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세상 속 뒤틀린 삶, 권력을 향한 진군...연극 '리차드 3세'
비틀린 세상 속 뒤틀린 삶, 권력을 향한 진군...연극 '리차드 3세'
  • 주하영
  • 승인 201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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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리차드 3세' 공연 장면/사진=샘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권력에의 의지'를 모든 생명체의 본질적 특징으로 인식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삶의 투쟁에서 남보다 우수해지고 남을 지배하며 더 강해지려는 의지를 ‘자기극복의 의지’라 규정한다.

니체는 말한다. "보라,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 한 가지를 단념하느니 차라리 몰락하고 싶다." 

하지만 자신을 극복해 강해지려는 이유가 남을 지배하고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라면, 승리하고 난 이후에 남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서재형 연출, 한아름 각색의 연극 '리차드 3세'가 지난 4일 막을 내렸다. 못생긴 얼굴과 움츠러든 왼팔, 거울마저 비웃을 만큼 볼품없는 곱사등의 악인으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는 10년 만에 연극 무대로 되돌아왔다는 국민배우 황정민의 '성공적인 복귀작'이란 평을 받으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국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들을 위해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복잡한 작품을 각색해야 하는 부담에 대해 한아름 작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캐릭터가 결심하는 단계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은 작품이라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근거를 만들어야 했다"면서 "새로 만든 대사가 많은데 꼭 살려야 하는 명문은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연극 '리차드 3세' 공연 장면. 리처드가 악행으로 치닫을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고 있다./사진=샘컴퍼니

셰익스피어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이 반영되었다는 사극들은 총 10편이지만 보통 '존 왕'과 '헨리 8세'를 제외한 8편을 극작 시기에 맞추어 '제 1기 4부작'과 '제 2기 4부작'으로 나눈다.

8개의 사극은 거의 1세기에 달하는 튜더 왕조 수립의 전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리처드 3세'는 '헨리 6세 1부-3부'를 포함한 '제 1기 4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랭커스터 혈통의 리치먼드 백작이 헨리 7세로 왕위에 오르며 튜더 왕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끝을 맺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당대의 군주가 튜더 왕조의 마지막이라 일컬어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리처드 3세가 악독한 군주로 그려진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사실상 셰익스피어는 사극 줄거리의 대부분을 라파엘 홀린셰드의 '연대기'와 에드워드 홀의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의 이야기'에서 차용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원전이 되는 역사서들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창작 목적에 맞게 재배열하거나 압축, 생략, 추가함으로써 새롭게 재창조하였는데, 리처드 3세의 경우 단순한 폭군이 아닌 '극적인 악인'이라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대단한 인물상들 중 하나로 꼽힌다.

'리처드 3세'는 붉은 장미로 대변되는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로 대변되는 요크 가문의 30년 동안 이어진 왕권전쟁의 막바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헨리 6세' 1부-3부와의 연계가 필요하다.

특히 '헨리 6세' 3부는 리처드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를 죽이고 자신의 형 에드워드를 왕위에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과정과 '리처드 3세'에서 유령처럼 등장해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는 미망인 마가렛 왕비의 몰락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리처드가 극 초반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는 대사를 하게 된 실질적 동기와 이유를 짐작케 한다.

마가렛 왕비가 퍼부은 저주가 점차 자신을 휘감고 있음을 인지하는 리처드
연극 '리차드 3세' 공연 장면. 마가렛 왕비가 퍼부은 저주가 점차 자신을 휘감고 있음을 인지하는 리처드/사진=샘컴퍼니

서재형 연출의 '리차드 3세'의 막이 오르면, 검은 상복을 입고 머리를 산발한 채 마치 죽은 영혼처럼 떠도는 왕비 마가렛이 등장해 관객들을 향해 외친다.

"아는가? 그대는 아는가? 그대들은 아는가?...이제 잠들었던 비극이 깨어나고 있다. 그 비극은 등 굽은 저 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에 절름거리며 등장한 '두꺼비 같은 곱사등'의 리처드는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겨울이 가고 '승리'로 찬란한 여름이 왔지만 여전히 '결핍'이 존재함을 지적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좋아할 수가 없어. 다들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전쟁의 승리와 돌아온 왕관이 인생을 바꿔 주리라 믿겠지만, 인생은 그리 녹록치가 않아. 다 가진 듯 생각해도 늘 결핍은 따라오기 마련!" 

왕가의 혈통이지만 불구로 태어난 탓에 전쟁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자신을 '그림자'로 여기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뒤틀린 사람'인 자신이 훌륭한 배우가 되어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왕좌에 오를 것임을 공표한다.

"모든 계획은 이미 짜두었다"고 말하는 리처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권력을 둘러싼 다툼 속에 사람들의 마음에 드리워진 불안과 초조함이다.

오랜 전쟁으로 심신이 약해진 형이자 국왕인 에드워드의 마음에 "이름이 G자로 시작되는 자가 왕실의 자식들을 살해하리라!"는 소문은 '불안'을 조장한다.

동생 조지를 죽인 죄의식에 심장이 점점 멎어가는 형 에드워드
연극 '리차드 3세' 공연 장면. 동생 조지를 죽인 죄의식에 심장이 점점 멎어가는 형 에드워드/사진=샘컴퍼니

리처드는 형 에드워드와 왕비 엘리자베스에게는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자식들이 겪게 될지 모를 '왕위찬탈'이라는 불안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앤에게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자'의 불안을 이용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리처드에게 좋은 무기로 여겨질 뿐이다. 그는 에드워드가 런던탑에 가둔 둘째 형 조지를 자객을 시켜 살해한 후 에드워드가 내린 처형명령으로 인해 죽은 것으로 꾸밀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여 미망인으로 만든 앤에게 구애하는 엽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리처드의 모든 행보는 인간을 테스트하는 하나의 과정이자 단계일 뿐 그에게 '양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로지 '왕권'을 향한 계략과 가장, 거짓만이 있을 뿐이다.

죽어가는 왕을 앞에 두고 불안해진 인물들이 왕권을 놓고 충돌하는 가운데 리처드의 손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마가렛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빼앗아간 권력을 놓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마가렛은 리처드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양심의 벌레가 네 영혼을 파먹을 것이다...피로 얻은 것은 피로 잃고 말 것이다!"

앤과 결혼식을 올린 후 드디어 왕관을 썼다는 기쁨에 한껏 들떠있는 리처드
연극 '리차드 3세' 공연 장면. 앤과 결혼식을 올린 후 드디어 왕관을 썼다는 기쁨에 한껏 들떠있는 리처드/사진=샘컴퍼니

그러나 이미 형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베어온 리처드에게 양심, 죽음, 파멸 같은 것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누구나 인생의 막바지에 갈 곳은 하나'임을 인식하고 있는 리처드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전진을 멈추는 것'이다. 자신의 가슴 속에 "일천 개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고 말하는 리처드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목표를 향해 진군을 계속하는 것' 뿐이다.

니체는 '의지'를 지닌다는 것은 자신이 특정 행위를 계속해 나아간다면 '성공'에 이를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행위자가 그러한 의지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한다는 점에서 "양심이 없다"고 말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들을 부수적인 것들로 여기기 때문에 쉽게 '불의'를 행하고 도덕과 양심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리처드에게 인간은 '권력에 대한 탐욕'을 멈출 수 없는 존재이다. 권력에의 의지, 즉 지배자의 자리를 목표로 삼고 전진하려는 리처드의 열정과 계획, 가장은 모두 자신을 한 층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벌이는 나름의 헌신이며 노력이고, 숨 쉬는 삶이다.

그의 '뒤틀린 삶'의 원인은 여기에 존재한다. 존재의 목표가 '권력' 그 자체에 설정되고 나면 권력을 거머쥔 후 남는 것은 불안과 위협, 위기, 그리고 하강 밖에 없지 않은가? 니체의 말처럼, 무엇을 창조하든,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든, 이내 자신이 창조한 것과 적이 되어야 한다. 힘에의 의지가, 권력에의 탐욕이 결국 리처드의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형 조지와 방해가 되는 모든 귀족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리처드는 이제 흔들리는 왕권을 다잡기 위해 아무 죄 없이 런던탑에 갇혀있는 어린 조카들마저 살해하고, 그토록 결혼해달라고 애원하며 쟁취했던 여인 앤도 살해한 뒤 조카딸 엘리자베스에게 구혼한다.

세상이 원래 약하고 불쌍한 자들을 위해 돌아가는 곳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리처드 앞에서 관객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의 흉물스러운 외모가 아니라 비틀리고 뒤틀려 더 이상 풀어낼 수 없이 꼬여버린 그의 '내면'이다. 어쩌면 "비뚤어진 인간"이라는 비난에 이성을 잃은 리처드가 커다란 망치로 헤이스팅스를 내리치며 내뱉는 말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비뚤어진 게 아니라 뒤틀린 거라고!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가 비뚤어져 보이오? 세상은 원래 그런거요. 비뚤어지고 억지로 우겨넣는 거..."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조카딸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는 리처드, 형수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혼인을 허락해 달라며 반지를 내밀고 있다.
연극 '리차드 3세' 공연 장면. 리처드는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조카딸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한다. 리처드가 형수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혼인을 허락해 달라며 반지를 내밀고 있다./사진=샘컴퍼니

관객들은 악행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조종하고 거짓을 퍼뜨리는 리처드를 향해 비난만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씁쓸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이미 권력을 위해 배신과 살인이 수없이 자행되어 온 비뚤어진 세상 속에 자신을 끼워 넣겠다고 몸을 비틀고 있는 리처드의 삶은 ‘일탈’이 아니라 가장 그에 맞게 끼워진 '뒤틀린 삶'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언제나 '권력에의 의지'가 가리키는 방향만을 따라 온 리처드에게 마가렛의 저주는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썩은 눈으로 자신의 썩은 몸을 보듯 그가 외면했던 모든 악들은 유령이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이 이용했던 '불안'은 이제 흔들리는 권력 앞에 자신을 위협하는 '두려움'이 되고,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환영이 되어 그를 휘젓는다.

하지만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는 양심의 질문에 리처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지은 죄를 묻는가? 나는 지금 내가 지은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

우리들의 죄는 무엇일까? 비틀어진 세상에서 뒤틀린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방치한 죄일까? 아니면 남보다 앞서기 위해 '자기 극복'이라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해 온 사람을 '성공한 자'라 여겨온 어리석음의 죄일까?

피에 굶주린 듯 권력을 탐했던 악인 리처드가 죽은 자리에 비구름이 걷혔음을 예언하는 마가렛이 관객들을 향해 외친다.

"모두에게 묻는다.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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