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그 노스탤지어에 대해…연극 '발렌타인 데이'
사랑의 기억, 그 노스탤지어에 대해…연극 '발렌타인 데이'
  • 주하영
  • 승인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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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발렌타인 데이' 컨셉컷/사진=예술의전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갑자기 아름답고 멋진 어느 날, 사랑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었습니다...모든 것의 시작은 오직 사랑입니다...나 스스로 원했던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사랑이 생긴 겁니다."

'21세기 러시아 연극의 가장 뛰어나고 흥미로운 극작가'라 일컬어지는 이반 븨리파예프의 연극 '발렌타인 데이'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2004년 '혁신' 부문에서 '황금 마스크상'을 수상한 극작가 븨리파예프는 배우, 영화감독, 프로듀서로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비평가들은 그를 "쿠엔틴 타란티노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조합"이라 평하고 있다.

2002년에 초연된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작품으로 폴란드에서만 거의 20여 차례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도로타 비진스카는 "븨리파예프는 안톤 체호프처럼 인간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성취되지 못한, 미완성의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다룬다. 그의 작품은 존재론적 고통의 수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대단히 재미있고, 체호프의 경우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잘 융합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장면/사진=예술의전당

60세를 맞이하는 발렌티나의 생일날, 옆방에 살고 있는 까쨔는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대한 생일케이크를 들고 발렌티나의 방에 들이닥친다. 60개의 초가 꽂혀있는 거대한 생일 케이크는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로 만들어져 있다.

오늘은 발렌티나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20년 전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까쨔 남편의 추모일이기도 하다. 사실상 까쨔는 발렌티나의 생일날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남편 발렌틴을 추모하기 위해 케이크를 들고 나타난 셈이다.

발렌틴은 40년 전 발렌티나와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이다. 두 사람을 반대하던 발렌티나의 엄마와 발렌틴을 짝사랑하던 까쨔의 거짓말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복수심에 불타던 발렌틴은 마음에도 없는 까쨔와 결혼을 택했다.

15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두 사람은 진실을 알게 되었고, 다시 잃어버렸던 사랑을 이어가지만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 5년 뒤 발렌티나의 생일날 남편이 죽은 이후부터 까쨔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남편의 공간과 물건들을 하나씩 발렌티나에게 팔기 시작한다.

발렌틴의 모든 물건과 공간을 사들인 발렌티나는 까쨔를 옆방에 살도록 내버려둔다. 애증으로 얽힌 그녀 역시 사랑하는 발렌틴의 일부였던 사람이기에... 그녀는 발렌틴과 연결된 그 어느 기억 하나 떠나보낼 수가 없다.

인생에는 평생에 딱 한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 있다. 사랑이 딱 하나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순수하고 원초적인 사랑은 단 한 번만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은 세상을 모르고 사랑을 모르고 상처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그런 사랑이 있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장면/사진=예술의전당

그 때 그 순간이 아니면 가질 수 없었던 사랑, 발렌티나와 발렌틴은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그런 사랑을 했다. 어느 날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발렌티나의 시간은 과거에 멈춰있다. 40년 전 열정 가득한 사랑의 기억, 15년 후 다시 만난 사랑의 고통스러운 기억, 그리고 20년 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실된 사랑의 기억, 그녀의 시간은 오로지 사랑 속에 멈춰 서 있다.

기억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방마다 품고 있는 추억의 빛깔은 슬픔 혹은 기쁨으로 공간을 가득 메운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의 무대는 시종일관 발렌티나의 의식의 공간을 조명하며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한 사랑, 고통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관객들은 기억의 파편을 따라 전개되는 의식의 흐름기법의 소설을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발렌티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장면/사진=예술의전당

사랑하는 이의 추억과 흔적이 가득한 발렌티나의 방에 들이닥치는 까쨔의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다. 헝클어진 머리는 얼굴을 가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발렌틴의 것으로 보이는 남자 옷과 가운을 덧입은 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까쨔는 커다란 남자 신발을 신고 불편하게 걸어 다닌다. 관객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젊은 까쨔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 현재의 까쨔의 모습은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반면에 발렌티나는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관객들이 바라보는 발렌티나는 60세에 머물고 있으며 오로지 그녀의 기억 속 장면에 등장하는 젊은 발렌틴에 의해서만 젊은 그녀가 존재할 뿐이다. "난 지금 지난 세기의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외치는 발렌티나에게 까쨔가 대답한다. "난 미래에 있어!"

영국의 물리학자 줄리안 바버의 말처럼, 시간이 '환상'이고 한 곳에 수많은 것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며, 단지 공간 속의 변화를 시간으로 인식하는 것뿐이라면, 발렌티나의 의식 속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저 수많은 사랑과 고통의 순간들이 '지금'으로 존재하며 교차하고 공존할 뿐 발렌틴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화가 없는 그녀에게 시간은 '환상'일 뿐이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장면/사진=예술의전당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절차에 대해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한다"고 말한다.

발렌티나는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 멈춰선 채 언제까지나 돌아오지 않을 환상 속 과거에 집착한다. 기다림은 고통이 되고, 슬픔이 되고, 절망이 된다.

사랑의 환희가 '설렘'이라면 사랑의 고통은 '기다림'이다. 모든 기다림은 설렘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설렘이 고통으로 변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향한 상상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향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절망감은 고통이 된다. 기다림은 실현되지 않을 미래에 속하게 되고, 무너지고 부서진다. 기다림은 사람을 좀먹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기다림’을 이렇게 표현한다.

"조금씩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점점 썩고 녹아서 마지막엔 초록빛의 걸쭉한 액체만 남아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나중엔 옷만 남는 거야. 그런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자면."

상상 속 발렌틴과의 대화에서 발렌티나는 외친다.

"유감이야. 40년 전 그 때 우리가 이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거. 그 때 니가 나를 기다리지 않은 거. 유감이야. 우리가 그 때 끝까지 얘기하지 못했다는 것과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과 기다림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거."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장면/사진=예술의전당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스탤지어를 "대상 없는 슬픔, 갈망을 만들어내는 슬픔"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실현될 수 없는 상상을 갈망하는 슬픔, 죽은 사랑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한 자의 안타까움과 고통은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정지시킨 채 추억도 없이 사랑을 계속하는 발렌티나와 까쨔, 그리고 발렌틴을 낳는다.

우리에게 발렌티나는 인생에 딱 한번 찾아오는 순수한 사랑의 '노스탤지어'이다. 까쨔는 그 단 한 번의 사랑을 누릴 수 없었던, 허락되지 않았던 사랑의 '슬픔'이다. 발렌틴은 과거에 자신을 지배했던 사랑과 현실 속에 안주한 사랑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랑의 '혼란스러움'이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장면/사진=예술의전당

발렌티나의 모든 사랑의 기억이 한데 엉켜 뒤죽박죽 묻혀버린 공간, 죽은 발렌틴의 방은 두 사람의 추억의 무덤이자 사랑의 무덤이다. 기억 속의 시간과 현실 속의 시간... 꿈속에서의 발렌티나와 까쨔의 화해가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듯 물리적으로 흐르는 육체의 시간과 두뇌 속에서 흐르는 의식의 시간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육체로만 설명되지 않듯이 삶의 시간은 두 공간에 따로 존재하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상충된다.

어느 아름다운 날 시작된 사랑과 그로 인한 고통, 그 마음의 전쟁이 끝나는 날, 그 날은 발렌티나가 태어난 날이자 발렌틴이 죽음을 맞이한 날이 된다. 두 사람이 시작한 사랑이기에 남은 한 사람이 죽게 되는 날,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는 날, 기억할 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 그 사랑은 끝에 이른다. 태초에 사랑이 시작되었듯 사랑은 세상의 끝에서야 비로소 그 끝을 맺는다.

우리의 삶 속에 자리했던 순간의 날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그리워진다면, 지나가는 세월을 잡고 싶으면서도 다가오는 세월에 빨리 몸을 맡기고픈 마음이 든다면, 연극 '발렌타인 데이'와 함께 사랑의 기억, 그 노스탤지어에 흠뻑 빠져봄은 어떨지...1월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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