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천생연분의 조원희·이윤표 뮤지컬 스타 커플
[인터뷰]천생연분의 조원희·이윤표 뮤지컬 스타 커플
  • 서영석
  • 승인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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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통하고 일이 통하는 3박자 짝꿍
뮤지컬 무대에서 만나 동고동락하며 활동해온 중견 뮤지컬 배우 이윤표·조원희 동갑내기 부부(사진 왼쪽부터). 뮤지컬 공연문화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두 사람은 뮤지컬 시대를 이끌어 온 주역들이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서영석 인터뷰어] 뮤지컬이 화려한 공연예술의 꽃으로 피어나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까지에는 어느덧 중년을 넘어선 뮤지컬 배우들이 적신 눈물과 땀방울의 사연들이 무대의 뒷자락마다 소리 없이 매달려 있다.

뮤지컬 무대에서 만나 일과 사랑을 한 울타리로 만들어, 말 그대로 동고동락하며 활동해온 중견 뮤지컬 배우 조원희(1963∼, 서일대 교수)·이윤표(1963∼) 동갑내기 부부는 뮤지컬 시대를 이끌어 온 주역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 커플이다.

두 사람은 뮤지컬 공연문화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조원희 배우는 198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데뷔했고 이윤표 배우는 1988년 <레미제라블>로 출발했다. 가수로 활동하다가 뮤지컬 무대에 진출한 윤복희를 국내 여자 뮤지컬배우의 1세대로 본다면 직계 후배인 이윤표 배우는 1.5세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순수 뮤지컬 배우의 활동이력으로는 '뮤지컬배우의 대모' 대우를 받을 만큼 중진이다. 출연 편수가 100여 편에 이른다.

타고난 미성(美聲)의 조원희 배우는 노래와 춤, 연기력의 재능을 갖추어야 빛을 볼 수 있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울림이 큰 청량한 목소리 덕분에 성우로 외도를 하고 CF에서도 인기를 누려왔다.

30여년을 '처음처럼' 살아가는 뮤지컬 커플을 한자리에서 만나 동시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 사람 모두 운명적이고 천부적인 뮤지컬 배우 소리를 듣는다. 스스로도 타고 난 끼를 인정하며 사는가?

이윤표(이하 '이')= 다방면에 재능을 지니셨던 아버지와 한때 배우 지망생이었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4살 때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재롱을 피우며 소질을 드러냈던 것 같다. 춤이나 노래를 부르는 직업을 막연히 꿈꾸기 시작한 계기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춤 솜씨로 갈채를 받았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보다 언니와 동생에게 더 연예인 끼가 많다면서 나에게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으셨다. 중고교 시절에는 핸드볼과 육상선수로 뛰는 엉뚱한 시기도 있었다. 숨은 끼를 못 버려 신인가수의 등용문인 신인가요제에 출전해 최종 본선까지 진출했지만 TV중계를 앞두고 여고 재학생 신분이 드러나 포기했다. 그러다가 학업을 끝내면서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TV쇼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KBS무용단 짝꿍 1기 오디션에 합격하면서였다.

조원희(이하 '조')= 나도 가수와 영화배우 활동을 한 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셈이다.

그러나 어릴 때는 마음씨가 여리다 못해 소심하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해 아버지가 야구선수가 되기를 바라면서 운동을 시키기도 하셨다. 하지만 일찍부터 운동이나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막연히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틈틈이 신문을 뒤져가며 공개 모집 기사나 광고를 빠짐없이 스크랩하다가 지망한 곳이 '극단 현대'의 신인배우 공모창구였다. 두 차례 응시해서 합격해 그곳이 배우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희노애락을 함께한 이윤표·조원희 부부(사진 왼쪽부터). 1986년 '레미제라블' 공연에서 만난 이들은 5년 연애끝에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아버지와 배우지망생이었던 어머니 피를 이어 받았다는 이윤표 배우와, 가수와 영화배우 활동을 한 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것 같다는 조원희 배우는 여러모로 닮은꼴 부부다.

-사람의 성장배경이나 가족 관계와 꿈이 비슷한 게 많다는 느낌을 준다. 다 같이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 아버지는 예능인은 아니지만 그런 분야 사람들에 관심이 많으셨고 연예인 못지않게 재능도 많으셨다. 명문대 출신의 수재인데 사업으로 큰 재산도 모으셨다가 때로는 실패도 하시며 인생을 드라마처럼 사셨다. 어머니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풀어주기를 바라시며 딸 셋 중 언니와 동생을 탤런트가 되도록 뒷바라지하셨다. 지금은 언니가 방송국 안무단장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동생은 결혼 후 연기활동을 그만두었다. 

= 북한 북청 출신인 아버지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의 뒷바라지를 하신 할아버지의 완곡한 반대에도 가수가 되어 앨범을 내기도 하셨고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에도 출연하셨다. 나중에 공무원으로 직업을 바꾸셨지만 자식들이 끼를 물려받아서 동생도 앨범을 낸 가수로 활동했다.

-두 사람이 뮤지컬 배우로 입문할 무렵은 뮤지컬 공연이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굳이 뮤지컬 배우를 지망하게 된 동기가 있는가?

= '극단 현대'는 화제를 모으게 한 연극 공연으로 연극계에서 유명한 극단이었다. 두 번째 모집에서 단원으로 뽑아 준 대표가 나의 목소리를 듣고 뮤지컬 배우를 권했다. 뮤지컬 배우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미래의 재목으로 나를 뽑았다는 확신감을 안겨준 것이다.

= 신인가요제 본선 진출을 어머니가 알게 되어 어머니와 그 시대 최고 인기 작곡가인 박춘석 선생을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가수로 데뷔하기 위한 테스트 과정을 거쳤지만 재학 중인 학교에서 졸업 후 대학 진학 때로 미루기를 요청해 꿈을 접었다. 그 무렵 다른 남자 가수들이 그룹 활동을 제의해 온 것도 무서워서 거절했는데 용기를 냈다면 내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다 대학 입학 후 우연히 TV 광고를 보고 6명을 뽑는 방송국 짝꿍 오디션에 응시, 3000명의 경쟁자 틈에서 당당히 합격했다.

짝꿍 시절 PD 눈에 뜨여 첫 방송 때 제일 가운데 자리를 줬는데 웃는 표정을 살려내지 못해 NG를 내다가 구석으로 밀려나는 수모도 겪었다. 결국 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춤과 노래, 연기의 재능이 뛰어난 신인배우를 찾는 '극단 현대'를 지망하면서 내 인생 내 일생이 뮤지컬 무대로 옮겨진 셈이다. 가끔 일본에서도 가수 데뷔 제의를 받았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 때 길을 바꾸었다면 엥카 가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1984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데뷔한 조원희 배우는 우연한 기회에 CF성우로 '외도'를 하기도 했다. 하루 수입이 천만원을 벌정도로 TV메인 CF를 독차지한 적도 있다. 현재 서일대 전임교수를 역임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조우가 ‘극단 현대’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첫 사랑의 에피소드를 들려달라.

= 1986년 원희 씨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극단 현대'로 복귀해 <레미제라블> 공연에서 만나면서 조금씩 서로가 호감과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방 공연 길에 친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롯데'로 옮겨 1991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공연을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주변의 눈을 피해 가면서 연애를 한 5년쯤 했다.

= 결혼날짜가 그해(1991년) 4월 20일인데 공연 때문에 신혼여행을 못가고 공연 후 김성노 연출감독이 운전기사가 되어 양평으로 신혼여행을 시켜주었다. 나중에 사이판으로 가서 신혼여행 기분을 내기는 했지만.

- 결코 짧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뮤지컬과 함께한 뒷 얘기들을 듣고 싶다.

= 연구생 시절은 극단에서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정말 열심히 했다. 남들보다 몇 시간 일찍 연습실에 나와 먼저 연습을 하고 끝난 후에도 반복 복습으로 극단 연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기량과 꿈을 키웠다. 그런 모습이 연출가의 눈에 뜨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비록 단역이지만 노래가 있는 배역으로 전격 캐스팅이 되어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84년 10월이다.

= 나는 1988년 뮤지컬 <레미제라블>로 데뷔를 했는데 짝꿍 출신이었다는 무대 경력을 인정받아 바로 배역을 맡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고 노래하는 무대가 너무 좋았다. 첫 무대에서 “내 삶이 이렇게 귀결이 되려고...”라는 독백을 하며 벅찬 희열과 감동에 울면서 공연을 했다. 롯데 호텔에서 그 공연을 4년이나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다. 모차르트의 스승 역을 제의 받았는데 처음에는 고사를 했다. 당시 TV 메인 CF를 독차지 해 그야말로 CF의 황제 소리까지 듣고 있을 때였다. 또 오랜만에 뮤지컬 무대에 오른다는 것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본업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기운을 내어 도전을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매스컴에서 "조연이 무대를 채우고 공연을 살렸다"는 찬사까지 했다. 이 공연 덕분에 영화에 엄청난 개런티를 받고 캐스팅 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연극에서는 공지영의 <고등어>도 내 연기 인생에서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 <레미제라블>을 빼고는 나의 뮤지컬 인생을 말할 수 없다. 또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도 기억에 남는다. 가장 재미있게 했던 공연은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도로시 블록 역을 했을 때이다. 능력에 앞서 행운일 수도 있지만 국내 뮤지컬 사상 대표적인 작품에는 대부분 출연했다. 나의 출연 작품이 100여 편에 이른다.

= 무대 연기인으로 영예로운 정극에 도전할 기회를 맞이할때가 있었다. 최고의 희곡작가인 김태수 선생을 만나 '극단 로뎀'에서 제작한 <꽃마차는 달려간다.>, <서울은 탱고로 흐른다> 등의 작품에 출연했을때였다.

 

1988년 '레미제라블'로 데뷔한 이윤표 배우는 '뮤지컬배우의 대모' 대우를 받을 만큼 중진이다. '레미제라블''웨스트사이드스토리''브로드웨이 42번가'등 출연 편수가 100여 편에 이른다. 현재 배우 활동 뿐 아니라 강의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인생에는 고비가 있다.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인가?

=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경험했다. 뮤지컬 레스토랑을 거창하게 시작했는데 수입은 적고 투자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 쫄딱 망했다. 눈을 뜨면 앞날이 캄캄해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눈이 엄청 쏟아지는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길거리에 버려진 자전거를 주워 타고 달리면서 펑펑 울었다.

= 둘 다 너무 바쁘게 공연에 빠져 살다 보니 자식 낳을 기회도 놓쳤다. 임신과 공연 일정이 겹치는 게 두렵고 고민을 했는데 본의 아니지만 무대가 좋아 2세를 포기한 셈이 됐다.

-CF 목소리 녹음으로 인기를 누려왔다는데

= 우연한 기회에 후배 CF 감독의 제의로 더빙을 했는데 내 목소리가 설득력과 진실성이 느껴지고 탁월하게 매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느 날 녹음실 책상 위에 자동차 CF 대본이 있어서 그냥 연습 삼아 읽어보았는데 광고주가 내 목소리를 듣고 이미 다른 성우가 녹음까지 마친 것을 내 목소리로 교체했다. 그로부터 주가가 폭등하고 모든 외제 자동차 CF는 도맡아서 하느라 새벽까지 일에 쫓겨 살았다. 하루에 천만 원 이상을 벌면서 끼니를 컵라면으로 때우며 지낼 정도로 바빴다.

-지금은 대학 강의로 공연 활동이 줄어든 것은 아닌가?

= 아내가 먼저 성균관대에 출강을 했다. 어쩌다 지방공연과 수업이 겹쳐서 내가 대리 강의를 하면서 나도 후진 양성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학생들 워크숍 작품으로 <코러스라인>을 선정, 각색, 개작을 통해 1시간 30분짜리로 공연을 한 것이 대학가에서 좋은 반응을 남긴 뒤 경기대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은 나 자신도 못다한 공부를 계속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지금은 서일대 전임교수로 적을 두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커리큘럼의 내용도 내가 평생을 해온 공연분야라 보람이 있다. 또 배우로서의 현장 공연활동도 학생들에게 교육의 연장선에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내 인생 후반의 꿈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 나는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머무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전임은 바라지 않고 자유롭게 다양한 곳을 선택해 강의를 한다. 지금은 주부극단에서 재능 기부 역할의 강의를 하고 있다. 주부 제자들이 많다. 너무 열심히 하는데 감명을 받아 손을 떼지를 못하겠더라. 얼마 전에 금천구청에서 <맘마미아>를 갈라로 공연했는데 감동의 무대였다.

-두 분이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실증해준 롤 모델이다. 일과 사랑을 함께 해온 지난 삶에서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을 떠올려 달라.

= 아내에게 선물로 신용카드를 줬을 때였다. 젊은 시절 사업 실패로 돈에 쫓겨 고생 많이 시켰는데 이제는 빚도 다 갚았고 먹고 살만 하기에 큰 맘 먹고, 돈 마음대로 쓰라고 카드를 선물했던 순간이 가장 가슴 뿌듯했다.

= 하하하. 그래 놓고는 제자들한테 한턱 쏘면 돈 많이 쓴다고 뭐라고 그래요.

 

서영석

인터뷰365 기획자문위원. 극작가 겸 연극연출가로 극단 「에저또」를 거쳐 다수의 연극에서 연출, 극작, 번역 활동. 동국대에서 연극학 석사를, 중앙대에서 연극학 박사를 취득했다. 동양대 연극영화학과, 세명대 방송연예학과 겸임 교수를 지냈으며, 현 극단 「로뎀」 상임연출이자, 극단 「예현」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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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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