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지배하는 삶의 고통, 광기의 폭주…연극 '미저리'
환상이 지배하는 삶의 고통, 광기의 폭주…연극 '미저리'
  • 주하영
  • 승인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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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미저리' 공연 장면/사진=스토리P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환상이 배고픈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탐닉하여도 채워지지 않으며, 늘 결핍으로 존재한다. 결핍은 악순환을 낳는다. 환상을 원하면 원할수록, 결핍은 커지고,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며,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비참함은 커진다.

비참함은 또 위로를 찾아, 구원을 찾아 환상으로 도피하게 만들고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외치도록 만든다. 환상에 대한 집착은 광기를 만들고, 광기는 누군가를 향해 표출되며, 현실 속의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비극을 낳는다.

연극 '미저리' 포스터/사진=스토리P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는 ‘미저리‘ 시리즈의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과 ‘환상‘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광기로 변질된 ‘넘버원 팬‘ 애니 윌크스의 공포스러운 연극 ‘미저리‘의 공연이 한창이다.

스릴러의 대가라 불리는 스티븐 킹의 1987년 소설을 윌리엄 골드먼이 각색한 연극 ‘미저리‘는 2015년 브로드웨이에서 흥행을 거두며 이미 그 상업성을 입증한 바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로리 멧칼프의 주연으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연극 ‘미저리‘는 1990년 로브 라이너 감독의 영화 ‘미저리‘와의 차별성을 위해 스릴러의 ‘공포스러움’을 강조하기보다는 광기로 치닫는 열성팬의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두었다.

1990년 당시 스크린 대본을 맡았던 윌리엄 골드먼은 2015년 연극의 각색도 맡으면서 폴과 애니라는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소외된 삶’과 ‘기형적 외로움’을 강조하고, 서스펜스를 살릴 수 있도록 보안관 ‘버스터’만을 이따금 등장시키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이 때문에 연극 ‘미저리‘의 경우, 영화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캐시 베이츠의 정신병적 연쇄 살인마로서의 애니의 이미지가 반감된 측면이 없지 않다. 반면에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환상’으로 도피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한 인간의 잘못된 사랑과 집착, 광기가 불러오는 공포와 섬뜩함이란 주제적 측면이 부각되었다.

연극 '미저리' 공연 장면/사진=스토리P  

극은 폴이 새롭게 집필한 원고를 들고 뉴욕으로 향하던 중 눈보라로 인해 차량이 전복되고, 자신을 구한 넘버원 팬 애니의 집 침대에 누워 눈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평소에 광적으로 존경했던 작가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직접 돌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해 어쩔 줄 모르던 애니는 폴이 새롭게 완성했다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글’을 읽으며 점차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로맨스의 세상이 아닌 현실의 세상을 담아낸 폴의 소설을 혹평하던 애니는 뉴욕 할렘가의 욕설이 난무하는 장면들에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갑자기 폴을 향해 ‘세제를 푼 물’을 마시라고 강요한다. 어쩌다가 욕을 할 때면 엄마가 자신의 입을 세제로 박박 문질러 씻어냈다고 회상하는 애니는 폴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러게 ‘미저리‘시리즈만 썼다면 그런 욕은 쓸 필요가 없잖아! 1860년대에는 그런 욕이 아예 없었으니까!”

고아로 버려진 ‘미저리’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장해 반전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소설 시리즈에 푹 빠져있는 애니는 사실상 ‘작가’가 아닌 작가가 만들어놓은 ‘환상 속 세상’에 미쳐있다.애니는 폴 셸던이라는 작가의 목숨을 구한 사실보다는 하마터면 자신의 유일한 보물 ‘미저리‘가 8권에서 허망하게 끝나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자신의 도움으로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실제로 그녀가 폴에게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들은 모두 소설 ‘미저리‘와 연관이 있다. 그녀는 ‘미저리‘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이며, 새롭게 출시된 ‘미저리‘의 9권 초판을 사왔을 때나 폴이 죽은 미저리를 다시 세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10권을 쓰고 있을 때에만 ‘사랑’을 언급한다. 그녀는 심지어 세상에서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돌아가신 엄마와 미저리 뿐이라고 말한다.

연극 '미저리' 공연 장면/사진=스토리P  

그녀는 폴 셸던의 ‘소설’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애니에게 미저리는 삶의 가장 고독했던 순간에 자신에게 찾아온 유일한 친구이며 불운한 그녀 자신이고, 미저리가 살고 있는 소설 속 세상은 현재를 완전히 잊고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 뿐 아니라 그녀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완벽한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서 주인공 미저리는 반드시 사랑을 쟁취해야 하며,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야 하며, 그 누구보다 행복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한다. 현실에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들이 ‘환상’ 속에서는 이루어지는 법이고, 그것이 대중이 ‘환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은 좀 더 심오한 작품을 쓰고 싶은 자신의 창작욕을 채우고자 주인공 미저리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리는 예상치 못한 결말로 시리즈를 끝내버린다.

당장 미저리를 살려내라며 울면서 발버둥 치던 애니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애니는 폴의 단 하나뿐인 새로운 소설의 원고를 다 태워버리고,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면서 죽은 주인공을 다시 살려내 ‘미저리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이어나갈 것을 강요한다.

연극 '미저리' 공연 장면/사진=스토리P  

이제 애니의 돌봄이 ‘친절’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폴은 ‘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가 콜로라도 실버 크릭 외곽의 외딴 집에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탈골된 어깨가 아직 다 낫지도 않은 채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방문은 잠겨있고 전화도 연결되지 않은 곳에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다며 총을 들이대는, 현실을 벗어난 광기어린 여자가 폴을 억압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할리우드 리포터‘에 리뷰를 쓴 데이비드 루니는 연극 ‘미저리‘의 액션이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됨‘에 주목한다. 폴이 탈출을 위해 어떤 계획을 짜면, 애니는 어김없이 그 계획을 실패로 만들고 만다. 휠체어에 탄 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폴이 보여주는 여러 번의 탈출시도와 계획, 실패의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폴과 함께 호흡하고 안타까워한다.

실제로 360도로 회전하며 애니의 오두막집의 앞쪽과 뒤쪽 뿐 아니라 거실과 방, 복도, 현관으로 이어지는 내부가 관객들에게 모두 노출되는 무대는 좁은 통로를 휠체어에 탄 채 힘겹게 오가며 애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방문을 제 때에 닫고 들어가야 하는 폴의 긴박감만으로도 충분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또한, 연극이 끝날 때까지 객석에 앉은 채 움직일 수 없는 관객들의 현실은 휠체어에 앉은 채 갇혀있는 폴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장면전환을 위해 암전이 반복될 때마다 어둠 속을 채우는 음악들은 스릴러적 긴장감을 높이기도 하고, 주제적인 측면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며, 관객들의 긴장관계를 조절한다.

연극 '미저리' 공연 무대/사진=스토리P  

애니의 ‘고통’은 이미 예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환상이 지배하는 삶 속에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인간은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의 육체가 살아 숨 쉬는 곳,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공간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위안이 필요할 때, 도망치고 싶을 때, 지치고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그리고 꿈꾸고 싶을 때 우리는 환상을 찾는다.

하지만 환상은 우리가 머릿속에 그려내는 세상일 뿐이다. 환상은 우리에게 도피처이고, 휴식처이며, 또 다른 세상일지 모르지만 인간이 육체를 떠나 살 수 없듯 현실을 떠나 살 수는 없다.

폴에 의해 사라진 ‘미저리의 삶’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소설 ‘미저리‘라는 환상 속 세상을 지키기 위해 현실 속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함과 고마움이라는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지 모를 ‘진짜 기회’를 무참히 짓밟아버린 애니가 답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관객들이 그녀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연극 '미저리' 공연 장면/사진=스토리P  

몸이 갇혀있는 폴의 구원은 가능하지만 정신이 갇혀있는 애니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스스로를 ‘환상’이라는 감옥 속에 가두어 버렸다. 자신이 아는 세상,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에서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도록 자신의 두 눈을 가리고, 두 팔을 묶고, 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절단해 버린 채 죽음을 향해 치닫는 것은 오히려 애니 인지도 모른다.

직면은 고통스럽다. 진실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이 없는 세상은 애니와 같은 허상으로 가득한 허깨비의 세상을 만든다. 폴은 깨닫는다. 만약 자신이 허구로 구현해 놓았던 세상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그 세상을 파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좀 더 설득력 있는 삶을, 좀 더 개연성 있는 죽음을 미저리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면 넘버원 팬인 애니의 폭주를 막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깨달음은 폴로 하여금 ‘미저리의 귀환‘을 세상에 내놓도록 만든다.

영화 ‘미저리‘가 스티븐 킹 소설의 공포스릴러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그림’이라 한다면, 연극 ‘미저리‘는 인물들의 입체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조각상’이라 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전체가 달리 보이겠지만, 현실의 고통이 두려워 환상의 늪에 빠져버린 ‘넘버원 팬’의 광기의 질주가 궁금하다면, 연극 ‘미저리‘를 통해 확인해봄이 어떨지. 4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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