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뺏어간 천재의 선율, 지네트 느뵈
하늘이 뺏어간 천재의 선율, 지네트 느뵈
  • 소혁조
  • 승인 200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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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혁조의 인터미션


[인터뷰365 소혁조] 1949년 10월 27일. 파리에서 출발한 미국행 에어 프랑스기는 대서양 중부 아조레스 군도의 로돈타 산봉우리에 추락하였다. 비행기에 타고 있는 승객 48명 전원이 사망한 이 끔찍한 사고. 어찌 보면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 사고 중의 하나일 것 같은 이 비행기 추락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48명의 탑승객 중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프랑스 샹송의 대모인 에디트 피아프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미들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공연 중이던 피아프는 세르당이 보고 싶어 빨리 미국으로 올 것을 재촉하였고 세르당 역시 피아프를 한시라도 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배가 아닌 비행기를 선택하여 그만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이의 사망소식을 들은 피아프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자신 때문에 세르당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했고 한동안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삭발을 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슬픔을 가득 담은 노래를 불러 또 한 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바로 에디트 피아프의 가장 유명한 명곡인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이다.

탑승객 48명 전원의 목숨을 앗아간 1949년 10월 27일의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사망한 유명인은 마르셀 세르당뿐이 아니었다. 48명의 탑승객 중엔 20세기 전반기에 돌풍을 일으킨 한 젊은 여자 바이올리니스트와 그녀의 오빠도 함께 타고 있었다. 천재 중의 천재란 극찬을 아낌없이 받으며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것이라 주목 받았고 프랑스 바이올리니즘의 대를 이을 거장으로 평가 받던 여인. 불과 30세의 너무 짧은 생을 마감하고 그렇게 사라져 간 여인. 지네트 느뵈이다.

천재 소녀의 등장

느뵈는 1919년 프랑스 파리 출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타고 난 신동 중의 신동이라 전해지는데 7세에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 무대를 가질 정도였다. 9세엔 레오폴드벨랑 콩쿠르에 입상, 가스통 풀레의 지휘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였으니 이미 10세 이전에 그녀는 신동을 넘어 천재, 거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11세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8개월만에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이듬해 빈 콩쿨에 출전하였다. 콩쿨에 출전하여 입상하진 못했으나 이듬해엔 칼 플레슈 콩쿨로도 유명한 칼 플레슈가 스승이 되길 자청하여 그의 문하가 되기에 이른다.


느뵈의 명성을 전 세계적으로 떨친 결정적인 사건은 16세에 출전한 비에니아프스키 콩쿨이었다. 이 콩쿨에 출전한 느뵈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등을 차지한 것이다.


1등? 어지간히 유명한 사람치고 1등 한 번 못해본 사람도 있나? 라며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느뵈의 뒤를 이어 2등을 차지한 사람이 누군지 알면 그런 생각이 싹 가시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구 소련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반세기를 호령했던 바로 그 오이스트라흐였다. 당시 느뵈보다 11살이 많았던 오이스트라흐는 러시아 바이올리니즘의 대를 이을 최고 유망주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이 콩쿨에 출전하였으나 천재소녀에게 밀려 그만 2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이 콩쿨은 입상자들의 화려한 면면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1위와 2위는 느뵈와 오이스트라흐이고 실력은 빼어났으나 너무 나이가 어려 특별상을 수상한 꼬마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다 헨델.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세계 바이올린의 대모,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이다 헨델은 악보도 잘 볼 줄 몰랐다는데 그런 소녀가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어려운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재주란 말 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신이 질투한 재능

16세의 어린 나이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누르고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한 느뵈는 그때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7세의 이른 나이에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또래들은 한창 학교에서 연습하고 있을 그 시간에 그녀는 벌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2차 대전으로 연주여행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46년부터는 다시 연주여행을 재개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미국과 유럽의 각국을 돌아다녔고 호주에까지도 그녀의 명성을 알렸다.


그리고 1949년 10월 20일. 프랑스에서 연주를 마친 그녀는 일주일 후인 10월 27일에 피아노 반주자인 오빠 장 느뵈와 함께 미국으로 가던 도중 불의의 사고로 그만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그때의 나이 겨우 서른. 그녀가 살았던 30년의 세월만큼만 더 살았어도 전 세계의 바이올린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만한 천재 중의 천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고 말았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그녀는 그녀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자신의 분신인 명기(名器) 스트라디바리의 가방만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분신과 함께 하고 싶었으나 바이올린은 어디론가 사라지도 빈 가방만을 품에 안고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더 슬픈 이야기는 그녀의 오빠 장 느뵈이다. 지네트 느뵈의 시신은 그 자리에서 수습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지만 오빠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못했다.


느뵈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을 들은 프랑스 바이올린의 대부인 자크 티보는 깊은 실의에 잠겼다. 느뵈를 친딸처럼 사랑했던 그는 이왕 죽을 바엔 자신도 느뵈처럼 비행기 사고로 죽고 싶다고 했다는데 훗날 정말로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이 또한 생각해보면 꽤 오싹한 이야기다.


짧고 강렬했던 삶을 살았던 느뵈는 아마도 자신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마무리 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지네트 느뵈가 삶의 마지막 공연인 미국공연을 떠나기 전에 남겼던 글이 있다. 아마 그녀는, 어쩌면 그녀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의 내용이 너무도 섬칫하다.


“직업적 고독 없이는 위대한 일이란 아무것도 이룩할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위대함은 아마도 눈부시게 빛나는 고독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이따금 소심해진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이 내부에 지니고 있는 생명과 이상에 따라 받아들여야 하는 숭고한 존재이다. 우리가 지상에 머물고 있는 이 슬픈 체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 커다란 고난의 시기에 불과하다.”


한창 출세가도를 달릴 30세의 여인이 남길만한 글은 결코 아니다. 무엇 때문일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녀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찬란하게 빛나게 보였던 그녀 스스로의 삶에 깊은 회의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느뵈가 남긴 음악

느뵈는 서른 살의 짧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기에 남긴 음반수가 많지 않다. 본격적으로 음반 레코딩을 한 것이 그녀의 나이 19세 때부터였으니 불과 11년 동안 녹음한 것들이 전부이다. 하지만 난곡 중의 난곡이라 불리는 여러 바이올린 협주곡을 즐겨 연주했고 녹음했는데 그녀가 남긴 음반들은 그녀가 사망한지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도 극찬을 받는 명반 중의 명반으로 기억된다.


그녀가 가장 즐겨 연주한 레퍼토리를 딱 하나만 꼽는다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중 최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 어려운 곡을 3년간 네 번씩이나 녹음할 정도로 좋아했고 그녀가 남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레오니드 코간 등의 음반과 함께 이 곡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반드시 찾는 필수 음반 중의 하나이다. 풍부한 감성과 때론 격렬함이 함께 느껴지는 최고의 명연으로 꼽을 수 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또 하나의 명반을 꼽을 수 있다면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대단히 날카롭고 예민한 감성이 요구되는 이 어려운 곡을 느뵈는 거침없이 연주해내고 있으며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그녀가 남긴 최고의 명반으로 지금도 손꼽히고 있다.


그 외에 프랑스 출신 작곡가인 모리스 라벨의 치간느를 들 수 있다. 이 곡 역시 바이올린의 온갖 잡다한 테크닉이 총동원되는 난곡 중의 난곡인데 느뵈는 이 곡을 가장 잘 연주하는 연주자로 손꼽힌다. 16세에 비에니아프스키 콩쿨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할 때 준비했던 곡이 바로 라벨의 치간느였다. 그리고 역시 같은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인 쇼숑의 시곡도 그녀가 즐겨 연주한 레퍼토리였다.



바이올린 협주곡 외 실내악 쪽의 음반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쇼팽의 야상곡이랄지 글룩의 멜로디,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 등은 꼭 한 번은 들어봐야 할 명연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남성 연주자보다 더 힘이 넘치는 대단히 중성적인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요절한 천재를 보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하나는 안타까움이다. 요절한 천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안타까움만을 남긴 채 떠났다. 만일 그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는 그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한가지 드는 생각은 하늘이 주신 비범한 능력이 쇠했을 때 훗날 천재가 아닌 범인(凡人)으로, 망가진 천재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느끼는 다른 차원의 아쉬움에 대한 반대급부이다. 즉, 저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일 바에는 차라리 요절한 쪽이 낫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느뵈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계 바이올린의 역사를 다시 쓸 엄청난 거장으로 성장했을 것이라 평한다. 그만큼 그녀의 위력을 대단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에 대한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녀의 요절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그런 연주자들 중 하나로 남았을 정도로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론 지네트 느뵈라는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세상을 뒤흔들 엄청난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녀의 너무도 이른 죽음이 더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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