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나이 이대근을 만나다
진짜 사나이 이대근을 만나다
  • 김두호
  • 승인 200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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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의 꿈, 그 로망을 보여준 배우의 삶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이대근은 추억속의 배우가 아니다. 예순 줄이지만 아직도 정정한 현역이다. 연기 경력 40여년. 영화, TV, 연극무대에서 그의 얼굴과 이름이 뜨면 최고의 히트작이 되던 때는 지났지만 지난해인 2007년도 대종상에서 <이대근, 이 댁은>이란 영화로 주연상 최종후보에 올라 그 쩌렁쩌렁하고 불같은 연기 열정의 건재함을 드러냈다.


지난해 출연한 작품도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하명중 감독)과 아직 개봉을 하지 않은 <무림여대생> (곽재용 감독) 등 두 편이다. 그렇다면 그는 배우의 활동 정년기를 거부하고 카메라를 향해 달려드는 ‘인생 2모작 시대’의 첨병이며 돌격병이다.


그에게 궁금한 것은 선이 굵고 액션이 강한 연기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배우로 살아온 이대근이란 한 인간의 실제 인생 역정과 인생관이다. 그는 지금 많이 변해 있다. 주거지를 미국으로 옮겨간 후 그의 삶과 생각들도 많이 달라졌다. 기자는 무제한의 시간을 받아내 수북하게 쌓인 배우 아닌 인간 이대근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옛날 배우로 알고 있다. 미국 이민 가서 사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다.

60대의 배우로 아직 주연급 역할을 하는 배우는 나뿐인지 모르겠다. 미국 이민? 나는 이민이라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산다. 지난 27년간 미국을 241회 오고 갔다. 때로는 일주일 만에 또는 한 달 만에 오고 간다. 서울서 워싱턴까지 13시간 걸린다. 한 백번 넘어설 때부터 미국이 제주도보다 좀 멀다는 정도로 느껴졌다.


완전히 세계인으로 봐야 겠군. 언제나 시차와 싸우며 살겠다.

지금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래서 국경이 별의미가 없다.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고 실제는 배타적인 눈으로 선을 긋는 사람에게는 이민 간 사람이 한 다리 건너 사람으로 보인다. 미국에 2백여 만 명의 한국인이 산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서울이 세계로 통해 있다. 미국에 서울이 있고 서울에도 미국이 있다는 생각이다. 러시아든 중국이든 어디든지 가서 살 수 있고 돌아올 수 있으니 굳이 이민자를 먼 곳 사람으로 떼놓고 생각하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 누가 나에게 이민자 취급을 하면 나는 그에게 출신지를 묻는다. 대다수가 지방 출신이다. 그럼 넌 서울에 이민 와 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국적 국경과는 다르지만 이제 살던 곳 사는 곳이 다르다는 것이 다른 색깔로 취급하는 때가 아니다. 진정한 세계관은 누구든지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그런 인식의 변화부터 필요하다.


물론 이민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과거와는 다르다. 그동안 양쪽을 오가며 느끼고 발견한 것이 많을 것 같다. 도대체 당신이 본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좋은 점 딱 3개만 꼽자. 첫째는 법을 무서워하고 법을 지키는 정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나라다. 우리도 좋은 법이 있지만 부정부패 등 범법 행위가 많고 처벌도 없는 자에게는 불리하다. 대통령도 법에 걸리면 단칼에 날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두 번째는 자기네도 빚지고 살면서 세계 여러 곳에서 불행한 고아를 입양해 키우는 풍습이 고귀하다. 세 번째는 진정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이라크에서 석유 욕심 때문에 미국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영웅은 수없이 쓰러지는 전쟁터의 희생자들이다. 10여 년 전 워싱턴에 6.25 참전용사 묘역이 만들어졌을 때 한국정부는 꽃다발 하나 갖다 놓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나는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고 감동받았다. 첫마디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어머니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말이었고 그 말에 의사당은 기립박수로 떠나갈 듯이 답례했다.



그런 말을 하면 새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지금도 ‘보수 우익’이란 말을 듣는다. 우리도 미국보다 좋은 것이 많지 않은가?

나는 우익도 좌익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관계도 없다. 연기밖에 모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저게 옳고 그르다는 정도는 분별할 줄 안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동방예의지국 소리를 듣게 된 것은 큰 죄를 범하면 3족까지 멸하는 추상같은 군주시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둑질하면 손을 자르는 이슬람 국가에는 도둑이 없듯이. 법을 지키는 정신이나 바탕을 예(禮)로 생각한다. 우리 세상은 너무 달라졌다. 동생이 형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제자가 스승을 때리는가 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욕보이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이거 배우가 시건방진 소리지만 맺힌 말 좀 더 하자. 민주화란 게 뭔가? 그런 것들이 민주화란 이름아래 고개를 쳐들었다. 민주화란 이름으로 서로 지역감정 부추겨 권력을 잡고 가족이 비리로 감옥에 가는 등 법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부터 예절문화를 망가뜨린 책임이 크다. 증오를 안고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는 마지막 장면에서 신의 이름으로 인간 가슴에 증오가 남아 있는 한 승부는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이가 먹을수록 눈에 거슬리는 게 많이 보인다. 결국 나라가 잘 되고 사회가 안정이 돼야 영화도 살아나고 나도 잘 산다는 생각에서 이야기가 길게 나왔다.


요즘 연에계도 선배들이 후배들의 예절문제를 두고 비판의 소리가 흔히 나온다. 너무 이기적이라거나 인간적인 면이 없고 비즈니스적인 관계에서 선배를 대한다는 불만, 언행도 함부로 하고 인사 예절도 모른다는 핀잔도 있다. 그것도 예가 망가진 시대적인 변화의 공통점으로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여기에 물질 우선, 물질 만능 시대이니 돈이 없어 대접을 못해 주면 선배도 존경 못받는 시대다. 돈으로 양반을 사서 잘 먹고 즐기는 향락문화에 푹 빠진 사회의 일면이 연예인 사회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힘이 있어야 하는데 힘이 빠진 선배는 이해관계로 따져서도 별 볼일 없는 사람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통령이나 장관한 사람도 돈맛을 외면 못해 감옥 가는 세상 아닌가.


영화와 TV드라마 3백여 편에 출연하면서 한 때 누구보다도 개런티를 더 많이 받는 연기자로 인기를 누렸다. 재산을 많이 모았을 것 같은데.

이름만 대면 사방에서 돈을 갖다 쓸 수 있고 3편 출연에 집 한 채 돈을 받기도 했지만 60%이상은 스태프와 영화인들의 대접이나 경조사비, 도와주는 직원들의 임금, 의상 활동비 등으로 소모됐다. 그 나머지 수입도 큰 재산을 만들어 주지 못해 미국 이민 가서 융자로 사업을 했다. 이민 갈 때 내가 출연한 영화 <김두한과 시라소니>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테이프 두 개를 기념으로 가져갔다. 사업을 할려니 목돈이 필요해 그 테이프를 들고 은행을 찾아갔다. 내가 코리아에서 평생 배우를 한 사람인데 이것밖에 내세울게 없으니 영화를 보고 신용융자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화를 본 은행장은 벌떡 일어나 악수를 하고 영광이라며 사인까지 부탁하고 즉각 5만 달러를 15년 상환조건으로 융자해주었다. 그 돈으로 워싱턴DC의 YMCA 안에 다이어트용 샌드위치 점포를 마련해 생활기반을 잡았다. 두 달 전까지 아내가 그 가게를 운영했다. 자식들 모두 공부 잘 시키고 성공했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해서 26년 만에 정리를 했다. 아내도 곧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식 잘 키우는데 성공했다는 소문이 충무로 사람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퍼져있다. 모두 명문학교를 다닌 수재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랑을 듣고 싶다.

딸만 셋이다. 맏이(이원경 41)와 둘째(이원선 38)는 모두 미국 식품 의약국인 FDA 소속의 고위관료다. 큰아이는 그곳에서 차관급 대우를 받고 있는데 신학박사인 목사와 결혼했다. 둘째는 남편도 경제학자다. 그래서 딸, 사위 합쳐서 우리집에 박사가 넷이다. 막내(이서해 33)는 고등학교 교사로 사업가와 결혼해 지금 아기를 갖고 있다. 막내를 마지막 시집보내면서 눈물이 너무 쏟아져 혼났다. 이제 남은 일은 하던 연기생활 계속하며 보람을 찾고 축복을 준 하나님께 고마움을 갚는 길을 찾는 일이다.


자식 교육에 성공한 이민가족으로 자랑스럽게 보인다. 사위가 목사면 이대근씨도 신앙인인가?

그렇다. 표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사람들은 내가 교회 다니는 줄 잘 모르지만 내가 ‘장로’다. 서울 연남동에 있는 선민교회에서 2년 전에 장립 받았다. 신앙을 통해 인간 윤리를 배우고 정직하고 진실된 삶을 찾는다. 작품세계가 픽션이지만 추구하는 것은 현실과 같은것과 꼭같은 맥이다. 영화 <타이타닉>의 테마를 젊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웃기는 발견이다. 남의 부인을 빼앗거나 부부의 기본 윤리를 버리면 결국 망한다는 걸 보여준 영화다. 윤리를 지키는 일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걸 사랑의 영화로 해석하면 세상에 혼란이 온다. 우리 영화들은 요즘 이상한 것들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민군복은 번듯하게 입히고 국군군복은 거지처럼 등장시킨다. 역사적 진실을 파괴하고 인간의 기본 윤리를 포기해야 새로운 예술이 되는 양 생각하면 안 된다.




이대근이 배우가 되기 전 서울 아현시장에서 한시절 야채장사를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기자에게 들려준 고백이다.


그는 군복무를 끝내고 딱 2년간 아버지 일을 도우며 시장사람들의 인간 냄새를 다양하게 접했다. 연기도 결국 다양한 인간의 표정을 그려내는 수단이다. 당시 채소장수 이대근의 눈에 비친 군상의 희로애락은 평생 그의 삶과 연기세계의 과제물이 됐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고교시절부터 싹텄다. <실락원의 별> <목포의 눈물> 같은 영화를 보며 자신을 밤새도록 울게 만든 배우를 동경했고 대학도 유일의 실기학교인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현 중앙대)를 다녔다. 채소장사를 했지만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김두한이나 시라소니 같은 풍운의 협객이었고 의리의 건달이었다. 서울 아현동에 굴레방다리가 있을 때 큰 물길을 뛰어 넘는 용맹으로 악질 건달을 다스리는 공포의 건달이었고 자유당 시절에는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했다.


이대근은 아버지로부터 강인한 체력과 끈기와 집념을 배웠다. 그의 경력 중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는 국립묘지 나팔수도 있다. 고교 때 트럼펫을 연주한 덕분에 국립묘지 창설직후 첫 나팔수가 되어 구성진 진혼곡을 불며 자식을 잃은 유가족 곁에서 함께 우는 일도 많이 겪었다. 영화배우의 문턱이 높던 시절 영화 쪽보다 쉬운 KBS-TV 탤런트 7기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다려도 얻어맞는 행인이나 단역정도의 멍청한 하류 인생 역 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대근은 그가 지난 인생에서 보고 느낀 살아 있는 연기를 하나씩 배우고 풀어 가는 연기법을 찾아냈다. 배역이 주어지면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저돌적인 연기도 일찍 몸에 익혔다.



연기자에게는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 진정한 개성은 외모보다 바로 언어와 몸짓에서 나온다. 당신의 개성은 몸짓과 걸쭉한 언어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출연 작품이 많지만 그 중에 스스로 개성을 살려낸 대표작만 꼽는다면 어떤 작품들인가?

연극은 <노틀담의 꼽추> <고려인 떡쇠> <인형의 집> <우보씨의 어느 겨울> <이순신> TV드라마는 <역풍> <갈대> <제3지대> <거상 이상옥> <이성계> <고산자 김정호> <설중매> <수사반장>, 영화는 <제3지대>를 시작으로 <김두한 시리즈>와 <시라소니 시리즈>, <거지왕 김춘삼><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심봤다> <감자> <장마> <뽕> <변강쇠><연산군> 등이다. 종교영화로 <빛을 마셔라>도 뜻을 푼 작품이다. 역사 시대물이나 액션영화와 해학 작품이 주로 많다.


얼굴이 별로 변하지 않고 있다. 보톡스 주사라도 맞은 건가?

하하핫. 얼굴에 신경 안 쓰고 살았다. 그런 주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누굴 미워할 일도 없고 신경 쓸 일없이 마음 편하게 살다보니 늙는 속도를 못 느끼고 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후배들이 노인 취급을 해 서운할 때도 있다.


40여 년간 우리 영화 제작 현장에서 살며 느끼고 본 것을 정리해 달라. 작품의 흐름이나 소재의 변화를 어떻게 보는가?

1950년대까지는 일제강점기에 맺혀 있던 눈물과 한이 터져나온 작품들이 주류였다. 60년대부터 70년대는 반공작품의 시대 같고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TV에 영향을 받아 영화가 영상매체의 기둥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각 분야의 PR성 상업성 소재들이 작품으로 많이 등장한 시대처럼 보인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부정 비리가 소재로 많이 선택되는데 그것들이 선행이 아니라 악행으로 마무리 되어도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것이 달라졌다. 악도 감동을 남기면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시대인 것이 두렵다. 미국서는 CF에 마시는 연기는 안 나온다. 어린이들이 함부로 흉내 수 있는 것을 기업들이 경계하기 때문이다.



반공영화가 지금은 코미디처럼 보이듯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가치관이나 의식구조도 많이 달라졌다. 참여정부도 보수층 어른들이 보면 친좌파 정부였다. 그런데 시대적인 변화를 너무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지구 인류의 역사는 2백년 주기로 변해 왔다는 것이다. 땅을 서로 차지하려는 땅뺏기 전쟁에서 그다음이 이데오르기 전쟁, 세 번째가 잘먹고 잘살기 위한 산업전쟁, 이제 우리는 문화전쟁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충족되니 사회복지도 걱정하고 서로 개성과 품위를 살리는 문화적인 사회를 위해 싸우는 것같다. 이데오르기 시대는 한참 지났다. 남은 것은 종교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이라크라는 나라는 물과 빵과 총만 있으면 국민들이 무서워할 게 없는 나라다. 코란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로 뜻이 안통하면 미워하지 않고 그냥 안 만난다. 만나서 속 태울 필요가 없어서다. 개인의 자유와 생각을 존중하는 사회가 문화적인 사회고 민주주의 사회인데 모두가 빨간 티셔츠 입고 한덩어리로 뭉쳐 대한민국을 외쳐야 아름다운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당신의 이름을 써서 제목을 만든, 거기에 대종상에 주연상 후보로 올랐던 <이대근. 이 댁은>라는 영화는 어떤 영화였는가? 생각해보니 과거 <대근이가 왔소>라는 영화도 나왔는데.

노인에게는 외로움은 암 같은 병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지금 젊은 영화팬들의 시선을 불러들이지 못해 아쉽다. 도대체 지금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베푸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 베풀게 없으면 명절 때 톨게이트에서 돈 받으려고 국민들의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데 그 하루라도 공짜로 가게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일에 대한 욕심은 젊을 때와 같아 보인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남은 인생 설계도를 보고 싶다.

사람의 욕심은 비슷하다. 잘먹고 잘 살면 남에게 존경받고 싶은 것이다. 연기자로 명예를 지키며 이대로 나는 간다. 집이 워싱턴DC의 상류 주택가인 매크린에 있고 서울에도 아파트가 있다. 그게 전 재산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양 쪽을 오가며 살고 싶다. 번 돈은 대부분 길에 뿌렸지만 아깝지 않다. 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칼든 사람이 아니라 배우겠다는 사람이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것을 찾고 배우며 살겠다. 가장 아름다운 성직자는 기도하면서 눈감는 거라는데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삶을 마감을 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할 것 같다.



이대근에게는 구수한 토속 음식을 담아내는 질그릇 같은 인간 냄새가 있다. 투박하고 우직하게 보이는 면상이지만 부드럽고 해학적인 입심을 가졌다. 타고난 ‘끼’라기보다 성장과정에 서 몸에 밴 분위기라는 말이 옳다. 어쩌면 한국에서 그런 분위기를 주는 배우는 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대근 같은 배우가 나올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이 이대근이 소중한 이유다. 그것이 앞으로 그에게 더 많은 작품의 기회가 허락되어져야 하는 이유다. 카메라 앞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은 배우, 고맙다. 이대근. 그래. 무소의 뿔처럼 쉼 없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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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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