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이 품은 사랑의 기억, 삶, 그리고 죽음...연극 '가지'
음식이 품은 사랑의 기억, 삶, 그리고 죽음...연극 '가지'
  • 주하영
  • 승인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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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가지 Aubergine'
사진=국립극단
연극 '가지'/사진=국립극단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아버지는 반찬으로 고등어가 나올 때면 항상 가운데 부분을 발라서 저에게 주신 후 꼬리와 머리 부분을 드시곤 했어요. 어느 날 제가 아버지께 고등어를 발라드리고 싶어서 꼬리와 머리를 먼저 드렸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나는 꼬리와 머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에게 맛있는 부분을 주고 싶었던 거야."...나는 고등어를 보면 항상 아버지가 떠오르곤 해요."

음식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섭취하는 영양분이지만 늘 삶 속에 그 이상을 차지한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누군가가 떠오르고, 추억의 음식을 봐도 누군가가 떠오른다.

음식은 언제나 '기억'을 소환한다. 그 음식이 있던 자리, 함께한 사람, 그 사람의 미소, 따스함, 그리고 사랑... 물론 아픔과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도 있겠지만 우리가 보다 많이 기억하는 것은 위로와 사랑을 남긴 음식들이다.

이 때문에 음식은 추억이고, 사랑이다. 음식의 맛을 그리워한다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음식이 품고 있는 사랑, 기쁨, 그리고 따스함이다. 코끝에 닿는 냄새와 혀에 닿는 촉감, 씹는 기쁨과 삼키는 만족감, 먹고 난 후의 포만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음식의 맛은 사실상 그 음식이 품고 있는 감정이고 삶이며, 소통이고 사랑이다.

지난 21일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는 제54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줄리아 조의 연극 '가지'의 앙코르 공연의 막이 올랐다. 줄리아 조는 현재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재미교포 2세 극작가로, 2010년 수잔스미스블랙번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6년 3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첫 선을 보인 후, 9월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은 연극 '가지'는 지난 해 여름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작가 5명의 작품을 선별해 선보였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의 일환으로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디아스포라'는 원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생활관습과 규범을 유지해 온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특정 민족을 겨냥하지 않는다.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는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신들의 땅을 떠나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는 현상, 즉 다른 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며 섞여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연극 '가지' 콘셉트 컷/사진=국립극단

해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확하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표류하는 느낌을 이해할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문화에 완벽하게 합일될 수도, 원래 속해있던 공동체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고집할 수도 없는,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불안감과 불편함...

해외로 이민을 떠났지만 한국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교포 1세대들, 그들에게서 태어났지만 해외에서 줄곧 자란 탓에 한국에 대한 기억이 없는 2세대들, 이들은 종종 새로운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려는 젊은 세대와 자국의 문화를 잊지 못하는 이전 세대 간의 몰이해로 인해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라는 갈등을 겪는다.

줄리아 조는 한국 교민이 겪는 타국에서의 삶 속 갈등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겪게 되는 소통의 부재와 상처를 '죽음'과 '음식'이란 소재를 통해 펼쳐 보인다.

연극 '가지'에는 여러 인물들이 기억하고 있는 '음식'이 등장한다. 어떤 이에게는 사랑으로, 아픔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삶으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음식은 인물들의 삶을 설명하는 매개체로 활용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백인여성 다이앤은 남편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식도락가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자신의 수술 전날 딸을 위해 뜨거운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던 아버지의 손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를 사랑하는 딸에게 정성과 마음을 담아 따뜻한 한 끼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다이앤의 프롤로그의 이야기가 재미교포 2세인 레이에게 그대로 이어지기라도 하듯 무대는 간경화 말기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는 아들 레이가 있는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연극 '가지' 공연 장면.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는 아들 레이/사진=국립극단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전해들은 레이는 임종을 위해 아버지를 집으로 모신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사고로 잃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온 레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따뜻하고 애틋한 사람이 아니다. 늘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반응으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아버지를 향해 레이가 품고 있는 감정은 상처로 인한 '미움'과 '원망'이다.

아들이 '요리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달갑지 않았던 아버지는 레이가 직업상 꼭 필요한 칼을 사는데 비싼 값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신용카드를 잘라버린다. 레이가 아버지에 대해 가장 섭섭함을 느낀 순간은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18코스의 프랑스식 정찬 요리를 자랑스럽게 선보였을 때 아버지가 보였던 반응이었다.

테이블을 가득채운 화려한 요리들을 보고도 "좋아 보이는구나!"라는 한 마디를 반복할 뿐 거의 손도 대지 않던 아버지가 한밤중에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레이는 죽고 싶을 만큼의 창피함과 실망감, 좌절감을 느낀다.

연극 '가지' 장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 칼을 사온 아들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그의 신용카드를 잘라버린다./사진=국립극단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레이는 헤어진 여자 친구 코넬리아의 도움으로 수십 년 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삼촌에게 전화를 건다. 형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온 삼촌은 한인 타운에서 사온 자라를 들이밀며 '자라탕'을 끓여달라고 부탁한다.

삼촌은 말한다. "기가 막히게 만들어서 울 형님이 더 달라고 하시게, 이번에는 떠나지 못하게." 레이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살아있는 식재료를 가져와 자라탕을 끓여 달라는 삼촌도 어이없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드시지도 않을 음식을 해드려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소통을 하고픈 레이,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형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삼촌,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지막 노력'인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닌 그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 할 자'를 위한 마지막 최선,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함몰되지 않고 나의 삶 속에 그를 품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마지막 인사' 혹은 '기억'인 것이다.

삼촌은 '뭇국'을 통해 레이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미국으로 떠나는 아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가 끓여 내온 가장 완벽한 음식 '뭇국'을 앞에 두고 목메어 울던 감성적인 아버지... 레이는 늘 자신을 부끄러워만 한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삼촌에게는 아들의 자랑을 늘어놓았다는 것과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절의 절약습관이 깊이 베인 탓에 아버지가 마음껏 음식을 즐길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극 '가지' 공연 장면. 형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온 삼촌과 레이.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소통을 하고픈 레이,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형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삼촌,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지막 노력'인지도 모른다./사진=국립극단

아버지의 호스피스 간병인 루시앙은 죽음이 불러오는 '용서'와 '화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라고, 동떨어져 있다고, 늘 다른 주파수에 반응하고 있다고 느끼며 살아가죠. 하지만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주파수들은 하나가 되요."

늘 외롭다고 생각했던 인간이 정작 혼자 남겨지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건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력일 뿐 아무리 사랑한다한들 그것을 대신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죽음은 애초에 삶과 함께 탄생했고, 삶의 뒤편에 늘 거울처럼 존재해왔다.

루시앙은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떠날 때를 정해요. 만약 당신이 없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그건 그 분이 혼자 떠나시길 원한 거예요." 

결국 어렵게 끓여낸 자라탕을 드시지도 못한 채, 아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레이는 살아생전 아버지가 늘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좁고 긴 전신 거울 앞에서 아버지가 보았을 '죽음' 아니, '삶'의 모습을 직면한다. 거울은 식탁이 되고, 아들과 아버지는 마침내 마주앉아 서로의 삶을 나눈다.

연극 '가지' 공연 장면. 삶 속에서 소통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메시지를 깨달은 레이/사진=국립극단

살아가기 위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삶을 위한 식사이지만, 거듭될수록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를 죽음에 가깝게 끌고 간다. 먹고 살기위해 애쓰는 우리의 거센 노력은 언제나 삶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향한 행보이다.

삶은 새로운 땅에서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작은 품종의 가지'를 텃밭에서 가꾸듯 늘 앞으로 나아갈 것을, 변화에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루시앙의 말처럼, "산 사람이 죽은 이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가 산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가난한 고학생이던 아버지가 좁고 긴 거울을 마주한 채 '라면'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자신에게서 언젠가는 '죽음과 함께 상실될 삶'을 발견했던 것처럼, 삶 속에서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는 단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 우리는 죽어가고 있단다. 그렇대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지금은 내 곁에 자리하고 있지 않은 누군가와 함께했던 '한 끼 식사', 그 음식이 그리워진다면, 연극 '가지'를 통해 삶의 기억을 품어봄이 어떨지. 3월 18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이 글은 지난해 국내 초연된 공연을 보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연극 '가지'는 지난해 짧은 공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21일부터 같은 출연진과 연출로 앙코르 무대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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