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르고 나왈은 말을 잃었다
그을린 사랑,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르고 나왈은 말을 잃었다
  • 김다인
  • 승인 201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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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김다인】“그을리다?”

늘 쓰는 표현은 아니다. 요즈음은 그을렸다는 다소 여유있는 표현보다는 ‘탔다’ 같은 직접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이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원제 ‘앙상디’(incendie)의 사전적 의미는 화재, 큰불, 넓게 퍼진 붉은 광채([비유] 동란, 전란)라고 나와있다. ‘그을린 사랑’이라는 한국어 제목을 단 것은 적절한 변형이다.

음악이 흐르고 영화가 시작되면 하반신만 보이는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카메라가 한 소년에게 멎으면 눈이 유독 크고 그 눈 속에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한 소년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다음 장면은 한 사무실. 공증인의 사무실에 젊은 남녀가 앉아있다. 잔느와 시몽, 쌍둥이 남매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말을 잃고 죽은 어머니가 남긴 유서를 공증인을 통해 듣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 나왈이 남긴 유서는 “내 장례를 치르지 마라 비석도 세우지 마라 나를 하늘을 보도록 눕히지 말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울러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와 형을 찾으라는 유언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유언을 잊어버리려는 시몽과 달리 잔느는 나왈이 남긴 사진 한 장을 들고 어머니의 궤적을 찾아 떠난다, 사진에는 낙서가 적힌 회색 벽 앞에 불안한 시선의 나왈이 찍혀 있었다.

나왈의 삶과 잔느의 추적이 교차되면서 어머니 나왈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죽었는지, 그리고 그 유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비밀이 하나씩 베일을 벗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신화적인 ‘그을림’이었다. 나왈의 삶은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꼭 레바논일 필요도 없는, 종교적 분쟁과 그로 인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살아내는 동안 나왈이 당한 일들은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의 현대적인 변형이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받고 내버려졌던 테베의 왕자 오이디푸스가 방랑 끝에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다시 테베의 왕으로 돌아와 벌어진 비극, 결국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손으로 찔러 장님이 된 채 방랑길을 떠난다.

이 비현실적인 신화의 드라마투르기를 현대를 배경으로 풀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드라마가 너무 강해 자칫 현실감이 떨어질 우려도 있다. 하지만 캐니다 감독 드니 벨뇌브는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으로 이 함정을 피해가고 있다. 신화적인 드라마를 다큐처럼 풀어내는 데는 나왈을 연기한 루브나 아자랄의 탄탄하고 절제된 연기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마침내 나왈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 잔느는 쌍둥이 시몽을 부르고 둘은 한 남자에게 다가가 어머니의 유서를 내민다. 그가 편지를 펴드는 순간, 겹쳐질 얼굴은 영화 인트로에서 정면을 바라보던 소년의 시선, 저격수, 고문기술자,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복사뼈에 박힌 쇠못이다.

영화를 본 곳은 광화문의 씨네큐브. 의외로 관객이 많았고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눈길에는 오랜만에 묵직하고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봤다는 평가, 그리고 마지막의 충격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복잡함 등이 비쳐져 있었다.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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