라는 가치가 모든 이의 마음에 ‘착함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온다면, 세상은 훨씬 여유롭고 편안한 곳이 될까?

현재 우리에게 착함이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시대의 진정한 착함은 정녕 종교적 경지에 이르는 ‘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 시대의 ‘착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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