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 엔터테이너 조형기의 사부곡
만능 엔터테이너 조형기의 사부곡
  • 김두호
  • 승인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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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조 항>은 최고의 배우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부모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사모곡(思母曲)이란 고려가요가 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사부곡(思父曲)으로 표현한다면 연기자 조형기에게 차례상을 준비하는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은 간절한 ‘사부곡의 계절’이다. 1960년대 뛰어난 개성파 배우로 활동한 조항의 2세 배우인 조형기는 ‘아직도 아버지만한 연기자가 되지 못한 회한’을 간직하고 영화와 TV 연기 활동 26년째로 접어들었다.


요즘은 TV 연예오락 프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한때는 ‘탑 오브 더 월드’라는 음반까지 내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다채로운 활동을 해왔지만 본업은 연기인이다. 개그맨도 아니고 웃기는 얼굴도 아니지만 해학적인 기지와 재치있는 입담 덕분에 연예인중 가장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연예계의 많은 2세 연기자들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과 그리움이 별나게 진하고 깊은 조형기를 만났다.



아들이 생각하고 있는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의 배우였고, 가족에게는 낭만적이고 천진난만한 가장이었다. 내가 11살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 아버지는 서른아홉에 떠나셨다. 그럼에도 내 머리와 가슴 속에는 한평생 아버지의 모습이 살아계실 때의 모습으로 살아 있다. 아버지와의 추억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어른을 생각하게 되는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더욱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내 마음을 흔들어댄다. 아무리 바빠도 매년 의정부 장수원에 있는 산소의 벌초는 아들과 함께 직접 한다. 잔디가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깎고 다듬어 놓는다.


아버지를 알고 있는 영화인들도 아버지가 눈빛이 강렬하고 키가 작지만 체구가 아주 단단하게 보이면서 연기 개성이 분명한 성격배우였다고 말한다. 한국판 제임스 딘으로 일컫는 인물평도 따른다.

어릴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연기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라면서 아버지 영화를 많이 접했다. 지금도 자다가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날 때가 있다. EBS 같은 채널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흘러간 흑백영화를 상영하면 돌아가실 때 젊은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고 나타나신다. 나는 50줄로 다가섰는데 영화나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그래서 언제나 팔팔하신 청춘이다. 지난번 춘사영화제 때 아버지와 함께 활동한 최지희 여사님을 뵙고 아버지 생각이 나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집에 걸린 아버지 사진 중에 1956년 최여사님과 어깨동무하고 찍은 <아름다운 악녀> 출연 때의 사진이 있다.


모두가 다 고인이지만 언제나 점잖은 신사로 통했던 박암과 아버지 조항의 남달랐던 인간적 직업적 이야기들이 지금도 원로 영화인들 사이에 회자된다. 어릴 때 그분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많다. 우선 극단 신협을 통해 두 분이 해방 후 연극무대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킨 공을 지금도 인정받고 있지만 생전에 형제처럼 친분이 깊었다. 다 같이 파이프 담배를 즐기면서 같은 작품에 공연도 많이 했다. 나는 지금도 두 분이 마주앉아 즐기던 채리향의 입담배 향기를 맡으면 아버지와의 추억에 빨려든다. 길을 걷다가도 그 냄새가 나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바라보며 넋 잃고 서서 향기를 맡을 때가 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은 구파발로 넘어가는 길의 문화촌에 있었다. 이웃에 극작가 이진섭, 연출가 이해랑, 배우 장민호 선생님들이 몰려 살며 낭만과 풍류를 함께 하셨다.

아버지는 음악 중 샹송을 좋아해 집안에서는 수시로 샹송 레코드가 돌아가 귀를 감미롭게 했던 기억이 난다. 아들을 한창 귀여워할 무렵에 돌아가셔서 어린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좋은 추억만 남아 있다.




작년 9월 14일 저녁 경기도 이천 설봉공원에서 개최된 제15회 춘사(나운규)대상영화제 시상식 날은 태풍의 여파인지 비바람이 야외 공연장을 덮쳤지만 1천여 관중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행사는 ‘영화인의 길’로 조성된 공원 복판에 유공 영화인 부조상을 담은 도판 제막식도 있었다. 춘사 선생을 비롯해 김진규 황해 최무룡 허장강 이예춘 박노식 김희갑 독고성, 그리고 조형기의 부친 조항의 얼굴과 이름도 들어있다. 바로 그들의 2세인 조형기와 김희라(김승호의 아들) 독고영재(독고성) 김진아(김진규) 허기호(허장강) 등이 참석해 관중들의 시선을 모았다.


아들의 가슴 복판에 평생 존경하는 인물의 초상화로 결려 있는 조항은 영화배우보다 오히려 박암과 함께 신협을 이끈 연극무대의 큰 별로 이름을 날렸다. 아들은 배우 아버지의 뒤를 따라 연기자가 되는 것을 일찍부터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MBC-TV 15기 탤런트로 연기활동을 이었다.


그로부터 조형기는 짧고 힘든 시절을 살다간 아버지의 못다푼 꿈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그의 말대로 ‘아버지만한 연기자는 못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이 시대의 성공한 연예인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궁전같이 럭셔리한 주택을 마련해 잘 사는 고소득 연예인이 되었고, 더한층 아버지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고교생인 아들까지 연기자를 지망해 3세 연예인 가정의 위업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들이다.


세금을 많이 내는 연예인으로 이름이 오르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동아일보 연재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이호철 원작)를 영화로 제작하셨다가 흥행에 실패해 집안이 어려워졌다. 남기신 재산은 정비석 원작 <서낭당>의 영화판권 뿐이었지만 어머니가 워낙 억측으로 사셔서 자식들이 큰 고생은 안하고 살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시면 주머니를 털어 비싼 선물을 잘 사오셨는데 대개는 다음날 어머니가 물건 판 집을 찾아가 사과를 하고 환불받아 오실만큼 살림을 알뜰하게 하셨다.


어머니의 근황과 가족들이 궁금하다. 또 아들이 연기자를 지망했다면 그럼 배우 가계의 3세가 탄생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큰아들 경준이는 서울예대에서 디지털아트를 전공하고 음악을 좋아하지만 둘째 경훈이는 TV 시트콤에 이미 얼굴을 내밀었고 본인도 연기를 지망하고 있다. 아버지 입장은 적극 찬성하고 기대한다. 배우 집안에는 3세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김희라와 독고영재 자녀들도 연기 지망생이다.

우리 어머니는 미국에서 사신다. 이민 간 나의 누이동생인 딸 집에 사시는데 이곳보다 그곳이 사람들 친절해 살기 편하다며 잘 안나오신다. 3남매 중 홍익대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한 여동생은 미국 유학중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 로마에 산다. 미국에는 10년전 떠난 삼촌과 고모 등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금 출연중인 프로가 수없이 많은 것 같다. 채널을 돌리면 여기저기 얼굴이 나온다. 얼마나 바쁜가?

토크쇼 <좋은아침>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비롯해 연예오락 프로는 대부분 5년, 7년 넘은 장기 출연 프로들이다. 이제 녹화가 있는 스트디오를 갈 때는 출퇴근하는 기분이 든다. 오래 하다보니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는 정든 프로들이다. TV에 너무 많이 나오면서 영화 출연 요청이 뜸해졌다. 언젠가는 좋은 연기자로 남을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만나고 싶다. 아버지만한 연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조형기는 영화 <투캅스2> <역전의 명수> <마파도2>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포함해 TV드라마 <사랑과 야망> <엄마의 바다> 등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화면에 쏟아냈다. 그러나 그의 장기는 큰 눈동자를 껌벅이며 보여주는 재치있는 입심이다. 언젠가는 한밤중 안방에 쳐들어온 도둑을 걸쭉한 입담으로 기를 꺾어 조용히 물러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얼굴을 알아 본 도둑은 ‘악역배우 만난 걸로 생각하라’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든가.


마침내 그는 세련된 영어로 불러야하는 팝송을 이른바 콩글리쉬 발음으로 마구 불러 제껴 화제가 된 <탑 오브 더 월드>로 유명해졌고, 토크 프로나 오락프로의 가장 필요한 고정 출연자로 인기를 누려 오고 있다.


조형기는 아버지 조항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진지하고 감동을 주는 연기자가 대접을 받던 시대에 살았지만 아들은 소재와 무대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아내는 엔터테이너 시대에 산다. 그는 지금 부러울 게 없다. 아버지에 대한 부러움은 연기자로서 보다 아들의 선을 지키려는 효심에서 비롯된 겸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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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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