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스'로 치닫는 불행한 영혼, 돈호세...발레 '카르멘'
'타나토스'로 치닫는 불행한 영혼, 돈호세...발레 '카르멘'
  • 주하영
  • 승인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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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스페인 국립 무용단 '카르멘'
스페인 국립 무용단 '카르멘'/사진=LG아트센터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공연 모습/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카르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열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러플 가득한 플라멩코 드레스, 하바네라 선율에 맞춰 움직이는 팔과 다리의 유려한 곡선,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돈 호세를 유혹하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이다.

비제의 오페라 속 카르멘은 '팜므 파탈'의 전형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남자인 돈 호세를 향해 아카시아 꽃을 던지며,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한 불러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한 마리 새와 같은 사랑"을 노래한다. 하지만 '협박도 애원도 소용없는 제멋대로인 새'이기에 그 누구도 잡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은 다름 아닌 카르멘 그녀 자신이다.

지난 11월 9일~12일 LG아트센터를 찾은 스페인 국립무용단은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편곡으로 보다 다채로워진 비제의 '카르멘' 선율에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더한 모던 발레 '카르멘'을 선보였다. 스웨덴 출신의 안무가 요한 잉예르에 의해 현대적인 옷으로 갈아입은 발레 '카르멘'은 2015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초연되었으며, 2016년 세계 무용계에서 최고의 영예로 인정받는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안무상을 수상했다.

최고의 음악과 최고의 안무라는 찬사를 받았다는 요한 잉예르의 발레 '카르멘'은 1845년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원작 소설에 좀 더 무게를 둠으로써 열정보다는 죽음과 파괴를 부르는 충동과 욕망으로서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원작보다 훨씬 순화된 인물을 그려냈다는 비제의 '카르멘'이 길들일 수 없는 '자유로운 새'로서의 카르멘을 강조했다면, 요한 잉예르의 '카르멘'은 '자유로운 영혼'을 속박하고픈 욕망의 좌절로 인해 파괴적 충동을 느끼며 점점 폭력으로 치닫는 '불행한 영혼', 돈 호세의 내면을 파헤친다.

스페인국립무용단 발레 '카르멘'/사진=LG아트센터

문자와 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라면 몸짓과 표정, 동작으로 표현되는 언어들은 인간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도출해 낸 근원적인 소통방식이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춤이라는 언어는 인간이 지닌 감정의 굴곡을 드러내는 데 훨씬 효과적이고 직접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느낌과 그 감정을 전달하지 못할 때의 답답함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전달할 수 없는 답답함이 온 몸을 채울 때 인간은 발을 구르거나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거나 한숨을 내쉬며 풀썩 주저앉는다. 표현할 길을 찾을 수 없는 강렬한 감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몸을 움직이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피나 바우쉬는 "춤만이 유일한 참된 언어"라고 말한다. 춤의 언어만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감정들을 진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 잉예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카르멘의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점점 파괴와 폭력으로 치닫게 되는 호세의 복잡한 심리적 갈등의 층위를 관객들이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새로운 관점의 해석을 더할 수 있도록 '소년'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하여 '관찰자'의 입장에 세운다.

어둡고 텅 빈 무대 위에 농구공을 튕기며 등장하는 하얀색 반바지와 셔츠 차림의 소년은 호세의 순진한 자아, 욕망에 무지한 상태에 있던 순수함을 상징한다. 소년은 검은 마스크를 쓴 그림자 인간에게 공을 빼앗기고 검은 그림자는 소년의 몸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며 공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던져버린다. 소년은 공을 주우려다 장교와 마주치게 되고 그제야 관객들은 익숙한 카르멘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된다.

스페인 국립 무용단 '카르멘'/출처=스페인 국립 무용단(Compañía Nacional de Danza, CND) 홈페이지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공연 장면/출처=스페인국립무용단(Compañía Nacional de Danza, CND) 홈페이지

소년은 호세의 감정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무대 위에 등장한다.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어른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소년은 유혹의 손짓으로 꽃을 던지고 간 카르멘 뒤에 혼자 남아 있는 호세를 바라본다.

소년은 하늘에서 마구 쏟아지는 아카시아 꽃들을 가슴 속 주머니에 쑤셔 넣느라 정신이 없는 호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이미 그는 욕망에 현혹되어 있다.

군율을 어기고 카르멘을 풀어준 호세는 모진 모멸과 괄시, 폭력 속에 놓이게 되고, 지위가 강등된 채 문지기로 보초를 서게 된다. 초라해진 호세 앞에 나타난 카르멘은 장교와 어울리며 질투심을 자극한다.

호세의 질투심은 두 사람이 결합한 후에도 여전히 장교와 투우사 사이를 오가며 관계를 즐기는 카르멘으로 인해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충돌하는 욕망과 좌절로 인해 집착과 소유욕에 불타는 호세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속삭인다.

말릴 틈도 없이 호세는 장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소년은 귀를 틀어막은 채 비명을 지르며 서 있고 호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다. 검은 그림자들은 장교를 죽음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기보존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 공격적인 파괴의 욕구들로 구성되는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로 구분했다.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사랑을 통해 종족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에로스의 본능이 상처를 입고 에너지가 흐르는 대상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을 처벌하거나 사멸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타인을 파괴하고 공격하는 죽음의 본능을 일으키게 된다.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공연 모습/사진=LG아트센터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 형성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 본능이고 이것에 내재하는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충족과 결핍이 인간으로 하여금 '에로스'로 향하거나 '타나토스'로 향하도록 만든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호세의 '에로스'적 삶의 본능을 의미한다면, 검은 옷의 그림자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타나토스'적 죽음의 충동을 상징하게 된다.

이제 소년의 옷은 검은색으로 바뀌고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줄곧 호세 옆을 따라다니며 파괴적으로 변하는 호세의 폭력적 행동들을 막으려 애쓴다. 상사를 죽인 자신에 대한 충격과 죄의식, 원망과 좌절로 인한 내면의 소용돌이는 검은 그림자들이 넘쳐나는 '죽음의 세상'으로 표현되고, 호세는 충동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카르멘이 투우사와 어울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또 다시 파괴적 충동에 사로잡힌 호세가 카르멘을 향해 폭력을 가하려는 순간, 소년은 호세를 막아 세우고 '행복한 한 가족'의 꿈을 펼쳐 보인다.

호세와 카르멘, 소년이 행복한 생활을 하는 꿈속에서 호세는 소년에게 빨간 드레스를 입은 집시 인형을 선물하지만 소유욕으로 인해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호세가 카르멘을 칼로 찌르고 자신이 그녀를 죽였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소년은 인형의 팔과 다리, 목을 뜯어내어 바닥에 집어 던지고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헉헉거리며 무대의 막이 내린다.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공연 모습/사진=LG아트센터

요한 잉예르는 말한다. "소년은 태고의 원시적 선함을 가지고 있는, 폭력을 경험하기 이전의 혹은 상처 입기 이전의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폭력의 경험은 아주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지만 우리의 전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에 그 힘을 영원히 발휘하게 됩니다. 가정 내 폭력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인가요? 그리고 어디에서 끝이 나나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부당한 조건에 직면했을 때 폭력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폭력이 가지고 있는 직접성과 신속성 때문에 엄청난 유혹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신속성의 순간이 기분전환이나 충동을 분출해 줄 수는 있어도 울분을 풀도록 해 줄 수 있는 적절한 구제수단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치밀어 오르는 충동에 자신을 놓아버린 인간이 '타나토스'라는 검은 그림자에게 몸을 내맡길 때 남겨지는 것은 오로지 '죽음', 죽음 밖에 없다.

요한 잉예르의 '카르멘'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 서 있는 충동 속에 갈등하는 인간, 그리고 파괴와 폭력, 죽음으로 흐를 위험성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이 어디에 서 있는가?' 라고.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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