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소녀 '빨간 망토'의 발칙한 이야기...창극 '소녀가'
주체적인 소녀 '빨간 망토'의 발칙한 이야기...창극 '소녀가'
  • 주하영
  • 승인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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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사진=국립극장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동화의 기원은 무엇일까? 동화는 언제부터 존재했으며, 왜 생겨난 것일까? 어릴 적 잠자리에서 듣거나 읽던 그 많은 이야기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있는 '푸른 수염 이야기'가 15세기 프랑스 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린 '푸른 수염'의 저자 발레리 오그덴은 사실상 많은 동화들이 "불편하고 잔혹한 역사적 사건들을 상당부분 희석시켜 어른들에게 전달하던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녀는 동화 속 이야기들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종종 "강간, 근친상간, 고문, 식인주의와 같이 끔찍한 사건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동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들이 긴 세월 아이들의 무의식에 작용하면서 성장하는 동안 겪게 될 세상의 불공정과 모순, 위험에 맞서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교훈을 제공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그덴은 동화는 구전을 바탕으로 한 전설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당 전설이 유래한 문화권의 관습과 믿음, 정신과 같은 사고들을 담기 마련이고, 일종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2018년 국립창극단의 '신창극시리즈' 첫 번째 공연이었던 이자람의 창극 '소녀가'는 주체적인 소녀 '빨간 망토'의 발칙하고 도발적인 이야기를 5일간의 짧은 공연을 통해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신창극시리즈'는 창극을 찾는 관객층의 다변화에 부흥하고자 젊은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시대의 감수성을 흡수한다는 새로운 프로젝트이다.

'소녀가'의 작창과 작곡, 음악감독, 극본, 연출까지 도맡은 이자람은 일반 대중에게 '내 이름 예솔아'를 부른 꼬마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미 공연계에서는 '이자람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 매니아층이 두터운 예술가이다.

판소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국내 무대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무대에서도 호평을 받아 온 젊은 국악인 이자람은 2007년과 2011년 브레히트의 서사극들을 바탕으로 한 판소리 '사천가'와 '억척가'에 이어, 2014년 2월 주요섭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추물/살인', 2014년 8월 마르케스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방인의 노래'를 통해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악인 이자람은 '소녀가'의 작창과 작곡, 음악감독, 극본, 연출까지 도맡았다./사진=국립극장

이자람 판소리의 특징은 '어렵고, 길고, 보기 힘든 장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서사가 담겨있는 '흥미롭고, 극적이며, 감정적인 퍼포먼스'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전통 판소리의 연희형태인 소리꾼과 고수의 무대를 유지하면서도 타악기와 베이스, 건반들로 분화된 여러 명의 '고수'를 통해 현대적 선율을 더하고 국악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을 아우르는 이자람만의 판소리는 무엇보다 그녀가 관객들에게 풀어내거나 전달하려고 선택한 '이야기'에 그 특이점이 있다.

그녀는 소리꾼 한 명이 다양한 인물들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판소리의 향연 속에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 즉, 여러 문학 속에 담겨있는 문제의식 혹은 생각들을 담아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소통한다.

이자람이 '신창극시리즈'를 위해 새롭게 선택한 이야기는 놀랍게도 어린이들에게 매우 친숙한 동화 '빨간 망토'였다.

'빨간 망토'는 1697년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가 민간에 전승되던 이야기들을 묶어 편찬한 '도덕적 교훈이 담겨있는 옛날이야기'에 실려 있는 11편의 동화 중의 하나이다. 페로의 '빨간 망토'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픈 할머니에게 음식을 전하러 가던 소녀가 숲 속에서 늑대를 만나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게 되고, 그로 인해 할머니 뿐 아니라 소녀 자신도 희생된다는 비극적 결말로 끝이 난다.

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 (8)
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사진=국립극장

1812년 독일의 그림 형제는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집'을 통해 훨씬 순화된 버전의 '빨간 망토'를 선보였는데, 이 경우 때마침 할머니 집 앞을 지나가던 사냥꾼이 두 사람을 잡아먹은 늑대를 발견하고 배를 갈라 할머니와 소녀를 구한 후 늑대의 배 안에 돌을 가득 채워 우물에 빠뜨리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2013년 영국의 인류학자 제이미 테라니는 '빨간 망토'의 버전이 약 58개에 달하며, 그 기원은 약 2000년 전 유럽과 중동 사이의 어딘가로 보인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테라니에 따르면, 사냥꾼이 소녀를 구하는 버전도 있지만 다른 경우 소녀가 자신 스스로를 구하기도 하며, 소녀가 소년으로 대체되거나 늑대가 호랑이 혹은 표범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는 하나이다. 숲에서 경계를 게을리 할 경우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페로의 '빨간 망토'는 아이들을 겨냥한 동화가 아닌 사교문화가 발달했던 17세기의 프랑스 소녀들에게 거짓으로 위장하고 말로 속이는 남성들의 유혹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집을 떠나는 소녀는 늑대와 같은 남자들에게 속아 이용당할 위험을 안고 있으며, 소녀가 입고 있는 붉은 망토는 여성의 처녀성 혹은 월경 주기를 상징했다. 페로 이전의 이야기들은 심지어 늑대가 할머니의 살로 스테이크를 만들고, 이를 뽑아 쌀이라 속이며, 피를 와인이라며 마시게 하는 끔찍한 식인주의가 등장하고, 소녀로 하여금 옷을 벗어 난로에 넣고 태워버리게 한 후 침대에 동침하는 성폭력 범죄가 등장한다.

이자람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녀가'의 원전이 프랑스의 동화작가 장 자크 프디다의 그림책 '빨간 망토 혹은 양철캔을 쓴 소녀'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2010년에 출간된 프디다의 그림책은 '샤를 페로 이전의 이야기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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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사진=국립극장

이자람은 프디다의 그림책에서 "소녀가 자신의 호기심을 막는 사회적 금기를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 빠져나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지적하는데, 이 역시 페로 이전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늑대가 할머니로 가장하고 있음을 눈치 챈 소녀는 화장실에 가야할 필요성을 주장하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간다. 늑대는 소녀의 발목에 줄을 묶어 소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지만 영리한 소녀는 그 줄을 나무에 묶어 놓은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재빨리 숲을 달려 자신의 집으로 도망쳐 버린다.

이자람의 '소녀가'는 기본적으로 프디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곳곳에 자신만의 메시지들을 삽입하고 변형하는 창의력을 발휘한다.

소녀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픈 호기심으로 가득한 발칙하고 천방지축인 말괄량이로 등장한다.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소녀는 기존의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사회적 규범을 상징하는 '철로 만든 드레스'와 '철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다.

집 앞에 펼쳐진 미지의 숲을 빨리 지나가고픈 소녀는 청소를 하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숲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엄마는 어른이 되면 누구나 지나가게 되는 곳이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경험으로 기억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길 뿐이다.

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 (8)
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사진=국립극장

소녀는 입고 있는 철로 만든 드레스가 벗겨지는 날 숲으로 갈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연결된 나사와 고리들을 느슨하게 만들고, 결국 엄마가 선물해 준 '빨간 망토'를 입고 할머니께 드릴 케이크를 손에 든 채 집을 나선다.

모두들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 '숲'을 향해 "나는 다 알고 있었다"를 반복해 외치는 소녀는 늑대가 유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자신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인식하고 있다. 소녀는 발칙하게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기존의 관습 속에 보호라는 미명으로 세워놓은 가치들로 가득한 '나무의 길'이 아닌 이모들이 물장난을 하고 꽃을 따며 모험을 즐겼던 '물의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소녀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모험'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소녀는 용감하고 자유롭다. 소녀는 기존 사회가 전통이란 이름으로 고수해 온 여성의 덕목들, 조신함과 수줍음, 수동적 태도와 같은 과거의 것들에 과감히 반기를 든다. 소녀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며 피하는 대신 보다 적극적으로 알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로 선택한다. 관객들에게 소녀는 발칙하고 민망하며 때로는 불편하다. 우리는 소녀와 다르게 이미 사회적으로 학습된 가치와 코드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소녀를 비롯해 할머니, 늑대,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키우던 고양이와 까마귀까지 여러 등장인물을 한꺼번에 연기해야 하는 소리꾼 이소연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자가 아닌 자신의 순수한 욕망과 마주한 성장하는 아이를 그리고 싶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이미 사회적 코드를 통해 학습해 온 '소녀'의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자람은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게 쌓인 학습이 누구의 시선인지, 나는 무엇에 길들여졌으며 어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스스로에게 건강하고 깨끗한 시선을 훈련해준다면 주어진 남은 생은 세상을 더 기쁘고 맛있게,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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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극시리즈1 '소녀가' 공연사진/사진=국립극장

이야기는 진화한다. 새로운 시대를 거치며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숨 쉬는 가운데 다른 생각, 다른 사고가 더해진 이야기는 때로는 진부하게, 때로는 참신하게 여겨지며 수용되거나 변화한다.

2000년에 이르는 세월을 거쳐 세계 각지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러 버전으로 전달되어 온 '빨간 망토'의 핵심은 험난한 세상에서 약자가 강자의 꼬임이나 술수, 위력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이 스스로를 영민하게 단련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 뿐임을 시사한다.

동화의 기원이라는 잔혹하고 야만적인 전설들은 어쩌면 환상이 아닌 현실의 단면이며,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들의 목적은 기괴함이나 폭력에 대한 관심이 아닌 현실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가치와 생각, 흐름을 담은 이야기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화는 기존의 환상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교훈, 시대에 맞는 사고를 펼쳐나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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