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소리꾼 장사익
소리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소리꾼 장사익
  • 김두호
  • 승인 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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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듣고 가세유. 버리고 채우고 그렇게 자연스레 가세유.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장사익은 ‘소리꾼’으로 부른다. 무대에서 자신이 발표한 노래나 흘러간 트로트를 열창하는 대중음악인이지만 가수로 부르지 않는다. 가수는 많아도 가요무대의 소리꾼은 한사람뿐이다. 소리꾼의 노래는 슬프다. 구성지고 애절하기보다 순박한 목청으로 이어지는 노랫말과 소리의 선율이 향수와 한의 여운을 가슴 안으로 저밀게 하는 탓이다.


소리꾼의 얼굴에는 골이 패이고 흰머리가 덮히고 있다. 그래도 1996년부터 2년에 한번씩 갖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2회 6천석의 티켓이 판매 초기에 동이 난다. 미치도록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지난 5집 발매기념 ‘사람이 그리워서’ 공연 때 그의 노래를 처음 라이브로 들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 세워 울었지..’


객석은 대부분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고단한 인생살이를 헤쳐 온 세대들이다. 그들의 고향은 찔레꽃이 피는 산골일지 모른다. 소리꾼은 옛날 살던 때 그대로 충청도 억양의 사투리로 수줍게 인사말을 하고 노래가 시작되면 공손한 자세로 몸을 낮추었다가 펴는 동작만 반복한다. 몸짓이 그토록 단조롭지만 온몸으로 소리를 토해내는 소리꾼의 열창은 밤에 우는 두견새의 피울음 같이 깊고 넓게 울린다.


그는 아주 평범한 서민으로 생겼다. 장터에서 마주치는 포목장수 같기도 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온 집안 아저씨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서울 도심의 가장 크고 화려한 홀을 가득 채운 객석을 해마다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올 한해 장사익은 미국,러시아, 중동, 일본등을 돌며 공연을 했다. 동포들은 장사익의 노래를 들으며 쌓인 향수병을 풀면서 두고 온 고향산천과 사람이 그리워 울었다. 서양물이 밴 자식들에게 잃어버린 모국의 정을 심어주었다고 고마워했다. 소리꾼의 그 신비한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어쩌다 소리꾼이 되어 사람들을 노래로 그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



‘소리꾼’이라는 말이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국악 쪽에 남아 있는 호칭이다. 1993년 전주대사습 공주농악과 이듬해 금산농악에서 장원, 한국방송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국악인으로 출발했지만 그때는 태평소를 불었고 지금은 대중음악인으로 활동하지 않는가?

모르겠다. 어정쩡하게 노랠 시작했는데 어느 때부터 그렇게들 부른다. 그러니 국악을 하시는 진짜 명창(소리꾼) 분들 만나면 부끄럽고 미안해 죽겠다. 시작부터 가수라고 내밀지는 않았으니 지금도 그냥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딱 좋겠다.


국악을 할 때도 연주 쪽이었고 그것으로 인정도 받고 성공을 한 셈인데 ‘소리꾼’으로 길을 바꾼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가?

한 열댓 번 직장과 직업을 바꾸며 살았다. 내 마지막 직장이 카센터였고 그곳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44살에 그동안 틈틈이 익혔던 태평소 연주자의 길로 나섰다. 그저 3년만 열심히 하면 밥 먹고 살 것 같아 시작했던 것이다. 상이야 열심히 하는 사람들 틈에 줄 서 있으면 받는 것이니 대단한 거 아니다.



그런데 사람 팔자라는 거, 운명이란 게 참 묘한 것이다. 국악 공연을 하고 뒷풀이를 하면 한잔 걸치고 손뼉을 반주삼아 신나게 소리판이 벌어진다. 내가 부르는 소리가 듣고 본 사람들을 통해 소문이 나면서 주위 사람들이 소리꾼으로 밀어 주었다.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가다가보니 저절로 그 길로 흘러 들어간 것이지 내가 만들고 애써 찾아낸 길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직장을 전전했으면 고생도 엄청 했을 것 같다.

한 세상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얻어 터지고 깨지고 넘어지고 하다가 제자리를 찾는 게 인생 아닌가. 나도 그렇게 살았다. 힘들어도 그게 내 팔자려니 생각하면 참을성도 저절로 생긴다. 세상 가는 길이 험한 길도 있고 허무할 때도 있고 편하고 살맛나고 꿈같을 때도 있다.

저기 우리집 마당에 봄에는 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피고 가을에는 서리발 맞으며 국화가 핀다. 국화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하늘로 고개를 쳐들고 비바람이 불어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다가 늦게 꽃을 피운다. 인생살이도 참고 가다가 보면 마구 휘둘리다가도 꽃이 필 때가 온다. 마흔 여섯에 노래를 시작했으니 나도 늦게 피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올 한해 매우 분주했던 것으로 안다. 여름 한달 동안 미국 뉴욕 시카고 워싱턴 로스엔젤리스 등 4개 도시에서 공연을 했고, 러시아, 중동, 일본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랬다. 참 바빴었다. 지금도 국내 지방도시 순회중이다. 30일 날 성남 아트센타에서 올해 일정이 끝난다. 그 중에서도 미국에서 공연할 때 뉴욕의 카네기홀과 인접한 보로드웨이의 뉴욕시티극장에서 공연을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그곳 극장의 운영 기술 스태프들에게 괄시를 많이 받았다. 세종문화회관 규모의 무용전용 극장인데 미국인 스태프들은 한국 음악인에 대해 흡사 아프리카 어디에서 온 3류 쇼집단으로 취급했다. 우리 스태프는 끼어들지도 못하게 했다. 공연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초과 벌금도 엄격하게 요구했다.



공연은 성황이었다. 2천7백석이 꽉들어 차고 공연의 열기가 식지 않아 공연시간도 엄청 오버됐다. 그런데 공연 실황을 지켜 본 극장 스태프들은 관객 반응과 분위기를 보고 태도가 달라졌다. 포스터에 나의 사인을 받아가며 극장에 기념으로 비치하겠다고 난리를 피웠고 공연 시간 초과 벌금 7천여 달러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극장 매니저는 나의 공연을 보면서 홀 분위기에 압도되어 전율을 느꼈다고 감탄했다. 끝없이 앵콜을 외치던 많은 동포들은 한 번에 향수병을 씻어냈다면서 좋아했고 특히 함께 온 아이들에게 모처럼 모국에 대한 정서와 애정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며 고마워했다. 일본에서 왔다는 한 재일동포 가족이 이번 공연을 통해 모국의 정체성을 발견했다며 감격해 하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로스엔젤리스에서도 40달러에서 120달러까지 하는 3천여석의 티켓이 모두 팔렸다. 마치 그 옛날 시골 장터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며 공연이 끝난 뒤에는 나를 만나기 위해 무대 뒤로 몰려왔다.



서울 세검정 삼거리에서 홍제동 가는 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홍지문이 있다. 다리를 건너 북한산 끝자락의 홍지동 산동네를 오르면 성벽이 붙어 있는 암벽 밑에 2층집이 있다. 뒷마당에는 감나무 계수나무 소나무 한그루씩과 조그마한 꽃밭이 있다. 담장에는 두 개의 솟대가 건너편 인왕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물 파이프를 이어 만든 솟대에는 주인이 너무 좋아해 달아 놓은 풍경이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쨍거렁거린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집 앞에서 손님을 맞은 장사익은 인터뷰 365를 위해 하루동안 시간을 비워 놓고 빈집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온갖 새들이 날아와 놀다가요. 여치소리 매미소리도 들리구요. 저 창밖으로 보이는 인왕산이 꼭 새가 날개를 펴고 우리 집으로 날아드는 형상이라 늘 힘을 주지요.” 주인은 날짐승을 위해 낮에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전망이 좋은 2층에서 주인이 차를 만들어주며 인터뷰를 하는 동안 산비둘기는 한동안 솟대 끝에 앉아 우리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 달라. 당신의 노래 속에서 이따금 ‘아하’하는 한숨소리를 들으면 당신의 한은 무엇일까 궁금해 진다.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돼지를 비롯해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 마음씨 좋은 분이었다. 장고를 잘 다루어 농악판 풍물판이 벌어지면 신명나게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 아버지는 7남매의 맞아들인 나를 끔직하게 아끼고 사랑했다. 내가 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광천역에 2시간 일찍 나오셔서 자전거를 받쳐 놓고 기다리셨다. 서울갈 때는 집에서 보따리를 자전거에 싣고 광천역까지 바래다주시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객지생활이 늘 빠듯해서 아버지 생전에 어화둥둥 한번 못해드려 가슴 아프다. 이제는 해드릴 수 있는데 안 계신다. 고향 역전만 가면 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려 눈시울이 붉어진다.


고향(충청남도 광천)에서 언제 떠났나? 자랄 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 조금 더 가면 비릿한 갯벌 냄새가 나는 곳인데 그곳에서 저녁하늘을 보면 세상이 온통 불바다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는 읍내로 가는 긴 둑방길이 있다. 그게 내 어릴 때의 눈으로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로 보였다. 고추 마늘 팔러 가는 길, 서울서 출세한 사람이 어깨를 흔들며 오가는 길,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떠나는 길, 세상 떠난 이들이 꽃상여 타고 너울너울 춤추며 가던 길...나도 언젠가는 저 길을 따라 화려한 도시로 갈거라는 꿈을 꾸며 자랐다.



내 고향을 나는 박경리씨의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와 똑같이 표현하고 싶다. 산 바다 물 노을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노래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내 몸에서 나오는 노래는 그래서 그 고향의 정서가 흠뻑 베여 있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선린상고를 다녔다.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67년부터 음악학원에 다니며 대중음악 공부도 3년쯤 했다. 덕분에 군복무는 문선대에서 했고 제대후 72년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 80년부터는 틈틈이 피리 단소 태평소 대금연주를 배웠다.


한때 대중음악을 공부를 했다면 소리꾼은 준비된 직업으로 볼 수 있는데 전혀 생각지 않다가 어쩌다 그 길로 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가수나 소리꾼은 정말 목표로 삼았거나 크게 기대했던 직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나는 웅변을 했는데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며 발성 연습을 많이 했다. 나중에 그게 목이 터지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정작 가수가 될 꿈은 없었다. 간혹 목이 좋아서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지만 막연한 꿈이었다. 나의 노래 소질을 발견하고 그것이 직업이 되도록 밀어 준 것은 내가 사는 길목마다 만난 좋은 친구며 선배들 덕분이다. 떠밀려서 간 곳이 지금 노래하는 곳이다.


국악을 알기 때문에 더 특이한 소리꾼이 된 것같다. 여기에 감동의 여운이 다른 가수와 다르다. 노래를 하는 당신의 특색은 스스로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아무리 새로운 음식을 먹어도 늘 먹던 전통 음식은 질리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 가락이나 노래는 된장 맛처럼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과 통하는 면이 넓다. 그리고 나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내 몸이 통째로 악기가 되지 않으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한 순간에 몸을 태우고 녹여야하는데 그 정점으로 가면 고통이 아니라 희열이 나온다. 몸이 떨리고 손발이 흔들리지만 워낙 자세를 반듯하게 하려고 애를 써 관객들은 잘 발견하지 못한다. 몸 안의 어느 한 부문이 따로 놀면 노래가 흩어진다. 그럼 관중은 졸거나 옆 사람과 잡담하며 소란해진다.

매사가 그렇듯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정성이 절대 필요하다. 겸손한 자세로 정성을 바치는 마음의 자세가 좋은 공연으로 이어진다. 친구와 어울릴 때도 좋은 친구와 진실한 얘기를 나누면 소주 한병에 소금으로 안주를 삼아 밤을 새워도 즐겁고 안 피곤하지만 성의없이 만나는 친구는 양주에 수라상을 받아도 금방 짜증나고 지쳐 버린다.


성공은 명예와 더불어 부(富)도 따른다. 재력을 묻는다면 결례인가?

자식 잘 키우고 장가들어 잘살고 건강한 아내가 남편일 뒷바라지 열심히 해주고 약간의 여유가 있으니 그걸로 행복하다.


세상은 늘 어수선하다. 그중에 세대 간의 갈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 걱정이다. 요즘 어른이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

칸막아 놓고 사료로 가축 키우듯이 자식을 키우는 세태가 큰 일이다. 무제한으로 자식을 낳던 시절은 순리적으로 자연스럽게 키워 인간다운 정서를 알며 자랐다. 지금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냥 공부만 잘하는 기계로 키운다.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

나는 하늘에서 쏟아질 듯이 무수하게 빛나는 은하수를 보며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자연과 우주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뭔지를 보고 느낄 정서도 메말라 가고 있다. 요즘 학교에서는 아이들 청소도 안시킨다니 기가 막히다. 아이방 청소도 엄마가 해주고 퇴근하는 아빠가 먼저 아이방을 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 시대라니 자녀 교육이 뒤죽박죽 엉망진창 같다. 오직 공부만 잘해서 국내든 해외든 명문대를 가야하는 것이 지상 목표라니 숨이 막히는 세상이다.

운동선수를 가르치는 코치의 최고 교육법은 ‘자연스럽게 공격하고 대응하라’이다. 편법은 어쩌다 활용하는 것이지 진리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키우는 데 있다고 본다. 지식보다 인격이 사람 사는 세상의 원천이다. 이러다가 뇌 속에 천재로 만드는 칩을 넣어 인간을 개조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밤에는 말똥말똥하고 낮에는 비실비실하는 아이들이 많다. 길을 가다가 보면 온통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아무리 인간 세상이 변해도 자연의 섭리는 안변한다. 자연스럽게 키우고 자라도록 했으면 좋겠다.



무대 위에선 소리의 친구로, 민족이 가진 한(恨)의 얼굴로 서있고, 무대를 내려와서는 나무와 새들의 친구로 사는 소리꾼 장사익. 그는 인터뷰 다음날 아주 오랜만에 고향 광천으로 내려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놈새끼 저놈새끼’ 하면서 마주칠 중학교 동창 망년 모임에 참석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장사익의 음악은 언제나 우리에게 휴식을 선물한다. 그의 소리는 처연하게 시작하지만 한번 터지면 급기야 가슴을 쑤시는 황홀이 된다.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만지는. 어느 날은 반쯤차고, 어느 날은 반쯤 비워줘도 반가운 그런 친구 말이다. 장사익을 만났다. 소리에 취하고, 사람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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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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