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그림자, 그리고 삶의 고독함
'거인'의 그림자, 그리고 삶의 고독함
  • 주하영
  • 승인 201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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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브람스, 교향곡 제 1번 다단조 작품 68 – J. Brahms, Symphony No.1 c minor Op.68
브람스(Johannes Brahms)/출처=위키피디아
브람스(Johannes Brahms)/출처=위키피디아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완벽에 대한 갈망, 완벽의 추구를 향한 광기일까,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넘어서기 위한 힘겨운 투쟁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완성할 수 없어서 버려두었던 한 때의 영감이 시간의 흐름 속에 숙성된 작가에 의해 덧칠이 된 후에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행운일까.

가을과 브람스는 잘 어울린다. 브람스 음악의 묵직한 중저음이 진한 커피 향처럼 쓸쓸한 가을날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유명한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주는 로맨틱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브람스의 음악은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닿을 수 없음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쓸쓸함과 그럼에도 열정을 다하는 격렬함과 장대함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가을의 고독함'과 닮아있다. 브람스의 음악은 알 수 없는 삶의 비밀을 깨닫기라도 한 듯, 고통에서 막 벗어난 사람의 깊은 깨달음을 담은 우수에 찬 눈빛과 마주한 느낌을 선사한다.

브람스는 자신의 교향곡 제1번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가 교향곡 제1번을 구상한 때는 그의 나이 22세, 그러나 완성된 교향곡이 초연된 때는 그의 나이 43세였다. 1879년 브람스의 교향곡 제 1번이 초연되었을 때,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는 "드디어 제 10번 교향곡이 탄생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이 남긴 9개의 교향곡의 뒤를 이을만한 대작이 탄생했다는 의미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당시 유럽은 거장 베토벤이 휩쓸고 지나간 광풍에 필적할만한 교향곡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었고, 많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새로움을 더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토벤을 향해 남다른 존경과 경외를 품고 있던 브람스에게 베토벤은 엄청난 부담이자 넘어야 할 산으로 인식되었고, 소심하고 신중한 성격은 그를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으로 몰고 갔다.

모든 작곡에 있어 베토벤을 의식했던 브람스는 처음 구상한 교향곡의 제1악장을 완성하는데 7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또 다시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작곡에 착수해 1896년 최종본을 얻을 수 있었다.

브람스는 자신의 친구 레비에게 "거인이 내 뒤를 뚜벅뚜벅 쫓아오는 소리를 항상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게. 그 기분을 자네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부담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케 한다.

누구의 삶에나 '거인'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부모의 기대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공을 향한 갈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종교적 성취가, 사랑의 완성, 혹은 자신이 믿는 가치의 실현이 엄청난 '거인'이 되어 우리의 삶을 괴롭힌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노력하라고, 조금 더 힘을 내라고 채찍질한다. 삶 속에서 때로는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느끼며 앞으로 내딛는 한걸음의 무게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비록 그것이 지나치게 피로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떠야만 하는 되풀이되는 일상이나 생계를 위해 자기 자신을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하는 오늘과 같은 평범한 수준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뒤를 쫓는 '거인'의 그림자에 잠식당하지 않고 앞서 나가기 위한 브람스의 노력은 1악장의 장대한 도입부와 격렬함, 2악장의 쓸쓸함, 3악장의 분위기 전환, 그리고 4악장의 극복과 새로운 도약을 느끼게 하는 당당함의 선율로 이어지며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은 많은 음악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지휘자 정명훈과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실황 녹음 앨범. 1998년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해 발표됐다./재킷 이미지=유니버셜
브람스 교향곡 제1번은 많은 음악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지휘자 정명훈과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실황 녹음 앨범. 1998년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해 발표됐다./재킷 이미지=유니버셜

삶의 무게와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한 한 인간의 20여년에 걸친 고뇌와 노력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거인'의 존재가 드리우는 부담감과 긴장감, 이를 이겨내기 위한 열정적인 노력, 좌절한 마음이 느끼게 되는 쓸쓸함,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품게 되는 희망, 극적으로 전개되는 노력을 통해 마침내 ‘거인’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자신만의 교향곡을 완성해 낸 한 인간이 그 안에 존재한다.

아마도 브람스의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독함과 쓸쓸함의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그의 음악이 모든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한 고독한 투쟁과 노력, 그 쓸쓸함의 감수성을 파고들기 때문이 아닐까?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이 지쳐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브람스가 여전히 인기가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저마다의 '거인'이라는 부담의 무게를 짊어진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고독함과 외로움, 쓸쓸함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그의 음악이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지.

일상에 지친 어느 쓸쓸한 가을 저녁 삶이 무겁다고 느껴진다면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을 들으며 잠시나마 고독함을 달래보기를 권한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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