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인물] 대금 명인 이생강, 고고한 '죽혼' 입신(入神)의 경지에 닿다
[김두호가 만난 인물] 대금 명인 이생강, 고고한 '죽혼' 입신(入神)의 경지에 닿다
  • 김두호
  • 승인 201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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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생강,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명인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소리에 취해 대금 배우려해
-피리가락에 인간의 희로애락 담아 낸지 73년째
-민족의 음악혼 이어가는 이생강 대금산조 명인
죽향(竹香) 이생강 대금산조 명인은 5살 때부터 피리, 단소를 불며 성장해 마지막 대금산조 명인들의 맥을 전수받았다. 88올림픽 폐막식 공연 등 국내외 공연기록이 1만회에 이르고, 연주곡과 무용음악을 음반으로 낸 횟수는 무료 600종류에 이른다. 2007년 이생강 명인의 공연을 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금을 배우고 싶다며 대금 8개를 구입해 간 비화도 있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죽향(竹香) 이생강(李生剛 1937∼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 대금산조 명인은 우리의 전통 민족 고유 음악인 대금연주부문에서 '명인'의 경지를 넘어 입신(入神)에 다가선 대금산조 인간문화재다.

산조(散調)는 민속음악에서 기악독주곡이다. 자연의 일부인 대(竹)를 이용해 만든 전통 악기 연주에 일생을 고스란히 쏟아 넣어 '죽혼(竹魂)의 음악인'으로 일컫기도 하는 이생강 명인이 고전과 현대 음악계를 통털어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대표적인 공연이 2005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발표한 '이생강 음악인생 60주년 기념공연'었다.

국내 대형 공연장을 대표하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4300석 관중석을 가득 채우는 공연이 흔치 않았을 때, 5백여 명이 티켓을 구하지 못해 발길을 되돌리게 한 사태는 일찍부터 '이생강 대금 연주'의 명성이 대중 속에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2007년 5월 4일 예술의 전당 국악원 예악당 공연 때는 청중석의 대통령(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소리에 취해 공연 후 죽향을 만나 대금을 배우고 싶다며 대금 8개를 구입해 간 비화도 있다.

이생강 대금산조 명인은 민속음악이 격랑의 시대 뒷전에서 눈물과 설움의 음악으로 간신히 전통을 이어주고 이어받던 시기인 5살 때부터 피리, 단소를 불며 성장해 마지막 대금산조 명인들의 맥을 전수받았고, 1958년부터 국내 각 지역 민속음악경연축제에서 장원, 대상, 특상 등을 휩쓸며 대금 연주의 명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88올림픽 폐막식에서 은은하고 신비한 대금 가락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음악혼을 세계인에게 전달한 순간도 죽향의 연주 기록에 한 줄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외 공연기록이 10,000회에 이르고, 연주곡과 무용음악을 음반으로 낸 횟수가 600종류를 넘어섰다. 맑고 청아한 대금산조에 인간세상의 아름답고 때로는 구성지게 슬프기도 하고 흥겹기도 한 희로애락의 소리를 담아내며 일생을 보낸 죽향을 만나 그의 음악인생 뒤 안에 묻힌 비화를 <인터뷰365>에 풀어 놓게 했다. 그의 인생 이야기는 수천 년을 이어온 고유한 우리 민속음악 대금 연주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역사이기도 하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대금 명인/사진=인터뷰365

◆ 피리 불며 현해탄 건너온 소년

- 조용필 등의 가수가 소속된 최대 대중가요 음반기업이었던 지구레코드가 1980년대에 특별히 대금산조 음반을 낼 정도로 죽향 선생의 대금연주는 오래전부터 팬이 많았다. 민속관악기 연주 음악에서 대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

피리, 단소, 소금, 퉁소, 태평소, 대금 등의 국악 관악기는 크기와 구멍을 비롯한 모양, 음질과 파장에 따라 저마다 소리에 특색이 있고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대금이 국악연주에서 맏형으로 중심 역할을 한다.

신라 때 전설상의 피리인 만파식적(萬波息笛)에서 유래되었으니 1,400여 년 우리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있다. '만파식적'은 문무왕의 넋인 해룡(海龍)과 김유신의 넋인 천신(天神)이 합심해서 용을 통해 보내 준 피리라는 건데, 불면 적을 몰아내고 병을 내좇기도 한다는 유래가 있다.

-국악음악인으로 60주년을 기념해 200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 공연행사는 국악연주 사상 유례 드물게 4,300석의 객석이 입추의 여지없는 만석의 기록을 남겼다. 예약 없이 몰려든 청중이 되돌아가는 사태가 일어나 공연계의 화제가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개최된 행사였는가?

내 연주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모두 대형 홀 공연을 우려했다. 세종문화회관 측에서도 예상을 못한 결과였다. 나는 내 음악세계에 울타리를 만들지 않고 일찍부터 물려받은 우리 조상님들의 전통음악을 많은 대중에게 전도 전파해 국악 애호가를 한사람이라도 더 넓혀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시선 뒷전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고전음악이 아니라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자랑스러운 음악이라는 것을 앞세워 한 곡, 한 곡에 신명을 바쳐 연주해 왔다.

2005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발표한 '이생강 음악인생 60주년 기념공연' 당시 모습.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4300석 관중석을 가득 채우는 공연이 흔치 않았을 때, 500여 명이 티켓을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려야했다. (사진 위부터)이생강 대금 명인의 공연모습, 공연 사진, 출연진 기념사진/사진=이생강 제공

-이력에는 출생지가 1937년 도쿄 아사쿠사 라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 시절이다.

나의 본적지는 경남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지만 손이 귀한 집안의 5대독자인 아버지(이수덕)가 16살 때 징용에 끌려가는 것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조부(이춘기)를 뵙지는 못했지만 구한말 사헌부 감찰사를 지내셨으니 명문 집안이었다. 나는 고향에 살아 본 적도 없이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대피리'라 불렀던 부친의 전통 관악기 연주 재능을 물려받아 피리 불기로 외로움을 달래며 자랐다.

8살 때 부산으로 귀국해 살게 되었지만 이때는 또 우리말이 서툰 '반(半) 일본아이' 취급을 받아 서러움도 많이 겪었다. 소외감과 이질감을 해소하지 못해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내게 꿈과 위안을 준 것이 남보다 특출한 피리 소금 대금 국악기 연주 재능이었다.

-연주 기능과 소질을 물려준 부친 이수덕 어른은 어떤 분인가?

울주 고향마을에는 대나무 밭이 많아 오래전부터 피리를 만들어 부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왼손잡이인 선친은 왼손으로 직접 피리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연주 재능도 탁월해 한번 대피리에 입술이 닿으면 그 소리에 취해 춤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피리나 단소를 불기 시작한 대금 연주의 기초를 선친에게 물려받았지만 전통 대금산조라는 깊은 연주세계에 들어가기까지 수업을 받고 전수를 해 준 스승이 11살부터 스물세 분에 이른다.

-어떤 분들인가?

국악은 궁중음악류의 정악(正樂)과 민간음악류인 민속악으로 크게 구분하고 있는데 민요 산조 시나위 판소리 등이 민속악이다. 민속음악에서 서울이북은 경서도(京西道), 이남은 남도음악이다. 산조나 사투리 토속어가 그대로 반영된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래되어 그곳에 명인 명창들이 많았다.

11살 때 포항에 살다가 만주 혁명단(마적단)을 만나 끔직하고 무서워 집을 나온 뒤 트럭으로 건어물 이동장사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대금을 불었지만 산조는 몰랐다. 민속악기 연주는 주로 춤이나 판소리의 흥을 돋구는 반주가락이었지만 전주역전 동네에서 건어물 트럭위에서 내가 대금을 불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돈을 던져주고 갔다.

1970년대 '대금독주' 음반 표지 사진의 이생강 명인.

그곳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이 대금산조의 명인 한주환 어른이었다. 한주환은 한숙구(본명:한성준)에게 대금을 배웠으며 그 이후에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 6.25 때 다시 피란지 부산에서 한주환 어른을 만나 대금산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 그 분과는 운명적인 사제 관계가 됐다. 얼마 전 타계한 가야금 연주의 황병기 명인(전 이대교수)도 그 시절 이웃에서 국악을 함께 했다고 한다.

그 후 다양한 음악적 영감을 주고 내가 대금산조 독주공연의 시대를 맞도록 재능을 일깨워 준 분은 당대의 마지막 명인들인 전남 영광의 오진석 스승을 비롯해 이춘성, 지영희(가야금 명인 성금련 부군) 선생 등 한참을 헤아려야 한다. 연주 기능과 우리 전통 음악의 영감을 일깨워 준 스승이 스물세 분인데 그 중 열아홉 분이 입을 통한 연주 음악인들이다. 많은 스승 중 아쟁 산조와 판소리의 대가인 한일섭 선생 외에 아쟁산조의 창시자인 정철호(92) 어른만 생존해 계신다.

이생강 대금 명인/사진=인터뷰365 

-많은 스승 중 한주환 명인에게 음악적 영감을 가장 많이 전수받은 것 같다.

첫 인상이 일본 무사 같이 당당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기셨다. 건장한 체격에 콧수염까지 길러 장수 같기도 했다. 칼 대신 긴 대금을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던 그 분은 대금산조 최고 연주자로써의 자긍심이 대단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 평생의 교훈으로 남아 있다. "아가, 이리 오너라. 모든 관악기를 불 때는 뱃속으로 불어야 해. 흐∼하고 뜨거운 입김으로 불어라"던 말씀인데 그로부터 대금의 깊고 오묘하고 구성진 음색의 세계를 찾아 나선 계기가 되었다.

◆ 소리에 취한 대통령도 대금 배우려 했다

-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명인의 소리에 취해 대금을 배우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2007년 5월 4일 예술의 전당에 있는 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했을 때의 얘기일 것이다. 그에 앞서 한 달 전인 4월 5일에도 청와대에 인접한 숙정문 낙성식 기념으로 황지우 시인이 축시를 낭독하고 내가 대금 연주를 한 적이 있었다. 예악당 연주 때는 청중석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의식 못하고 연주를 끝냈더니 국악원 원장실에서 급히 나를 찾았다. 들어가 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실에서 원장도 자리를 비켜난 뒤 이를테면 독대가 이루어 진 것이다.

나를 반갑게 맞이한 노 대통령은 우리 전통 대금 연주의 아름다운 선율에 대한 찬사를 하고 난 뒤 자신도 취미생활로 대금을 꼭 배우고 싶다면서 그 자리에서 대금 구입을 원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 대금 8개를 주문했다. 특별히 거래되는 시세보다 낮추어 포장도 특색 있게 만들게 해서 청와대에 보낸 일이 있다.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생강 명인의 음반들. '앵콜 힛트가요 경음악 1집'(1970), '대금산조'(1985), '죽향-이생강 음악인생 60주년 기념앨범'(2005), '국악의 향기 제1집'

- 최초 해외 공연활동을 시작한 국악인 중의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1960년 이승만대통령이 물러나고 허정 과도정부 수반 시절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민속예술제에 33인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무명국가인 한국을 국제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문화예술정책에서 민속춤의 대가인 최승희 제자들인 무용수와 '춘향전'의 배우로 안나영, 장고의 김옥진, 아쟁의 박성옥을 포함해 33명의 국악연주인 등이 삼성영화사 김관수 사장을 단장으로 해서 파리로 출발했다. 해외로 가려면 도쿄로 가야했던 때인데 앵커리지 공항을 거쳐가는 도쿄발 파리행 북극항로의 비행기 표가 없어서 홍콩, 마닐라, 사이공, 방콕, 테헤란을 거쳐 3일이 걸렸다.

내 대금 연주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바로 이때 파리 공연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으로 '이생강 대금산조'를 선보인 무대가 된 것이다. 배우 안나영이 갑자기 맹장수술을 하게 되어 그의 무대 13분을 대금산조로 채우게 된 것이 최초의 대금산조 독주가 되었고 그 연주는 큰 반응을 불러 모으며 해외에서 극찬을 받았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나의 대금 연주에 청중은 모두 넋을 잃고 소리에 빠져들었다.

참 그 해외 공연 길은 잊을 수 없는 해프닝도 많았다. 프랑스 주재 정일권대사가 준비한 김밥을 맛있게 먹고 2차 공연지인 제네바로 가는 열차를 탈 때 다들 목이 말라 가장 나이가 어린 내가 물병을 한보따리 사서 좀 늦게 열차에 올랐다가 일행과 생이별을 해 호되게 고생한 일이 있다.

- '이생강 대금산조'가 시작된 의미 깊은 공연 길에 겪은 생이별 고생담이라면.

출발한 열차에서 물병보따리를 안고 일행이 탄 열차 칸을 찾다가 내가 물장수인줄 알고 여객들이 덤비는 통에 우왕좌왕하다가 내가 탄 칸이 일행이 탄 객차와 중도에 떨어져 나가 목적지가 바뀌는 것을 몰랐다.

제네바로 가는 줄 알았던 열차가 18시간 만에 이탈리아 제노바(영어명 제노아)역에 도착했다. 손짓발짓의 언어 소통을 해가며 스위스 제네바역으로 되돌아간 사연은 지금도 함께 간 분들과 만나면 화제거리가 된다. 내가 군대 있을 때도 그랬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는 극복하고 돌파하는 좀 담대한 담력이 있다.

001대금 사진(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대금 명인/사진=이생강 제공

◆ 소금 연주에 장병들 11번 앵콜, 울며 들어

-군 복무 시절에도 국악연주를 했다는데.

대금보다 작은 소금을 불었다. 유격훈련부대에서부터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상관의 명령으로 소금을 불었다. 하도 지쳐서 악기 구멍을 망가뜨려 놓기도 했다. 물론 구하기 힘든 것이니 고칠 수 있도록 살짝 고장을 냈지만.

내가 시달림을 받던 어느 날에는 난데없이 나타난 소위 계급장의 장교가 형님하며 다가와 세상에서 피리를 제일 잘 부는 우리 형님을 누가 괴롭히느냐면서 보호막이 되어 주기도 했다. 입대 전에 나를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그가 주선해 부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 연주공연을 할 때는 깊은 산속에 잔잔한 메아리를 만든 가락의 파장이 가슴속으로 애절하게 스며들게 한 탓인지 장병들이 다들 훌쩍훌쩍 우는 모습을 보였다.

11번이나 앵콜을 외쳐댔다. 나도 지쳐서 눈물이 나도록 불었다. 사단장이 특명으로 의무실로 쓰던 간이 텐트시설을 나의 공연 연습장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코미디언 고 이주일이 같은 부대에 복무했는데 나보다 10개월 선임 대원으로 방송국을 비롯해 많은 무대에서 함께 서기도 했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대금 명인/사진=이생강 제공

-보통 퉁소와 피리로 통하는 소금 대금 등의 가락은 밝고 즐겁게 흥을 돋우는 연주보다 구성지고 애조 띤 가락의 악기라는 선입관이 따른다.

아니다.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는 악기다. 연주자의 다양한 감정 표현이나 창작 산조의 음역은 바다보다 깊고 넓다. 소리가 다를 뿐 일반 다른 악기와 같은 기능의 연주 음악을 하는 신비로운 전통 관악기다. 나는 현대 음악 중 대중음악인들과도 음악연주로 많이 소통하고 협연하며 살았다. 가요 발전의 큰 별인 고 이봉조, 길옥윤 음악인과도 많은 교류를 나누었다.

마술사는 눈을 속이고 음악인은 귀를 속인다고 하지 않는가. 서양악기는 서양인들의 전통음악 속에서 전해온 가락을 나타낸다면 우리의 귀에 익은 악기는 전통 국악기인데 그게 급격한 서양음악의 상륙으로 가장자리를 내주고 떠돌이 악극단의 연주음악으로 뒷전에 밀려나면서 우리 국악이 시대에 맞는 전통 음악으로 보급, 발전이 늦어졌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명장이 아들인 이광훈 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아버지에 이어 대금산조의 맥을 잇고 있는 이광훈 씨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전수교육조교로 문화재청에 등재됐다./사진=인터뷰365

-아드님이 대금산조 전수교육조교로 문화재청에 등재되어 있다. 가족을 모두 소개해 달라.

내가 연주 재능을 선친에게 물려받았으니 혈육부터 물려받아 이어갔으면 했는데 1남 2녀 중 아들(이광훈 1966∼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전수교육조교)이 9살 때부터 소질을 드러냈다. 한 번 가르쳐 준 것을 두 번 묻지 않고 연주해내더라. 중앙대학교에서 우리 음악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도 수료해 보람을 느끼게 한다.

손주까지 선천적인 재주가 있는 듯 해 생전에 더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 아내(최순이 1944∼)는 전업주부로 살았고 큰 딸(이선경 1964∼)은 대중가요 쪽에 재능을 보여 과거 해오라기 멤버로 노래를 했다. 작은 딸(이혜경 1969∼)은 하와이에 살고 있다.

<죽향 이생강 주요 약력>

1942 이수덕 부친으로부터 전통관악기 기초 습득

1947∼1962 한주환 등 명인들에게 대금 산조 사사

1958 진주개천예술제 특상

1960 파리 세계민속예술제 참가

1966 일본민단 초철 순회공연

1968 멕시코올림픽 민속예술제 참가

1970 TBC 전국국악명인 대상

1971 문공부 파견 유럽순회공연

1972 뮌헨올림픽 공연후 4개월 간 유럽,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순회공연

1973 국민훈장 목련장

1978 전주대사습 장원

1984 신라문화제 대통령상

1984, 1987 연2회 KBS국악대상, 제5차 미국 순회공연

1988 서울올림픽 폐막식 독주

1996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 독주

1997 대한민국국민상

2002 한국국악대상

2002 문화관광부 파견 유럽순회

2001 한국예술실연자단체연합회 국악대상

2004 한국예술총연합회 대상

2004 제주 한라세계예술제 독주

2005 세종문화회관 60주년 기념공연

2005 방일영국악상

2011 한민족 대상

2016 세계명품브랜드대상

2017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덕수궁 공개행사

2017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염원 음악회

2018 평창올림픽 기념콘서트현재 (사)예능 무형문화재 부이사장, (사)죽향대금산조원형보존회 이사장.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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