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억대 재산 영화발전 위해 내놓은 원로배우 신영균 (상)
5백억대 재산 영화발전 위해 내놓은 원로배우 신영균 (상)
  • 김두호
  • 승인 201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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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고맙다” 영화배우 1등 부자의 용기 있는 기부 정신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5백억원 규모의 재산을 영화와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큰 부자' 신영균 전 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의 '큰 용기'가 많은 뉴스매체의 화제에 올랐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 영화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주연 남자배우로 화려한 청년기를 보낸 그가 선뜻 내놓은 기부 재산 중 서울의 명보극장은 스스로 재산목록 1호로 생각하며 아껴온 부동산이다.

제주도의 주요 관광명소가 된 남제주군 남원리 절경지에 100억여 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신영영화박물관의 시설물과 1천여 점의 전시물도 기부 재산에 포함돼 있다.


신영균 회장이 국내 문화예술인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인물로 선망의 눈길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오른다. 1928년생이므로 올해 82세, 그 무렵부터 일생을 두고 흔들리지 않은 재력을 지켜온 배경과 비결은 무엇일까? 그러나 '인간 신영균' 회장을 가까이서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매력은 재력에 있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근면검소와 겸손한 인품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표시가 나지 않았을 뿐 부자로 살면서 크고 작은 선행을 쉬지 않고 해왔다.


그는 자수성가형 부자다.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초등학교 시절 부친이 별세하면서 자녀의 장래를 걱정한 홀어머니의 노력으로 가족이 서울로 이주해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모태신앙에 뿌리를 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교회 아동극으로 연기에 눈이 뜬 그는 서울 한성중고교 졸업 후 극단 청춘극장에 입단, 신극운동에 참여했고 서울대 치과대 진학 후에는 서울대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 연극부장으로 열정을 드러냈다.


6.25직후 학업을 끝내고 해군 군의관 복무 후 잠시 치과의사로 활동한 시기가 있으나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하면서 1970년대까지 20년간 <연산군> <상록수> <빨간마후라>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한번> 등 294편의 작품을 남겼다. 대종상과 청룡상,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당시 대표적인 국제영화상인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고루 수상하며 사극과 현대물을 가리지 않고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남자다운 매력의 연기자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연기활동에 이어서 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으로 시작된 사회활동은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세 차례 연임하고 제 15, 16대 국회의원의 정치활동으로 이어졌고 여야의원 62명으로 국회문화예술연구회를 결성, 회장을 맡기도 했다.

2010년 10월 5일 명보극장(명보아트홀)에서 사유재산 사회 기부에 대한 신영균 회장의 기자회견 내용을 첫 회에 소개하고 이어서 성장기와 배우 활동기의 일화를 중심으로 한 인터뷰 기사를 2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먼저 기자회견에 앞서 ‘영화예술의 미래를 이끌 인재들을 생각하며’라는 제목으로 재산 기부의 취지를 밝힌 신영균 회장의 글을 앞머리에 그대로 옮겼다.



오는 10월 27일이 영화인의 날입니다. 1919년 우리 영화인이 만든 영화가 첫 상영된 날을 기념하며 정한 영화인의 날이 올해로 91주년, 머지않아 100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 보면 영화는 지난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고 대중문화 예술의 고향이었으며 모태였습니다.


저는 1960년 영화 연기자가 되어 20여 년간 영화와 더불어 보낸 청년기를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사회 활동이나 사업 또는 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은 우리 영화와 영화인들 곁에서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는 내 직업의 뿌리였고 내 인생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가 발전하고 동료 후배 영화인들이 활기 있게 활동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가장 흐뭇하고 행복감을 느낍니다.


저는 저의 삶의 토대가 되고 토양이 되어 준 우리 영화를 위해 무엇인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깊이 간직해왔습니다. 영화 발전에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에서 결심한 것이 제가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생각했던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도에 있는 신영영화박물관을 기꺼이 내놓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충무로시대를 상징하고 우리 영화사(史)에서 문화재적인 가치를 가진 기념물로 남아 있는 명보극장을 그대로 보존해야한다는 의미에서도 이제는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국내 최초의 제주신영영화박물관도 1999년 개관을 전후해 20여 년간 준비하고 수집한 전시물이지만 마땅히 사유재산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떠한 시대적인 변화와 환경 속에서도 우리 영화예술의 90여년 전통과 영화인의 우수한 창작 집념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영화는 두뇌산업이기도 해서 우리 영화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많은 인재들이 꾸준히 영화로 발길을 옮기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명보극장과 신영영화박물관의 전시재산은 영화계와 학계, 언론 및 문화예술계의 전문인사로 구성, 창립될 재단에 출연되어 공익재단에 준하는 투명한 관리 운영을 통해 영화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지원사업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의 미래를 위해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간곡히 기대합니다.




재산 기부의 좋은 뜻이 사회에 귀감을 남겨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부한 재단이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고, 후배 영화인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은지 구체적인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저는 일단 기증을 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재산의 관리운영에 관한 부분은 예술문화재단 설립을 추진중인 박종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중심으로 신언식 한주에이엠씨 회장, 언론인 출신의 영화평론가 김두호 씨 등으로 구성될 이사회에서 각계 많은 분들의 의견을 정리해 공익성 투명경영으로 유지될 것으로 압니다.

주로 영화인재 장학 발굴사업에 비중을 두게 된다면 어려운 영화인들 자녀들에게도 혜택이 주어졌으면 합니다.


이번 기부 이외에도 아이티 지진 참사 성금과 금혼식 때 개인적으로 행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 비용을 기부금으로 돌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꾸준히 기부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있는지요?

제가 결혼한지가 55년 됐어요. 제 칠순 때나 팔순 때도 큰잔치를 하지 않고 가족들과 조촐하게 식사를 하며 넘겼는데 50주년 금혼식만은 멋지게 하겠다고 가족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인, 정치인 여러 사람을 불러서 멋지게 보내고 싶어서 호텔까지 예약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화려하게 금혼식을 하며 돈을 없애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한 그릇이라도 음식을 같이 나눠 먹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신문사에 가져다 줬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굉장한 행복감이 느껴져요.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데 보람을 느끼고 무엇보다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재산이 굉장히 많다고 소문이 났는데 명보극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요?

제가 재산이 많다는 것은 영화인으로서 조금 있을 뿐이지 그다지 재벌은 아닙니다. 예전부터 김수용 감독이 저만 만나면 ‘신 재벌’이라고 농담조로 예기한 것이지,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명보극장은 제 재산의 1/3정도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제 재산의 기반을 만들어주고 40년 가지고 있던 재산이기 때문에 굉장히 애착이 갑니다. 앞으로 명보극장이 후배들에게 좋은 일 하면서 영원히 유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명보아트홀로 이름을 바꾼 명보극장을 인수할 당시의 일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지금은 극장과 배급 시스템이 많이 변했지만 과거에는 제작한 영화를 처음 공개하는 극장인 개봉관의 위세가 대단했어요. 당시 한 해에 150-200편 정도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일단 영화가 완성돼도 개봉관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명절에는 하늘의 별따기였고요.

희극배우 김희갑 씨와 영화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를 제작해서 일본 오사카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는데, 영화를 극장에 붙여주지를 않는 거예요. 국도극장에 찾아가 사정을 했는데 도저히 안된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희갑 씨가 아는 분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개봉했는데 국도극장 사장이 화가 나서 ‘앞으로 신영균 김희갑이 나오는 영화는 극장에 붙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거예요. 당시 제가 인기배우였기 때문에 감독들이 저를 캐스팅하고는 싶은데 극장 개봉이 염려돼 저한테 국도극장 사장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존심을 버리고 새벽에 국도극장 사장 집에 찾아가 사과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나도 극장을 한번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극장을 소유한다는 게 영화인들에게는 하나의 큰 꿈이거든요. 내가 연기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가 상영된 공간이기 때문에 이 극장은 돈을 떠나서 애착이 많은 건물이지요.


명보제과를 운영해 성공하면서 지금의 재산을 이루는데 토대가 됐다고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빵을 팔았길래 극장까지 인수하게 된 건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명보극장을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빵집이 장사가 잘된 건 사실입니다.(웃음) 명보제과 수익 외에도 제가 배우생활로 돈을 착실히 모아왔고, 검소하게 산 덕도 있습니다. 명보제과를 운영한 집사람이 고생이 많았어요.


연극을 좋아하면서 어떻게 치과대에 진학하셨습니까?

사실 저는 연극을 좋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갈 생각을 안했어요. 근데 연극배우로 생활을 유지하기는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는 지방공연을 하기 위해 이동할 때 한겨울 트럭 세트 위에 배우들이 올라타고 이동을 했어요. 당시 저는 고등학생 때라 생활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없었는데 가족을 데리고 연극하는 선배들을 보니까 생활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자는 마음을 먹게 된 겁니다.



이번 큰 재산을 기부할 마음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팔순 때부터인가.. 인생을 뜻있게 마무리 지을 좋은 일에 대해서 오랜 시간 생각을 해왔습니다.


기부를 하는 데는 가족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드님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주셨다고 했는데 가족들에게 기부에 대한 생각을 말씀하셨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요?

우리 집사람은 저와 55년을 살면서 한 번도 제 뜻을 어겨본 적이 없이 열심히 내조한 사람입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나이입니다. 이렇게 아내가 일평생 열심히 내조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도 가능하겠느냐 생각을 하면서 항상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처음 이 얘기를 했더니 장한 일을 했다고 격려를 해줬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굉장히 속이 깊고 저한테 아주 효자입니다. 제 결심에 대해 적극 응원해줬습니다. 우리 딸은 ‘아버지 참 멋쟁이’라고 ‘참 잘 결심했다고’ 말해 줬습니다. 미국에 가있는 손주들한테 전부 전화가 왔는데 모두 할아버지 멋쟁이라고 야단이에요. 영화배우가 꿈인 손녀가 있는데 학업을 마치면 적극 지원해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다들 저와 같이 기뻐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이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 팔십 평생 이렇게 기자들을 모시고 기자회견을 처음 해보는 것 같은데 보람을 느끼고 굉장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실물로 보니까 너무 젊어보이셔서 나이가 믿기지 않는데요. ‘돈이 전부가 아니다’고 말씀하셨는데 후배 영화인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젊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신영균이 돈이 많긴 한데 자린고비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바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혹시 제대로 베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영화배우로서 정직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배우라는 게 인기 있을 때는 좋지만, 나이가 들고 인기가 없어지면 외로운 직업입니다. 우리 후배들이 자기가 하는 일 최선을 다하면서 노후도 잘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아주길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가 영화배우 신영균 씨의 인생을 뜻 깊게 정리하는 자리로 생각됩니다. 79년 김수용 감독의 <화조>가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나는 은퇴하지 않았고, 좋은 작품이 있다면 출연을 하겠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지금도 배우활동을 하고 싶은 욕망은 없는지요?

제가 치과의사, 영화배우, 정치를 했는데 그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뭘 하겠느냐 묻는다면 그래도 ‘난 영화배우 하겠다’고 분명히 얘기합니다. 지금도 죽기 전에 한 작품 정도는 꼭 남기고 싶어요. 오래전부터 시나리오를 고르고 있는데 나한테 맞는 게 없어요. 이와 관련지어서 앞으로 기부재산을 관리할 재단에 부탁 하나를 얘기하자면, 콘텐츠 만드는 데는 스토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스토리를 가진 인재를 발굴하는 노력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작품을 위한 영화스토리가 있으면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충분히 사례하겠습니다.(웃음)


1960년 <과부>로 30대에 늦깎이 데뷔를 했을 때 치과의사로도 활동하셨는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할 지 직업적인 갈등이나 고민은 없었습니까?

그때는 연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그런지 깊은 고민은 하지 않았어요. 근데 데뷔작 <과부>는 작품도 좋고 다 좋은데 머리를 깎으라고 주문을 하더라고요. 병원에서 일을 봐야 할 때인데 짧은 머리로 환자를 볼 수 있겠냐 싶어 고민을 했는데 결심을 하고 영화에 출연했지요. 이후로 영화에 출연하면서 1년 정도 치과를 병행했는데 시간이 모자라 예약환자만을 진료하고 나대신 진료할 의사를 따로 뒀는데 제게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치과 일을 그만두게 된 거죠.


1970년대부터 변하지 않는 부자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누구나 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소원하고 있는데 저는 영화배우를 하면서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노후를 생각하고 사업을 한 겁니다. 제주도의 신영영화박물관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배우활동을 못하게 되면 그곳에 조그마한 호텔이라도 짓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마련했고, 명보제과를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절대 무리를 안했습니다. 그때는 돈이 좀 있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말들이 많았어요. 근데 나는 치과대학 공부를 했지, 경영공부는 모르거든요. 내가 없이도 운영할 수 있는 안전한 걸로 하자는 생각에 무리한 모험은 피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빚을 안지고 산 사람입니다. 우리 후배들도 배우로서 부업을 하더라도 안전하게 무리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번도 실패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데 살아오면서 좌절감을 느낀 순간은 없으신가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저는 크게 모험을 안했기 때문에 크게 실패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 동료들이 생각나서 한 달에 한번씩 원로 영화인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면서 동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좋은 작품 있으면 꼭 출연하고 싶고요.(웃음)


영화에 같이 출연하시고픈 여배우 있으세요?

우선 작품을 보고 상대방을 골라야 겠죠.(웃음) 이왕 고르려면 젊고 예쁜 배우를 선택해야지 않겠어요? 하하.


부인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영화배우 신영균’하면 대한민국의 이름난 명배우신데 ‘혹시 외도는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으셨나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시네요. 남편이 치과의사를 그만두고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 제가 ‘나는 치과의사니까 결혼했지, 소위 말하는 딴따라 하고 결혼하라면 안한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절대 빗나간 그런 행동은 하지도 않겠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약속을 하시더라고요. 살면서 약속을 지키고 사셨기 때문에 저는 평생을 하늘처럼 모시고 살아왔습니다. 제가 염려하고 걱정할 일은 없었습니다.(웃음)


아드님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상속권자인 아들이 기부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면 이 일이 성사되기 어려웠을텐데...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기쁜 날이고요. 저는 다른 말씀보다도 고생해서 이룩하신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정을 내리신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저는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앞으로 이 재단을 열심히 운영하겠습니다. 이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일이고,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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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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