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국보 1호는 양주동 박사였다
인간 국보 1호는 양주동 박사였다
  • 김두호
  • 승인 200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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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그의 일생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이 문화재로서 국보 1호였다면 사람 중에 국보로 통하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였다. 취재자료를 들춰보다가 이번 달이 마침 타계하신지 만 31주년이었다. 1977년 74살 되던 해 2월에 떠나셨으니 말이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나 신동 소리를 듣고 성장한 양박사는 스스로 <국보>라는 별칭을 즐겨 사용했다. 원래는 6.25 전쟁 때 동아일보 사장실에서 만난 마라토너 손기정 씨가 “모두 피난을 가고 국보들만 남아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양박사에게 말을 건넸던 것에서 <국보>란 말이 유래됐다. 그로부터 양박사는 공개된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국보로 칭했다. 그런데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국보 양주동> 칭호에 반감을 갖지 않고 사실상 인정을 하고 살았다는 점에서 양박사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한 양박사가 국문학자로 국내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7년 향가(鄕歌)와 관련된 일본 학자의 해석을 통렬히 비판한 <향가의 해독>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5살 때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어릴 때 이미 중국 당송(唐宋) 8대가의 글을 통달한 천재로 소문이 났다. 기억력도 비상해 경신학교 교사 시절에는 출석부를 보지 않고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호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47년부터 동국대 교수로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며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1966년 8월 부산에서 친구들과 휴가 중에 3일간 3백병의 맥주를 비우는 진기록을 남기면서 소문난 주호(酒豪)로 화제가 됐고 따르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많아 주례를 서는 일이 일과 중의 하나였다. 집에는 항상 술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안주는 언제나 날고구마로 정해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양박사 문우(文友)들은 틈틈이 종로 3가에 있는 자택으로 우르르 몰려가 술판을 벌이곤 하였는데 안주는 과일처럼 깎아 놓은 날고구마가 나왔다. 당시 <사모님 여순옥 여사>와 양박사는 단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술을 대접했다. 만년의 양박사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했는데 그럼에도 매일 맥주 2병 이상을 비웠다. 원고료를 맥주 값으로 불렀고 결혼주례를 서면 맥주 박스를 최고 기념품으로 생각했다.



국문학계의 큰 별이었던 양주동 박사는 어려서는 신동, 젊어서는 기재(奇才), 노년기에는 <인간 국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소탈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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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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