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사 시절 하숙했던 초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사 시절 하숙했던 초가
  • 김철
  • 승인 20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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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사계와 삶의 이미지 / 김철




【인터뷰365 김철】
“선생으로는 그 놈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총칼을 차고 와 이겨주마.”

일제 강점기 시절 문경초등학교에 재직하던 청년 박정희 교사는 학교를 그만 두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놓고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황국신민이 되기를 강요하는 일인교사들에 맞서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다가 발각되어 더 이상 교사직을 맡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그 해 20세의 젊은 나이로 교편을 잡은 지 3년 무렵의 일이다. 그것은 곧 한 청년의 인생은 물론 훗날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만약 그 때 이 같은 청년의 단호한 의지와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일제에 복수를 다짐하며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과감히 버리고 군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평생 교단에 몸담았을지 모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그 역시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없는 오늘날의 한국은 사실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제성장’하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우리나라의 기적 같은 경제발전에 끼친 공로가 실로 지대하기 때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박대통령이 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것도,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는 것도 한국을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이끈 주역인 그의 경제 지상주의에 입각한 카리스마적인 리더십과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 국민이든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는 ‘청운각’은 박대통령이 교사로 재직할 때 거처하던 하숙집을 이르는 말이다. 가난의 상징인 초가지붕은 반만 년 내려오던 옛날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이는 곧 새마을운동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리도 잘 살아보세’라는 기치 아래 한국인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새마을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번질 때 가장 먼저 손댄 것이 가난한 농촌의 초가지붕을 헐고 슬레이트로 개량하는 일이었다.

박대통령은 생전에 10차례나 ‘청운각’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10.26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무렵이다. 박대통령이 매번 이곳을 찾은 데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단순히 자신이 묵었던 하숙집을 방문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는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필시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경제 제일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실제로 국방력 강화가 궁극적 목적이었던 박대통령으로서는 ‘청운각’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을 절감하고 일인교사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교사직을 박찼던 그 시절의 패기와 기개로 결연한 의지와 결단이 요구되거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의미에서라도 ‘청운각’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부국강병으로 압축할 수 있는 박대통령의 확고부동한 통치이념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게 된 출발점이자 배경무대가 된 곳이 ‘청운각’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청운각’은 생가가 지닌 상징성과 또 다른 의미에서 청년시절 박대통령의 혼이 서린 뜻 깊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지도자라면 생전에 그의 자취가 다분히 남은 건물 또한 역사적일 수 있으므로 기념물로 대대로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 문경시에서 새로 단장한 ‘청운각’에 들어서자 마당에서부터 향내가 난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 앞에 놓인 향이 타는 냄새다. 마당가 담장 옆에는 고사목 한 그루가 서 있다. 박대통령이 서거한 이틀 뒤 때 아닌 살구꽃 두 송이가 느닷없이 피었다가 고사했다는 당시 수령 60여 년이 됐었다는 나무다. 이를 본 사람들은 고인의 서거를 슬퍼하다 고사했다고 해 ‘충절의 나무’로 부른다. 그런데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서거 당시에도 생전에 고인이 좋아했던 뜰 앞의 목련나무에서 꽃이 활짝 핀 적이 있다고 하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집안에는 박대통령이 교사재직 당시의 사진과 책상 가방 등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해마다 박대통령이 서거한 10월26일에는 ‘청운각’에서 제자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열린다. 올해가 31주년이었다. 12.12사태가 일어난 지도 마찬가지로 31년이 됐다. 10.26사건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일이다. 북한의 잔인한 무력도발과 거듭되는 도발위협으로 뒤숭숭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한순간도 방심해선 안 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하한 위기가 닥쳐도 이를 이겨내는 무서운 저력이 우리에게 있다. 강력한 리더십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유능한 지도자로 국내외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박대통령의 혼이 서린 ‘청운각’ 초가가 새삼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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