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가 품은 고통·우울 그리고 아름다움...마이클 키간-돌란 '백조의 호수'
아일랜드가 품은 고통·우울 그리고 아름다움...마이클 키간-돌란 '백조의 호수'
  • 주하영
  • 승인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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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아일랜드 무용극 '백조의 호수' 리뷰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저주에 걸려 백조가 된 피놀라와 우울한 지미/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그는 “아일랜드 작가가 아일랜드적인 주제와 감성을 피하는 것은 ‘망각’을 위한 자선행위와 다를 바 없다”면서, “민족성 없이 위대한 문학은 없고, 문학 없이 위대한 민족성은 없다”고 말했다. 

예이츠는 이미 기원전 9세기부터 아일랜드에 거주해 온 것으로 보이는 켈트족을 지칭하는 ‘게일인’의 신화, 전설, 동화들을 수집하고 과거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주도자였다.

2017년 1인당 국민총생산 세계 5위를 차지한 아일랜드 공화국은 19세기 아일랜드의 역사가 윌리엄 리키로부터 “인류 역사상 이처럼 고난을 겪은 민족은 없다”고 평가되었던 ‘고통과 슬픔의 나라’였다.

12세기 중반부터 80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와 지배는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고,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기까지 복잡하고 아픈 저항의 역사를 품도록 만들었다.

아일랜드 내에서 무엇보다 큰 갈등이 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아일랜드계 구교도들과 영국계 신교도들의 종교적 대립이었다. 5세기경 성 패트릭에 의해 가톨릭이 전파된 후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이 가톨릭 구교를 믿고 있는 가운데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이 불러온 종교적 박해는 아일랜드 토착 게일인들과 영국 이주자들 사이의 민족적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이츠는 종교적 구분을 떠나 아일랜드만의 정체성을 찾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문예부흥운동을 통해 ‘게일어’를 되살리고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아일랜드만의 문화와 관습을 장려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갔다.

이처럼 아일랜드는 오랜 전통으로 간직되어 온 켈트의 신화와 전설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국민의 90%가 가톨릭교도로 구성된 종교가 지배적인 국가로서 게일어와 영어가 혼용되는 아일랜드만의 독특한 색채와 문화를 담고 있다.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아름답지만 슬픈 백조의 모습./사진=LG아트센터

최근 LG아트센터는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를 선보였다. 2016년 아이리시 타임즈 씨어터 어워즈 ‘최고 작품상’과 ‘의상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2017년 영국 내셔널 댄스 어워즈 ‘베스트 현대무용 안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새로운 ‘백조의 호수‘의 안무와 연출을 맡은 마이클 키간-돌란은 마법에 걸린 백조와 우울한 왕자의 ‘어둡고도 슬픈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는 발레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 구조에 아일랜드가 품고 있는 전통과 역사, 종교를 대변할 수 있는 전설 ‘리어의 아이들‘과 현대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실업자 청년 존 카티의 죽음’이라는 실제 사건을 접목시켰다.  

‘리어의 아이들‘은 아일랜드의 유명한 전설이다. 바다의 신 ‘리어’는 아내 이브가 죽자 딸 피놀라와 세 동생들을 잘 키워줄 ‘이파’와 재혼한다. 아이들을 향한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질투하던 이파는 아이들에게 마법을 걸어 900년 동안 백조의 모습으로 세 개의 호수를 떠돌며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900년의 세월을 고난과 슬픔 속에서 보낸 아이들은 마침내 한 성인에게 세례를 받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한다.

2000년 4월, 아일랜드 롱퍼드 지역에서 우울증을 앓아 온 27세의 실직 청년 존 카티는 농촌주택 공영화 정책의 일환으로 300년이 넘는 세월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버리고 현대식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새로운 주거지로 이사해야 하는 문제로 경찰들과 대립한다.

어머니 로즈는 두려움으로 인해 친척 집으로 떠나고, 총을 장전한 채 홀로 남아 그 누구도 자신을 끌어낼 수 없다고 버티던 카티는 집을 둘러싼 다수의 아일랜드 경찰 병력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현장에서 사살된다.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마이클 키간-돌란은 ‘백조의 호수‘의 왕자를 우울증을 앓고 있는 36세의 갈 곳 없는 실직자 ‘지미’로, 마법에 걸린 백조를 자신을 성추행한 성직자가 입을 막기 위해 저주를 내린 탓에 백조로 변해버린 ‘피놀라’로 설정함으로써 전혀 다른 ‘어둡고 암울한 세상’을 창조한다.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에 시달리며 밤마다 신음소리로 집안을 채우는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 선물로 1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산탄총을 선물한다.

지역 정치인은 주택 공영화 정책을 홍보할 목적으로 휠체어에 탄 채 생활하는 어머니와 실업자 지미의 새로운 주거지 입성을 독촉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우울증에 시달려 온 지미는 이 소식이 전혀 반갑지 않다.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오랜 세월 아버지가 손수 쌓아 올린 벽돌의 견고함 속에 그나마 자신의 디딜 곳을 찾을 수 있었던 지미는 불안하기만 하다.

세 개의 콘크리트 벽돌 위에 위태롭게 두 다리와 몸을 끼워 넣은 채 어렵게 잠을 청하는 지미의 모습은 그의 불안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어깨는 축 쳐지고 눈은 반쯤 감겨있는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의 지미는 어떻게든 여자와 짝을 지어 결혼을 시키려는 어머니의 억압과 주택 이주의 독촉이 심화됨에 따라 점점 더 주눅이 들고 우울해져간다. 그의 불안정한 상태는 세로로 세워진 세 개의 콘크리트 벽돌 위에 아슬아슬하게 두 발을 딛고 아버지의 산탄총을 껴안은 채 잠드는 지미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무대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공사장 거치대, 폐기물 처리에나 쓰일 법한 거대한 검은 비닐, 여기 저기 걸려있는 백조의 날개, 트렁크처럼 보이는 무대소품 박스, 콘크리트 벽돌, 그리고 뮤지션과 배우, 무용수로 구성된 13명의 출연진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는 관객의 연극적 상상력을 요구하며, 수많은 기호들을 생산한다.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콘크리트 벽돌은 아이들의 블록 쌓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 각기 침대로, 집으로, 지미의 방으로 변화하며, 쌓아올린 벽돌들이 쓰러질 때 만들어지는 커다란 소리는 지미와 경찰들이 발포하는 총소리로 표현된다.

바퀴달린 소품박스는 자동차와 경찰차의 역할을 하며, 거대한 검은 비닐은 흐르는 호수의 깊은 물결을 상징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아일랜드와 노르웨이의 민속음악에 미니멀리즘과 아방가르드의 실험적 조합으로 탄생한 트리오 밴드 ‘슬로우 무빙 클라우드’의 새로운 선율로 대체되고, 심지어 1인 5역을 소화해 내는 아일랜드의 유명배우 마이클 머피는 밥 딜런의 ‘A hard rain's gonna fall‘의 노래 일부를 직접 부르기도 한다.

무대는 이미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부터 벌거벗은 늙은 몸으로 목이 줄에 매인 채 염소 울음 소리를 내며 원으로 돌고 있는 마이클 머피에 의해 채워져 있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객석에서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온 세 명의 유대인 랍비에 의해 제물로 바쳐지듯 씻김을 당하고 붉은 수건으로 닦인 후 인간의 옷으로 갈아입혀진다.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지미의 신부가 되기 위해 찾아 온 마을 처녀들/사진=LG아트센터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광란의 생일파티 장면/사진=LG아트센터

취조실로 보이는 곳에서 머피는 차와 쿠키를 게걸스럽게 먹고 담배를 피운 후 지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머피는 그 외에도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피놀라를 성추행하고, 이를 목격한 세 여동생들마저 모두 말을 하지 못하도록 저주를 걸어 백조로 만들어버리는 성직자 로트바트를 연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주민들을 이용하며, 권위를 내세워 위협이 되지 않을지도 모를 지미를 향해 경찰이 총을 발사하도록 억압하는 정치인으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정당하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진압작전을 지시하는 경찰로, 광란의 생일파티 장면에서 뿔 달린 목양신 ‘바포메트’의 탈을 쓴 악마로 등장한다.

그는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힘, 즉 ‘암흑’을 대변한다. 성직자의 신분으로 17세의 어린 소녀를 추행하고 은폐한 자신의 죄를 상기시기는 백조 피놀라를 향해 그는 분노를 터뜨리며 그녀를 학대하고 폭력적으로 목을 조르며 외친다. “너는 나를 용서해야만 해!”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는 오랜 기간 아일랜드를 지배해 온 종교의 억압과 권력의 부패함, 불공정, 폭력 뿐 아니라 현대 사회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우울함과 절망, 소외감과 같은 정신적 병폐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피놀라와 여동생 백조들의 호숫가에서의 춤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피놀라와 여동생 백조들의 호숫가 장면/사진=LG아트센터

우울증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을 결심하는 지미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없다. 호숫가에서 아버지의 총을 턱 밑에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기려는 지미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폭력에 상처입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목소리마저 잃은 슬픈 백조 ‘피놀라’였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듀엣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다. 상처 입은 존재들의 소통, 위로, 치유의 몸짓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 슬픔, 그리고 서로를 향한 간절한 갈망을 느끼도록 만든다.

하지만 마이클 키간-돌란은 그들에게 희극을 선사하지 않는다. 희극은 환상이고, 환상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기에 우리의 두 눈을 가리고 현실에서 멀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피놀라는 자신의 억울함을 끝내 토로하지 못한 채 검은 백조의 모습으로 호수 속에 잠들고, 지미는 끝내 아버지의 집을 지키지 못한 채 경찰들의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른다.

마이클 키간-돌란은 시드니 지역단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돌을 뒤집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보듯 우리는 겉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오히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에 대해 제대로 말해줄 필요가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작품은 고전으로 간주되던 발레의 ‘골격’에 현재의 아일랜드의 상황과 조건을 입혀 신화를 통해 꿰뚫어보는 일종의 새롭고 급진적인 ‘게일적’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암흑’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삶은 복잡하고 골목마다 어둠이 도사리고 있지만 빛 또한 존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암흑을 향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이며, 그 용기를 지속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줄 격려와 지지의 몸짓이다.

6kg에 달하는 하얀 깃털들이 뒤덮은 무대/사진=LG아트센터

그는 자신만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점점 집단 우울증에 지쳐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고통의 완화를 선물할 수 있는 ‘예술의 역할’을 강조한다. 누구의 삶에나 있는 슬픔과 우울, 낙담과 절망이라는 저주에 걸려 점점 더 ‘검은 백조’로 변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소통’과 ‘위로’를 상징하는 ‘하얀 깃털’을 관객석으로 날린다.

6kg에 달하는 깃털들이 무용수들의 몸짓과 춤, 음악에 너울거리며 하얀 눈처럼 객석으로 쏟아질 때, 공중에 부유하며 퍼져나가는 하얀 깃털들은 피놀라의 ‘눈물’이 되고, 지미의 ‘한숨’이 되고, 관객들의 ‘연민’이 되어 모든 공간을 촘촘히 메운다. 연민은 ‘위안’이 되고, ‘따스함’이 되고 우리의 몸을 감싼다.

마이클 키간-돌란의 말처럼 “삶에는 암흑도 있지만, 빛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연민’이 있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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