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그 숨 가쁜 순간에 만났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대선, 그 숨 가쁜 순간에 만났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 김두호
  • 승인 200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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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공개할 수 없던 인터뷰, 이제는 말합니다 / 김두호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가 출범했다. 지난 한 해 뉴스 메이커였던 후보들의 이야기도 과거사로 잊혀졌다. 한때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은 일찌감치 출마를 포기하고 대학으로 돌아가 깨끗한 학자의 본래 이미지에 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때 그의 이름이 새 정부의 국무총리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고, 최근에는 또 강의실의 발언내용이 화제에 오르는 등 시선이 떠나지 않고 있다.


가장 참신한 대통령 후보로 주목을 받았던 정운찬 전 총장은 정치권의 대선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지난해 4월30일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해온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세력화를 추진해 낼만한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불출마를 발표하고 정치판을 떠났다. 그의 움직임을 쉬지 않고 전해주던 열댓 명의 취재 전담기자들도 한통의 e메일에 그의 마지막 소신을 공개한 것을 끝으로 주변에서 모두 떠났다. 2006년 11월부터 대선후보 관련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 후 평온하고 깨끗하던 학자의 일상은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바람 잘날 없는 이전투구의 정치무대로 옮겨졌다. 정치(正治)라는 이름의 리더십과 함께 술수와 모략이 난마처럼 깔린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겪었던 것일까?


‘대통령 꿈’을 접은 후 모두가 그때의 비화를 알고 싶어 하는 정운찬 전 총장을 인터뷰365가 처음 만났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요청으로 인터뷰 기사를 공개하지 않았으나 이제 더 감출 것이 없다는 편집자의 판단에서 지난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편집자 주)






[인터뷰365 김두호] 무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여름밤, 서울 강남에 있는 조그마한 일식당에서였다. 정 전 총장은 이날 평교수 시절부터 두터운 친분을 나누어 온 이장호감독과 오동희 회장(전 동조무역 회장), 그리고 정치활동을 재개한 전 국회의원 J씨 등과 자리를 함께 했다. 정 전 총장은 총장이 되면서부터 만날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마음편한 지인들과 저녁상 앞에 둘러 앉아 정담을 주고받으며 허심탄회하게 겪은 일들을 화제로 삼았다.


그는 대중교통이 편리해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지낸다며 이날 방배동 자택에서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왔다. 그의 첫마디는 “오늘 야간경기(야구)에 갈 건데 약속 때문에 포기했다”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는 소문난 야구광이다. 두산베어스의 마니아이고 특히 1루수 안경현의 열성팬이다. 이제 그는 한동안 비어둔 야구 관람석을 다시 찾는 재미를 되찾은 듯이 보인다.


모처럼 얼굴을 마주한 이장호감독이 “우리 집사람(영화배우 출신의 정은영 씨)이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우스갯말로 즐거운 방담의 자리가 열렸다. 이 감독 부인이 한때 연기활동을 정리하고 무교동에서 소문난 이북만두집을 경영할 때 정 전 총장은 단골손님이었다. 기자도 그 때 두어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어서 정 전 총장과 초면은 아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에 그는 “집에서 놀고 학교에서 놀고 있다”며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리고 그는 곧 숨 가쁘게 돌아간 ‘대선출마 포기’과정을 전후해서 있었던 일들을 오래전에 스쳐간 옛이야기처럼 홀가분하게 반추했다.

정 전 총장은 잠깐이었지만 자신에게 대선후보와 관련해 관심을 갖도록 한 사람은 사제 간과 선후배의 깊은 학연이 있는 조순 전 부총리와 김종인 국회의원(민주당/전 보사부장관)이라고 밝혔다. 평소 두 분을 존경하고 따랐던 그는 여론조사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적극적으로 도전의지를 갖도록 두 분이 독려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그 후 작년 3월 3일 한 정당의 고위지도층을 만나면서 그의 행로는 그가 바라지 않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고위지도층은 지난 두 차례 대선 때 자신의 기여도와 역할을 강조하고 공개적인 대선출마 조기 선언을 정 전 총장에게 성급히 독촉해왔지만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았다”며 정중하게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반대의사를 전달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열기와 함께 차츰 여당권에서도 대선 출마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인사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여론의 앞머리에는 정 전 총장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로부터 범여권의 정치 기상도는 후보들의 배후 세력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정파 간의 보이지 않는 마타도어도 가열되기 시작했다.


“4월 20일 금요일이었어요. 기자 몇 명이 어디서 들은 흑색 루머를 들고 나에게 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당신은 미국에서 오지 않았다는데 사실이냐, 숨겨 둔 여자와 사이에 7살 난 아이가 있다는데 사실이냐 따위의 황당한 질문을 마구 쏟아내더군요.”





아직도 정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선비에게 그것들은 코미디 같았지만 한편은 우리 정치세계의 수준과 현실이 실망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그중에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미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절대로 알리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부음을 접하지 못한 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것이 이상한 소문의 단초가 된다는 것에 경악했다. 또 재벌에게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 따위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말까지 나왔다.

“왜 평생 학자로 살아오다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의 소망중 하나가 사회봉사를 하고 싶은 것인데, 그 꿈의 연장선에서 관심을 가져 본 것”이라는 정 전총장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말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드는 정치세계의 속성이 그의 소망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두려움보다 피하고 싶은 혐오 대상으로 다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루머는 늘 학교와 가정이라는 행동반경을 벗어난 일이 없는 가장 곁에서 평화롭고 조용히 살아온 가족들에게 오히려 분노보다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정 전 총장과 1999년 독일에서 만나 알게 된 전 국회의원 J씨는 이 자리에서 미국 부시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했을 때의 인상적인 정치 풍경을 잠시 화제로 내놓았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풀밭 마당에서 부시의 취임사를 들으며 미국의 정치사회는 한 인물의 힘이 아니라 시스템이 움직이고, 이끌어 가고, 성공한 것을 엿보게 했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도 ‘정치는 비전과 정책 제시만이 아니라 이를 세력화하는 활동’이라고 했고, 그 시스템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자금이 필요한데 ‘원칙(법)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을 해결할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포기한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럼 장날 장꾼 몰려나오듯이 대선 후보가 쏟아져 나오는데 누구에게 호감을 갖느냐고 물었다. 정 전 총장은 대뜸 “우리 집사람과 아들 딸 가족들 모두 민주당 조순형 의원을 좋아한다” 면서 자신은 이념논쟁이 나오면 경계인을 자처하는 송두율 교수처럼 대선후보에 대해서는 경계인이라는 말로 폭소를 터뜨렸다. 조순형의원의 이야기에 좌중에서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면서 후원회를 통해 돈을 거두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은 “조순형의원은 내가 들어갈 집(정당)이 없어서 새집을 짓는다는 말이 나오자 공개적으로 나를 비판한 사람”이라며 웃음을 이어갔다.





정 전 서울대총장과의 인터뷰는 인터뷰라는 문답의 격식이 배제되고 본인이 보도에 관심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됐다. 기자가 메모하는 것을 보고도 애써 만류하지 않고 격의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지인들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작년 3월 경주고등학교에 특강을 했을 때도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간 것처럼 오해되었으나 사실은 오래전에 이사장의 아들인 조교출신 제자의 부탁을 거절 못해 준비된 행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그 곳의 유지 한분이 많은 대선 후보 중 정 전 총장이 가장 이상적인 분이지만 이번에는 정 전 총장이 제발 나오지 말아달라고 간청을 해왔다. 정 전 총장이 이유를 묻자 10년이 너무 길었고, 이번에는 꼭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전 총장은 과거 30여년을 하고 바뀐 건데 뭘 그러냐고 반 농담으로 응수를 했다. 그때만 해도 정 전 총장은 자신의 진로에 어느 정도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차기 대선후보로 여론의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인물이 경제엘리트 쪽이었고 보면 그에게도 이번 대선은 ‘사회봉사’와 관련된 소망을 펼 수 있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서울대를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국내외 경제현황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했고 총장이 된 뒤에도 한때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소신 있게 대학 행정을 이끌어낸 성공한 지식인이다.

어느 정치인은 우리 정치판을 ‘바퀴벌레 정치’, ‘그레샴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이 통하는 곳’으로 표현 했다. 그 정치인은 여의도 정가의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술수에 밀려 바닥까지 추락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의 정치문화는 반듯한 엘리트보다 정치적 전략에 능소능대한 정치투사가 더 성공할 수 있는 수준인지도 모른다. 결국 준비가 안 된 것은 정 전 총장 쪽이 아니라 우리 정치판일 수 있다.


이제 6.5평짜리 연구실로 복귀한 정 전 총장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 나가려다가 그만 두고 돌아온 기분이 들 때도 있다”고 몇 달 전의 사건들을 옛이야기로 잊어 가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초등학교 반장 선거 정도로 폄하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충격이나 사건도 마음의 치유가 이루어지면 한갓 지나간 작은 추억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5년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서 “누가 다음 대통령을 해도 나라가 더 힘들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허황된 정책보다 실현성과 실효성이 있는 정책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진실하고 진지한 인물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동안 그에게는 많은 것이 바뀌고 변화가 생겼다. 비교적 검소하게 살며 조금씩 저축해온 통장도 빈 통장으로 돌아온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봄의 끝자락에서 가던 길, 머물러 있던 길로 돌아간 뒤 이제 초가을의 문턱에서 그는 아주 편안하고 자유로운 선비의 모습으로 돌아와 쌓인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이장호 감독이 그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만일 자신이 출마해서 투표를 하게 되면 당신은 누굴 찍겠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한 이감독은 “나는 죽어도 내 이름 밑에 내 스스로 도장을 찍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정 전 총장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고 오동희 회장과 J씨도 낯 뜨거워 제 이름에 투표를 못하겠다는 말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 표가 소중한 선거전에서 실제 부닥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정 전 총장의 대답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는 욕심을 내면 지난 대선에서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처신을 명료하게 포기로 결정하고 야구 구경에 다시 정신을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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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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