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만의 금의환향 “나는 한국의 딸” 타코마시장 메릴린
42년 만의 금의환향 “나는 한국의 딸” 타코마시장 메릴린
  • 김두호
  • 승인 201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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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때 서울 떠난 혼혈소녀 설움 딛고 미국사회 리더로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메릴린 스트릭랜드 (48 Marilyn Strickland) 여사는 시애틀과 인접한 미국 워싱턴주의 유서 깊은 항구 도시 타코마의 시장이다. 초청 방문지인 중국 상하이로 가는 길에 경유지인 서울에 잠시 체류 중인 그녀를 인터뷰365가 단독으로 만나게 된 데는 행운과 보람이 따랐다.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인터뷰 첫마디는 "나는 한국의 딸"이었다. 매우 진지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희생적이고 강인한 일생을 산 한국인 어머니와 2차대전과 6.25 참전 용사인 미국인 아버지사이에서 무남독녀로 자란 스트릭랜드 시장은 출생지가 서울이다. 아버지가 한국에 복무할 때인 1962년 9월 25일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2살 때인 1964년 아버지를 동반해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46년 만에 서울을 방문한 날인 2011년 2월 25일을 그는 스스로 '홈커밍데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국의 딸"이라고 한 당신의 첫마디가 많은 생각을 함축해서 표현한 것 같아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어릴 때 미국으로 떠났다면 한국에 살 때의 기억들이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미국의 지도층 인사인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동기나 이유를 묻고 싶다.

한국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나의 어머니 고향이 서울이다. 어머니는 내가 성취하고 살아온 전부를 키워주시고 뒷바라지한 분이다.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의 고향은 내 마음의 고향이며 고국이나 마찬가지로 느낀다. 아주 오랜 생각이다. 분명 나는 미국시민이지만 또 하나의 모국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어머니(김인민 82세)는 가족에게 희생적이고 생활력이 강인하며 부지런하시고 검소하며 매사에 적극적인 한국여성이다. 아버지(Willie Strickland 1987년 타계)는 2차대전과 6.25전에 참전한 특무상사로 따뜻한 분이었다. 2살 때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가면서 시작된 나의 어린 시절의 미국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다. 마틴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이 한창 주목을 받을 만큼 인종 차별 인식이 유색인종을 많이 울렸다. 나는 흑인과 아시안의 혼혈이었으므로 더 힘든 환경에서 자랐다. 차가운 시선 속에서 공부하면서도 누구보다 뛰어난 모범생이 되고 공부든 피아노 연주나 수영이든, 뭐든지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희생적인 노력과 뒷바라지 덕분이다. 어머니는 모든 것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베스트 정신을 몸에 익히도록 자신의 물심양면을 모두 나를 위해 바친 분이다.


모든 점에서 베스트라면, 공부도 항상 베스트 오버 베스트였는가?

대체로 학교 성적이 1등을 유지했다. 고교 때는 1등을 못한 경우도 있지만 최상위 그룹에서 빠지지 않았다. 나는 타코마시에 있는 에디슨 초등학교, 그레이 중, 마운트 호마고교를 거쳐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에서 사회학, 크락 애틀란트대학원에서 MBA를 마쳤다. 내가 다닌 학교는 대부분 공립이었지만 사립학교 학생들보다 더 착실하게 공부하고 교육을 받았다.



자녀교육에 열정적인 어머니의 그런 정신이 한국을 이끌어 온 우리 모든 한국여성의 저력이고 미덕일 수 있다. 아마도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열정을 고루 가진 분 같다.

어머니는 타코마시에서 2010년도 ‘올해의 어머니상’을 받으셨다. 그 상은 내가 시장이 된 것보다 더 영예롭고 소중한 상이었다. 어머니는 노후에 병상생활을 한 아버지를 위해 20여년간 간병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고 나를 이끌어주셨다.

선거 때는 딸의 가장 큰 지지자였고 운동원이었다. 어머니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방문해 타코마를 위해 딸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했다.

시장이 되기까지 또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분이 있다. 리아 암스트롱이라는 사업가인데 그는 시의원 때부터 당신은 좋은 지도자로 선출될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을 심어주며 후원했다.


당신의 삶에서 어머니가 차지한 비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순간도 아버지가 별세하신 후 어머니를 홀로 두고 5년간 공부하기 위해 조지아주로 떠날 때였다.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으나 표현을 하지 않고 가는 길을 막지 않으셨다.


몇 살 때인가?

25살 때였다.


정말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지금 당신이 나를 인터뷰 하는 이런 시간이 행복하다. 시장이 되어 오바마 대통령도 만나고 새롭고 큰 일들과 마주치며 하고 있는 일들이 성과를 나타낼 때 나는 행복하고 즐겁다. 그리고 나로 인해 즐거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 볼 때 행복하다.


미국에서 선출직인 시장이 되려면 정치성향이 뚜렷하고 리더십이 있어야한다. 시장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의 노력을 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듣고 싶다.

베스트를 고집했던 나의 성장기에 배우고 체험하고 노력했던 것들을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를 위한 준비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학업을 끝내고 많은 직장과 직업을 가졌다. 대학 졸업 후 보험회사에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스타벅스사와 광고회사에서도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공립 도서관에 2년간 근무하면서 사회활동을 하는 공직에 관심을 가졌고 이어서 시의원에 선출됐다.

2009년 11월 민주당 소속으로 4년 임기의 타코마 시장에 선출된 것인데 여자 시장으로는 두 번째, 흑인과 한국인의 혈통을 가진 혼혈인으로는 처음이다.


타코마시는 어떤 특성의 도시인가?

한국인들은 미국이라면 LA부터 떠올린다. 이제는 타코마도 많이 방문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나는 그런 노력을 하겠다.

워싱턴주에는 6만여명의 한국계 동포들이 살고 있고 타코마시에도 한국인이 8, 9천여명에 이른다. 타코마시의 인구는 20여만명이지만 점점 줄지 않고 늘어간다.

1852년에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타코마는 해상 육상 항공 교통의 요지이다. 대륙 횡단철도의 서쪽 종점으로 출발해 모피 제지 목제가공업, 제분, 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해 있지만 주변에 호수와 바다를 낀 공원이 많아 관광도시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과 교역에 따른 무역항구로도 기능이 크다.

그래서 2008년 양국에서 서로 비슷한 지리적 환경을 가진 전북의 군산시와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그것을 계기로 타코마시는 윈윈 전략이 가능한 한국의 비즈니스 파트너를 찾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군산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면 그때 혹시 군산을 방문하지 않았는가?

잠시 군산을 방문했지만 일정 때문에 서울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한국을 찾은 것은 그때 처음이고 이번이 두 번째지만 서울은 처음이다.


어떤 일로 서울에 온 건가? 외가댁이 서울이라면 친척들이 살고 있을 텐데 46년간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니 그만한 사정이 있는가?

중국 상하이로 가는 길에 시간을 만들어 서울에서 며칠간 체류하면서 경제인도 만나고 여성경제인회, 혼혈협회 등 단체 인사들도 만났다. 또 외사촌을 만나고 있다. 어머니 형제가 7남매인데 외사촌 한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가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어머니가 서울 방문 일정을 앞 둔 딸에게 한 말이 있을 것 같다. 또 처음으로 찾은 서울에 대한 느낌이나 인상을 말해달라.

어머니는 1979년에 한번 서울을 방문하신 후 서울 얘기를 친지들로부터 자주 전해 들어 옛날과 달라져 있다는 것을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어릴 때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생각할 수 없지만 내가 본 서울은 다이내믹하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이다. 거리와 도시 질서가 잘 정돈된 것도 인상적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고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도 나를 반하게 했다. 한국 문화가 마음에 든다.


어머니가 한국 분이기 때문에 김치나 된장찌개 등 식성도 한국적일 것 같다.

물론이다. 한국의 토속 음식을 좋아한다. 이번 방문 길에 아주 즐거운 것 중의 하나가 한국 음식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먼저 어떤 말부터 하고 싶은가?

나는 한국의 딸이다. 미국이 발전하고 잘살기를 바라는 만큼 한국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미국의 한국계 젊은이들도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 어머니처럼 한국인들은 자녀 교육에 적극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점점 미국 사회에 공헌하고 미국의 주류사회와 소통하며 모범이 되는 한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이곳 한국의 젊은이들도 더욱 더 한국의 품격을 높이고 세계적인 리더십을 꿈꾸기를 기대한다.


시장의 임기는 어제까지인가?

앞으로 2년을 하고 연임이 가능해 6년 후까지 일할 수 있다.



미혼인가?

하하하. 아니다. 작년 12월에 결혼했다. 남편은 고교 교장으로 근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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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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