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차(茶)무역흑자가 불러온 아편전쟁
청나라 차(茶)무역흑자가 불러온 아편전쟁
  • 서영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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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서영수의 Tea Time]
후먼에 세워진 아편척결구조물. 아편을 흘려보낸 그자리에 부러진 아편흡연도구 상징물이 서있다.
후먼에 세워진 아편척결구조물. 아편을 흘려보낸 그자리에 부러진 아편흡연도구 상징물이 서있다./사진=필자 제공

[인터뷰365 서영수 칼럼니스트] 지난 2015년 9월3일 오전10시 베이징톈안먼(北京天安門)광장에서 '중국 인민 항일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건국 이래 전쟁승리를 기념하는 최초의 열병식에 한국을 비롯해 30명의 외국지도자가 참석했다. 56개 중국민족을 상징하는 56문의 예포가 개막을 알리며 70발의 축포를 쐈다. 인민영웅기념비에서 '121'보를 걸어온 196명의 국기호위대가 오성홍기를 국기게양대에 게양했다.

121년 전 한반도에서 맞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잠자는 용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치욕의 역사를 딛고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전 세계에 선포했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보다 54년 앞선 중영전쟁에서 서구열강에 패한 사실을 기점으로 삼아 국기호위대는 '169'보를 걸었다. 아편전쟁으로 불리는 중영전쟁은 차(茶)수입으로 발생한 무역적자를 아편밀수출로 만회하려는 영국의 그릇된 야욕에서 비롯된 전쟁이다.

1958년 만들어진 베이징톈안먼광장안 인민영웅기념비 하단에는 근대사를 대표하는 8개의 사건이 부조(浮彫)되어있다.

첫 번째 부조의 내용은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된 후먼샤오엔(虎門銷煙)이다. 후먼샤오엔은 1839년 6월3일부터 6월25일까지 23일 동안 광둥(廣東)성 후먼(虎門)에서 청나라 제8대 황제, 도광제(道光帝)가 임명한 흠차대신(欽差大臣) 린쩌쉬(林则徐, 1785~1850)가 영국 상인에게 압수한 2만여 개의 아편 상자를 석회로 중화시켜 바다로 흘려보냈다. 세계 최초로 아편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아편흡입과 매매를 불법으로 금지시킨 사건이 후먼샤오엔이다.

아편을 소각하는 모습/사진=서영수 제공
아편을 소각하는 모습/사진=필자 제공

영국도 아편의 폐해를 알고 있었지만 청나라에서 발생한 무역역조를 뒤집어야만했다.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차의 양은 해마다 늘었지만 청나라에 수출할 효자상품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상인들에게 몰래 팔고 이를 감시하는 관리들에게는 뇌물을 상납했다.

차를 영국으로 가져가며 은으로 결제하는 대신 아편으로 대체하고 아편밀무역이 성행하면서 청나라 은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손실 뿐 아니라 아편에 중독되어 죽거나 폐인이 되는 중국인이 거리에 넘쳤다.

린쩌쉬의 동생도 아편중독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중국이 지금도 가장 싫어하는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말이 이 무렵 생겨났다. 린쩌쉬가 1426톤의 아편을 압수하여 소각해버린 단호한 행동에 당황한 영국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은 다른 관리와 달리 린쩌쉬에겐 뇌물과 회유가 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고했다.

린쩌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 청나라에서 아편은 불법이고 마약중독의 폐해를 소상히 밝히며 아편을 제외한 모든 거래에 최혜국대우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영국의회는 찬반이 분분했다.

린쩌쉬의 동상은 중국 각지에 점점 늘어나고 있다./사진=서영수 제공
린쩌쉬(林则徐, 1785~1850)의 동상은 중국 각지에 점점 늘어나고 있다. 린쩌쉬은 영국 상인에게 압수한 2만여 개의 아편 상자를 석회로 중화시켜 바다로 흘려보냈다. 세계 최초로 아편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아편흡입과 매매를 불법으로 금지시킨 사건이 후먼샤오엔이다./사진=필자 제공

영국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에서도 차가 생산되었지만 당시에는 중국차가 '갑'이었다. 1662년 찰스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차를 가져오면서 영국에 알려진 중국차는 중국문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귀족사회의 고품격 문화생활로 급속히 퍼졌다.

동인도회사는 '왕실 티파티'를 위해서 질 좋은 중국차를 먼저 진상하려는 경쟁을 벌였다. 산업혁명이후에는 왕실과 귀족사회는 물론 신흥 부르주아가 상류사회를 이끌면서 차 문화를 확산시켰다. 중국차를 부와 명예의 '아이콘'으로만 부러워하던 노동자도 차를 마실 기회가 왔다. 공장주들은 노동효율을 높이기 위해 '티 브레이크'를 만들어 휴식시간에 노동자들에게 차와 간식을 제공했다. 술 대신 차를 공급하여 생산성을 높이는데 성공했다.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시대는 전 국민이 고급문화가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차를 매일 마셨다. '티 홀릭'에 빠진 영국은 부도덕한 전쟁에 돌입했다. 19세기는 영국지식인의 로망도 '유니언 잭'이 세계를 넘어 우주까지라도 뒤덮기를 갈망하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였다. 1840년 4월 영국의회는 9표차로 중국에 대한 원정군 파견을 승인했다. 제국주의가 저물 무렵 영국인 스스로가 '아편전쟁은 영국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었다고 반성했다.

린쩌쉬는 외국 상인들이 숨겨둔 아편을 압수하며 1상자에 5근의 차로 보상해줬다. 앞으로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외국 상인들에게 받았다. 미국과 포르투갈 등의 상인들은 순순히 협조했지만 영국 상인들은 서약서 제출을 거부하고 광저우를 떠나 마카오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런 와중에 1839년 7월7일 술에 취한 영국군이 중국인농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린쩌쉬는 범인인도를 요구했지만 찰스 엘리엇은 거부했다. 마카오를 봉쇄한 린쩌쉬의 함대와 영국함대가 9월4일 격돌하며 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세계최강의 해군전력을 자랑하는 영국군과의 해상정면 대결 보다 지리에 익숙한 이점을 살려 육지로 끌어들인 후 유격전으로 승기를 잡겠다는 린쩌쉬의 전략을 도광제는 묵살했다. 낙담할 틈도 없이 린쩌쉬는 서양의 대포를 사들이고 상선을 전함으로 개조했다. 믿을 수 없는 관군 대신 상인과 민간인으로 해안경비대를 만들었다.

아편전쟁박물관/사진=서영수 제공
아편전쟁박물관/사진=필자 제공

1840년 6월 4000명의 병사를 태운 47척의 영국 함대가 광저우에 나타났다. 린쩌쉬의 강력한 방어로 광저우는 함락되지 않았다. 광저우를 포기한 영국의 함대는 북상하여 베이징의 관문인 텐진(天津)을 공격했다. 린쩌쉬의 예상대로 영국군은 움직였던 것이다. 영국군의 텐진 상륙에 놀란 도광제는 전쟁의 원인제공과 책임을 물어 린쩌쉬를 파면했다. 유화파인 치샨(琦善)을 직례총독(直隸總督)으로 급히 임명하여 영국과 강화교섭을 벌이게 했다.

인도용병이 중심이 된 1만 명의 응원군이 린쩌쉬가 없는 광저우를 격파하고 난징으로 진격했다.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1842년 8월에 맺은 난징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해온 중국은 반식민지 국가로 몰락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죽었지만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영웅으로 부활한 린쩌쉬 기념관이 있는 아편전쟁 박물관을 찾아갔다. 광저우와 이어져있는 동관(東莞)시 후먼대교 옆에 있는 아편전쟁 박물관에는 1839년 아편을 태웠던 자리에 린쩌쉬가 동상으로 남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서영수

영화 '나도 몰래 어느새','장미여관'등을 연출한 시나리오작가 겸 영화감독,칼럼니스트. 미국시나리오작가조합 정회원. 10여 년 전부터 茶道와 국내외 차문화를 연구, 차 감정 및 품평 전문가로 차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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