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곡의 등대지기 한명희 ‘비목’ 작사가(상)
우리가곡의 등대지기 한명희 ‘비목’ 작사가(상)
  • 김두호
  • 승인 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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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시문화서원 창립, 역사와 민족 문화운동

【인터뷰365 김두호】‘한명희’(韓明熙 1939∼)는 해방 후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일찍이 국민 애창가곡이 된 <비목>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이면서 우리말 노래와 국악 보급을 위해 청춘을 바친 음악방송 전문 프로듀서 출신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참혹한 1950년대를 넘어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젊은 사회는 포크송 팝송 등 외래음악의 천국이 됐다. ‘한명희’는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ROTC 2기로 군복무를 하고 동양방송(TBC)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TV문화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았던 시절의 라디오시대는 팝 음악방송이 판을 쳤지만 그는 다행이 국악을 좋아하는 방송국 오너 이병철 회장의 배려로 국악을 지키고 발굴하면서 우리말 가곡 보급에 매달렸다.

그가 방송국 시절 발표해 우리 가곡의 바람을 일으킨 <비목>은 최전방 고지를 지키던 육군 소위시절, 6.25 격전지에서 쉽게 마주치는 무명용사들의 유골과 녹슨 유품, 돌무덤을 떠올려 지은 노래였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닯어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수백만 명의 피가 산하를 물들인 처절한 전쟁의 기억을 떠올려준 <비목>은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느끼게 하면서 우리 가곡의 아름다운 정서를 드러낸 노래로 떠올랐다.
한명희 작사가는 방송사를 떠난 후 동양철학을 전공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고 1997년 국립국악원 원장, 2004년 서울시립대 교수로 정년퇴임 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와 전통음악 교류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703번지 6천여㎡의 땅에 ‘나라사랑 물망초예술제’ 행사의 본산인 이미시문화서원을 설립했다. 6.25를 상기하고 희생자를 추념하는 통일, 평화운동의 공간, 시와 자연사랑의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강영훈 국무총리의 눈물

이미시라는 문화서원의 이름부터 설명해주세요.
이미시의 자음인 o은 하늘(天), ㅁ은 땅(地), ㅅ은 사람(人)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 영원의 불, 호국의 불, 평화의 불을 상징하면서 삼족(三足), 삼재(三才),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나타냅니다. 이미시문화원이 추구하는 좌표가 전통적인 선비정신의 선양과 풍류문화의 중흥에 있다는 취지도 들어 있습니다.

문화서원이 추구하는 의미들이 대부분 민족정신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세 가지의 염원이 사시장철 타오르기를 갈망하며 추념행사장에서 채화해온 불씨를 문화서원에 가져와 3개의 촛불로 살려 꺼지지 않도록 켜두고 있어요. 하늘과 땅,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상생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입맛대로 고치고 바꾸고 해쳐왔어요. 인간이 자기네 중심으로 문명을 이끌어가지 말고 하늘과 땅의 이치를 존중하자는 것, 어떻게 보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서양철학 사상과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고 자연의 일원이라는 얘기입니다.

삼족이라는 말은 삼족오(三足烏)에서 유래된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 동이민족(東夷民族)의 문화코드인 해 속의 세발가마귀를 상징해요. 이미시문화원의 역사운동을 삼족화, 즉 세발불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명희 작사가는 ‘비목’의 작사에 대해 6.25전쟁에 대한 울분과 아픔을 담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고 회고한다. 그는 최근 남양주시에 위치한 이미시문화서원에서 새로운 문화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미시문화원에서 현충일이나 6.25기념일 행사를 꾸준히 기획하고 개최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6년부터 전쟁에서 희생된 분들의 진혼예술제 행사에 참여하는 분들의 모임으로 ‘비목마을 사람들’이 있어요. 회원들은 강원도 화천 평화의 댐 부근에 조성된 비목공원 일대에서 ‘비목문화제’를 개최해 왔어요. 또 6.25나 현충일, 휴전 기념일에는 추모공연, 강연. 시낭송 행사 등의 진혼예술제를 개최해요. 2010년부터 ‘진혼 예술제’라는 좀 무거운 행사 명칭을 바꾸어 ‘나를 잊지 마세요’의 꽃말을 뜻하는 물망초를 넣어 ‘나라사랑 물망초예술제’가 된 것이지요.

비목마을 사람들의 행사에는 주로 어떤 분들이 참여하는가요?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아요. 제1회 때는 신경림 시인과 황인용 전 아나운서가 공동대표로 참여했고 작년에는 김형국 녹색성장위원회위원장과 서지문 고려대영문과 교수, 최영하 전 우즈베키스탄대사가 공동대표를 맡았지요. 그동안 박정자 연극인, 안숙선 국악인, 김혜자 연기인, 이인호 전 러시아대사, 김동호 단국대 영화컨텐츠대학원장, 공혜경 시낭송가, 김철호 삼육대교수 등 문화계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오셨어요.
2004년 6월 행사에는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참석해 자신이 명색이 창군멤버인데 의미있는 추념단지 하나 조성하지 못하고 우리 세대가 끝나는 것 같아 통탄스럽다며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 자리에 참석한 김후란 시인이 며칠 후 ‘강영훈 전 총리의 눈물’이라는 시론을 중앙일보에 기고해 눈길을 모은 일이 있어요.

1960년대부터 ‘국민가곡’이 된 노래가 <비목>입니다. 동양방송(KBS 2TV의 전신인 TBC) 프로듀서 시절 <비목> 노랫말을 작사하셨는데 그로부터 그 한 곡이 6.25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절절하게 전해주는 노래로 애창되고 있습니다. 이제 노랫말의 배경 이야기를 자세하게 떠올려주시지요. 해방 후 우리 대중음악은 트로트와 팝송 등 서양음악이 큰 줄기를 형성했지만 라디오는 주로 팝에 매달려 국악이나 가곡 같은 음악 프로는 뒷전에 밀려나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랬지요, 라디오 전파가 팝뮤직으로 물결칠 때였지요. 나는 음악 연주가 아닌 이론을 공부했지만 프로듀서가 되면서 전공인 국악이나 우리 노랫말의 가곡프로 하나는 살리고 싶었지요. 아, 그런데 그 꿈이 TBC 오너였던 호암 선생(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 덕분에 살아났어요. 그 분의 국악에 대한 관심은 취미정도를 넘어 마니아였고 전문가 수준이었어요. 당시 방송국 중에 KBS만 구색 맞추기로 국악 프로가 끼어 있었어요. 그럴 때 민방 TBC도 <국악의 향연>이란 프로를 편성했어요. 오너의 관심을 살린 것으로 봐야지요. 결국 애청자인 호암 선생이 만나고 싶어 하는 국악인이나 듣고 싶은 노래를 프로그램 제작에 반영했어요. 내 출장비를 호암 선생이 개인적으로 챙겨주실 정도였지요. 어느 때는 갑자기 호출해 ‘정남희 산조’를 좀 구해 보라고 했어요. 알겠습니다하고 쉽게 대답을 했지만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었어요. 국악 담당 프로듀서가 모른다고 물을 처지도 아니었어요.
조사를 해보니 나주 출신 가야금 연주가로 월북해서 인민배우가 된 사람이었어요. 그 정도로 국악에 해박한 지식과 애정을 가져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프로를 진행할 수 있었지요.


통일, 평화운동, 시와 자연사랑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미시문화서원에서 필자와 함께 포즈를 취한 한명희 작사가.

이제 <비목> 이야기를 시작하시지요.
내가 <가곡의 오솔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피아노 반주로 들려주는 단조로운 방송을 하지 않고 스몰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편곡을 시켰어요. 그때 <비목>보다 먼저 만든 노래가 있어요.
우리말 가곡이란 게 70, 80곡 틀면 바닥이 나요. 새로운 우리 노래가 아쉬울 때 김민부라고 글 잘 쓰는 방송작가가 있어서 가사 좀 써보라고 부탁했더니 가져온 게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하는 <기다리는 마음>이었지요. 그걸 반주를 맡아주던 음악인 장일남 씨에게 작곡을 맡겨 히트곡이 됐어요.
이어서 서울대 ROTC 훈련동기로 노래 재주가 뛰어났던 친구(당시 동도고교 생물교사 심봉석)에게 주문했더니 자신의 실연체험을 소재로 쓴 ‘동그라미 그리다가 무심코 그린 얼굴’의 노래 <얼굴>이 나왔어요. 작곡은 자기네 학교 신귀복 음악선생에게 맡겨 만들어 보냈어요.

<기다리는 마음>과 <얼굴>도 직접 기획해서 탄생된 노래였군요.
그러다가 내가 그 무렵 여러 매체에 글을 쓴 걸 알고 있는 작곡가 장일남 씨가 당신이 노랫말을 써보라고 재촉해서 최전방 GP를 지키며 느꼈던 육군소위 시절의 쓸쓸한 기억들을 노랫말로 만든 겁니다. 이름도 처음에는 ‘일해’라는 필명을 사용했어요. 노랫말 작사라는 게 시(詩)와 달리 순수문학의 장르에서 보면 격이 떨어지는 분야로 생각해 본명을 감추었어요.

<비목>의 고향은 6.25 격전지

소위시절의 쓸쓸한 기억들이라면, 어느 곳에서 군 생활을 하셨어요?
김일성고지와 수도고지가 바라다 보이는 백암산 군사분계선 GP장(경계 초소장)으로 근무를 시작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11년이 된 때였지만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경비병들이 대치해 크고 작은 총격, 사망, 실종 사건들이 벌어지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런 무서움보다 더 나를 불안하고 슬프게 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산속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가묘라고 할 돌무더기와 막대기로 꽂아 둔 비목(碑木)들이었지요. 채소를 심으려고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유골도 나오고 녹슨 수통과 탄피, 실탄, 철모가 걸려 나와요. 그냥 산속을 걸어 다녀도 전쟁의 잔해와 전사자의 유품들이 나뒹굴어요. 막사 안에 머리 인골을 가져다 놓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요. 달밤에 순찰을 돌면 격전지에서 쓰러진 전사자들의 절규가 허공에 돌아다니는 기분을 느끼며 소름이 돋을 때가 많았습니다. 궁노루 울음소리, 그것도 이름 없는 병사들의 넋이 외치는 절규 같았지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비목>의 노래를 들어도 강영훈 전 총리처럼 눈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요. 언젠가 국방부 유해발굴팀과 다시 한 번 그 백암산을 가 본적이 있어요. 비목의 주인공들을 생각하며 서울 하늘을 바라보니 착잡했어요. 그들이 지켜준 산하에서 온갖 욕망과 쾌락을 누리면서 전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지요.

<비목> 작사자의 심경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짧은 노랫말이 6.25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쓰시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술 먹고 하룻밤에 쓴 겁니다. 아현동 애오개 달동네에서 총각으로 혼자 살 때 의분을 토해내며 쓴 노랫말이었지요. 그때는 우중충한 집에서 잠자는 자기네 방보다 방송국 숙직실이 호텔 룸 같이 안락하고 깨끗해 서로 숙직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니까 가난하고 애절한 시대에 그 노래가 나온 거군요.
사회적으로 힘들고 어두운 때였지요. 그런데 나는 원래 좀 허무주의자였어요. 센티멘탈리스트가 많았던 때이기도 했구요. 인생을 좀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많았지요. 월급쟁이들이 선술집 외상 막걸리를 먹던 시절인데 밤 12시부터 통행금지가 있었지요. 술 마시고 가다가 통금에 걸려도 신문사나 방송국 신분증 보여주면 통과하는 낭만도 즐겼어요. 하하하.

지금도 <비목>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데 옛날, 그 노래가 히트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엄청 많을 것 같습니다.
작사자 이름을 가명(필명)으로 썼다가 본명으로 바꾸는 계기가 왔어요. <비목> 노래를 연주하거나 부르기 위해 방송국에 온 음악인들이 초기에는 <비목> 작사자가 난 줄 몰랐어요. 가사가 너무 좋고 곡도 좋다고 프로듀서인 나에게 찬사를 늘어놓은 사람 중에 피아니스트 신수정 씨도 있고 또 소프라노 이경숙 씨도 있어요. 이경숙 씨는 특별히 자기 남편이 <비목> 노랫말이 너무 좋다고 칭찬이 대단했다는 거예요. 경숙 씨 부군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필명을 떨치던 김용구라는 대단한 저널리스트인데 그 양반이 인정했다면 굳이 이름을 가명으로 쓸게 아니라고 생각해 발표 5년만에 본명으로 되돌렸답니다. 그런데 지금도 노랫말 칭찬을 하면 내가 잘 쓴 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겪은 전쟁의 상처를 내가 상기시켜 감정을 자극시킨 덕분이라고 말해요.(계속)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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