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 송강호 발굴한 연극계의 대부 김석만 서울시극단단장
명배우 송강호 발굴한 연극계의 대부 김석만 서울시극단단장
  • 서영석
  • 승인 201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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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태우 대통령도 연우무대의 관객이었다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 교수이면서 서울시극단을 이끌고 있는 연극계의 리더 김석만 단장을 만난 곳은 대학병원 마당에서도 벚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대학로 ‘학림다방’에서였다. 늦은 오후의 다방 안 풍경은 시대를 거꾸로 거스르는 느낌이 실내에 자욱했다. 대학로의 뒷편에 남아 있는 묵은 찻집의 무거운 공기가 조금은 촌스럽지만 오히려 70년대 풍의 고전적인 낭만이 다정하게 찻잔과 함께 다가왔다.

 

1958년에 문을 열어 시대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고 커피 향을 뿜어내는 찻집에서 아직도 ‘직직’거리는 LP판이 들려주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을 들어가며 대학로의 꿈나무 중 한사람이었던 그 때 그 사람 김석만 단장을 만났다. 극단 연우무대를 통해 우리 연극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연극인이다. 부모님의 고향이 이북이라 실향민 가족이고 연극공부를 미국에서 했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서울토박이이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시절부터 젊음의 패기를 연극에 쏟아 붓기 시작해 평생을 연극과 더불어 산 그에게 연극의 메카 같은 대학로는 그의 고향 같은 곳이다.

 

 

연극에 입문하신 동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시지요.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에 입학하면 잠시는 방황을 하게 마련이지요. 지루하고 고통스런 입시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10여년 머리를 싸맸다가 재수까지 거친 후 진학하고 풀어지는 해방감에 자신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을 때, 뭔가 새롭고 접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있었지요. 아마 모험심이랄까? 그렇게 연극부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돌이켜 보면 내 스스로가 오히려 가당치 않은 도전을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 길이 내 적성에 맞는 것인지도 확인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자신 있다는 가소로운 행동으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을 때라 부모님이 반대하셨어도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으셨으니 편하게 연극을 할 수 있었지요.

 

국내 대학에서는 연극을 전공학과로 선택 않으셨지요?

미국에서 전공을 했지요. 군대 복무시절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조기 전역을 하고 미국으로 대학을 옮겨 본격적으로 연극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연극 공부를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들은 없습니까?

과거 한국에서는 연극 관련 이론이나 학술적인 자료가 없어서 학문으로 접하기가 어려웠어요. 서적도 전무하다시피 했어요. 대학에 연극과목도 없고 그러다보니 번역서나 원서 역시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가 어려웠어요.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방법을 해외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어요.

 

 

 

 

미국에서는 얼마나 있었는지요?

1974년 미국으로 가서 83년 귀국 했으니 거의 10년을 지냈어요.

 

미국에서 연극 공부를 시작하시면서 겪었던 이야기나 졸업 후 연극 활동 중에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세요.

초기에는 무엇보다 언어적 문제가 어려워 고생을 했지요. 일주일에 최소한 2편 이상의 희곡을, 심한 경우에는 과목당 2편을 읽고 독해를 해야 했는데 미국친구들을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연극 연습에 희곡 독해 공부를 동시에 해야 했어요.

장학금을 받았지만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해 새벽 2시 전에 이불 속으로 들어가 본적이 없었어요. 당시의 미국인 사회에서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별 볼이 없었어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고작 전쟁을 겪었던 나라, 후진국의 상징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요.

그들과의 사고의 차이,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어요. 미국은 인권문제로 한인들은 물론 흑인들의 이민 쿼터가 늘어 인종전시장으로 변하는 시기였지요. 아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다문화사회의 갈등이 당시 미국의 현실이었어요. 이러한 고충들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되었지요. 결국 1993년 다민족간의 갈등이 폭동으로 점철되어 그 유명한 ‘LA 폭동’이 발생되지요.

한인사회와 흑인사회의 갈등으로 비쳐졌지만 결국 피해는 한인들의 몫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한 나라의 경제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는 와중에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값싼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어요. 한인 희생자들의 아픔을 대변하기 위해, 또 다인종사회에서의 어려움을 <민들레 아리랑>이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2주간 공연을 했어요. ‘극단 민예’ 출신의 원로 극작가 장소현 선생님이 글을 써주셨지요. 지금 한국도 다인종, 다문화가 혼재되어 자유스럽지 못한 상황입니다. 재벌들의 편의에 따른 값싼 노동자 유입이라는 비판적 시각과 세계화라는 슬로건 사이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양산하는 현실에서 미국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한다는 지적에 무게감이 느껴짐은 경험자로서의 아픔입니다.

 

귀국 후 바로 연극을 하셨나요?

일단 생활을 위해 대학에 출강하면서 극단 연우무대에 참가를 했지만 당시 본업은 번역이었지요. 방송 드라마 등을 번역했어요. KBS 방송국에서 당시 유행했던 거의 모든 드라마를 번역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주말의 명화 등을 포함해서 500여 편의 번역을 했으니까요.

 

어떤 작품들인가요?

올드 팬들의 뇌리에는 아직 잔상이 남아 있을 정도를 꼽는다면 <미녀 삼총사>, <하이웨이 페트롤>, 등을 꼽을 수 있겠네요.

 

당시는 방송 역시 이데올로기가 한창 극성을 부릴 시기였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지금의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이해를 못할 상황들의 연속이었지요. 방송국 내에 심의가 있어 제목부터 새로 만들어야 하는 고충이 허다했어요. 조금이라도 과격하거나 혁명의 뉘앙스가 담겨있으면 방송 불가 판정이 내려졌으니까요.

 

연극인으로서 희곡 번역들도 많았을 텐데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연우무대는 창작극만 했던 극단이라 번역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희곡의 번역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아이러니하게도 희곡 번역은 한 편도 없습니다.

 

‘연우무대’라면 한 때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던 대표적인 극단이었지요?

국가적으로 한창 경제에만 관심이 쏠려 있던 시절이어서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은 그야말로 후진국 수준이었지요. 유독 가난한 연극풍토였지만 그래도 연우무대는 자체 소극장을 운영할 정도로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시대와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연우무대의 무대만을 고집할 수 있었습니다. 자체 소극장이 있었기에 장기공연이나 배우수업, 앙상블 등이 가능했기에 우수한 공연들을 할 수 있었지요.

<한씨 연대기>, <칠수와 만수>, <변방의 우짖는 새> 등 주옥같은 레퍼토리들이 그 당시의 연우의 작품이었습니다. 또 연우무대는 배우들을 비롯하여 재원들이 풍부하여 희곡의 텍스트를 자체생산 할 수 있었지요. ‘시’나 ‘소설’을 각색하여 시대정신을 고발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고정관객들 확보에도 유리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연우무대의 전성기는 언제인가요?

아마 1985년에서 90년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상우, 김광림, 김민기를 비롯 문성근, 양희경, 강신일, 송강호 같은 배우들이 당시 연우의 무대를 빛냈지요. 그 이후로 연우무대 출신들이 한국의 연극과 영화배우를 공급하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당시 고정관객을 많이 확보했던 터라 공연 시 연일 매진되는 기쁨, 좁은 객석에 더 많은 관객을 모시기 위해, “좌우로 밀착, 죄송합니다. 좌우로 조금씩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희열은 뭐라 포현하기 힘든 최고의 기쁨이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지요. 작금의 대학로는 흥행을 위한 기획사 위주의 상업적 공연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순수연극이 도태되는 아픔을 양산하고 있어요. 우리 연우무대 역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30년의 동인제 노-하우가 소멸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당시 인기 스타들이 모여들었던 연극무대를 이끌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사회문제를 소재로 한 의식 있는 공연들이 레퍼토리로 자리 잡자 여야를 망라한 정치인들의 관람이 줄을 이었어요. 김대중 노태우 진의종 등 정치인들도 엄청 많았지요. 또 극단 연우의 공연을 보고 공연계로 투신한 젊은 피들도 많았어요. 한 시대를 호흡하는 공연을 통해 정치권과 시민들의 간격을 좁히는 가교 역할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로 활동 중인 송강호씨가 오디션을 통해 막 극단에 입단해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지요. 91년 부산에서 올라온 그는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극장에서 숙식을 해결했지요. 최고의 배우가 될 줄 알았으면 더 좋은 숙소를 제공했을 텐데.(웃음) 하지만 당시의 아픔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지 않았나 생각도 해 봅니다.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이미 싹을 보였다할까요? 특히 연기에 대한 몰입이나 독특한 연기적 해석은 상식적 접근에서 벗어난 그만의 장기였다고도 할 수 있고요.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오시면서 극단의 진로와 관련해 많은 변화를 시도하셨지요?

당연히 해야 하고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겠지요. 어느 국가든 경쟁력의 우선으로 문화정책을 꼽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절대 명제에 휘둘려 너무 문화예술의 창작정신에 소홀했다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물론 생계가 국가나 개인의 최우선임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경제라는 거대한 몸통에 눌려 문화예술 방면은 아직 후진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아니, 지금이 적기가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전국의 유수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엄청 생겼습니다. 대학원 역시 마찬가집니다. 좋은 교수님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우수한 인재들이 우리 연극계를 비롯 문화예술계에 거름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면 우리의 앞날은 훨씬 밝고 번창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서울시극단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금이 문화예술에 대한 확실한 기초를 다질 기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혹자들은 어마어마한 공연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 상황에서 무슨 기초 타령이냐 힐난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국공립 극단의 위치에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서울시극단이 벌써 1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정체성조차 확립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습니다.

 

서울시극단의 운영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시지요.

우선 ‘서울 +기억’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아까 잠시 언급했다시피 지금의 세대들은 과거의 어두웠던 암흑의 시기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학림다방) 역시 과거가 조금은 남아있는 공간이기에 정했습니다. 지금 한국연극의 메카라는 대학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과거 동인제 시스템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80년 중반부터 들어온 상업자본에 의한 흥행위주의 공연 일색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슨 순수예술을 논할 수 있겠어요? 극단이나 연극인 역시 생활인으로 생계를 외면해서는 안되겠지만 너무 천편일률로 흘러가는 자본시장에 대한 경고가 없다는 우려겠지요. 제가 구상하고 있는 공립극단, 서울시립극단은 대학로와의 차별화입니다. 그래도 국공립은 흥행에서의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창작포럼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지난 날 서울의 기억들에 대한 세미나 및 특강들을 통해 우리시대 연극의 시대정신을 살리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의 노력의 결실로 금년 4월에 막을 올리는 <7인의 기억>과 <순우삼촌>이 그 첫 번째 시도입니다. 열심히 준비했기에 자신감도 있지만 처음 시도라는 점에서 부담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7인의 기억>이 연극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군요.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큰 사건도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파장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작품은 70년대 우리 암흑의 역사에서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제가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오면서 특히 강조했던 ‘서울 +기억’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시극단이 주관하는 창작포럼에 대해서도 연극계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우선 시대성에 의한 반항이라고 할까요? 기획사 위주의 공연에서는 작가나 연출가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훌륭한 순수연극의 탄생은 기대하기 어렵고요. 이러한 제반적 상황에 대한 돌파와 개혁의 시도로 창작포럼을 준비했어요. 시대정신이 담긴 목소리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진정한 이 시대의 아픔과 정신을 작품을 통해 표출하고자 함이 그 목적이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소재의 설정부터 작품의 탄생에 많은 시간과 노력,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수적이었어요, 그 첫 탄생이 <7인의 기억>으로 막을 올립니다.

 

 

 

 

교수로 연극인으로 많은 작품에 참여를 하면서 우리 연극현실에 가장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또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연극예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지원정책은 한마디로 ‘뷔페잔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한 번에 진귀하고 기름진 음식을 잘 먹고는 그 후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지원은 노후된 주방을 개선하여 오랜 시간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신선한 요리재료, 식자재 유통, 식단개발 등 지속적인 요리 준비가 가능하도록 환경적 지원이 급선무임에도 말입니다. 이건 제 경우에 국한된 견해이겠습니다만 과정은 무시되고 성과와 결과만 강조하는 풍토가 아쉽습니다. 예술은 당대와 미래에 대한 투자로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이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성과에 연연해 큰 그림을 놓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그래도 우리가 문화예술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조그만 그릇들은 예술가들의 실험정신의 실패가 가져다 준 성과가 아닌가 자위해 봅니다. 창조적 실패를 격려해줄 수 있는 풍토 조성이 아쉽다고나 할까요?

 

순수연극인으로 가져야 할 올바른 연극관이 있다면 어떻게 정의하실 건가요?

연극은 재미있어야 합니다. 당대 관객들과의 호흡을 통하여 그들의 꿈과 기쁨, 희로애락을 현재의 사회성과 얼버무려 무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성과의 연계도 필연이겠고요. 이런 맥락에서 남북관계 회복에도 예술적 사회성의 일환으로 당연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는 과거와의 단절을 획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예술의 경우는 달라야합니다. 감춰지고 숨겨졌던 과거(특히 아픈 과거)를 발췌하여 과거를 현재에 비추고 확인함이 필연적 사명이라 할 수 있겠죠.

 

자식들이 연극을 하겠다면?

인생이 자신의 의지대로 재단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습니까? 자식들 문제는 자신들에게 맡기는 스타일입니다. 딸만 둘이 있는데 아직 학생들입니다. 연극을 하던 무엇을 하던 자신들의 몫이라 관여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부모로서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 다중문화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주었어요. 부모의 역할은 3가지라고 봅니다. 첫째, 세상에 잘 나오게 하는 것. 둘째, 안전하고 가치 있는 인물로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키워주는 것. 셋째, 세상에 잘 내보내는 것. 다음은 그들의 삶이 아닐까요?

 

공공예술단들이 요즘 앞 다투어 추진하는 법인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대적 흐름이라 봅니다. 모든 공공예술단이 법인화의 바람이 부는데 장, 단점이 있겠지만 일단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을 포함해 지나 온 삶에서 가장 기뻤을 때와 슬펐거나 안타까운 순간이나 사건이 있었다면?

먼저 가슴 아픈 일들은 공연이 실패했을 경우죠. 어떤 이유든 텅 빈 객석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슬프죠. 월드컵, 올림픽 등 국제적 행사가 있을 때, 날씨가 너무 춥다거나 비가 온다거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작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관객이 외면하거나 발길을 돌릴 때 역시 억장이 무너집니다. 기쁜 일은 물론 관객이 알아줄 때가 최고의 희열을 맛봅니다. 또, 이건 너무 개인적이겠지만 1989년 사전검열제가 폐지되었을 때의 기쁨도 너무 기뻤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티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공무원이 검열한다는 자체가 민주국가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해괴한 짓거리거든요. 저 자신이 사전검열의 피해자이었기에 기쁨이 배가 되었는지도 모르구요. 연극공연이라는 것이 검열대본과 공연대본의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이런 일련의 검열들은 예술 자체를 모독하는 무지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의 속셈은 마음에 들지 않는 공연은 언제든 법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두었던 거죠. 악법도 그런 악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1984년 연출한 작품, <한씨 연대기>를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대본검열에 걸려 공연은 물론 ‘6개월 정지’라는 청천벽력을 맞았거든요.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연극을 해야 하는가라는 강한 회의가 들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사전검열이 폐지된다는 소식이 제게는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국회공청회에 참석하여 직접 제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고요. 그때 검열을 담당했던 분들이 지금 혹시 연극이나 기타 예술관련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는지, 있으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과거를 위장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한 구상이 있다면?

현재 대학로를 비롯 연극인들의 근시안적 현실이 안타까워요. 기억에 대한 단절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자 미래의 포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예술은 기억의 상자를 열어야 합니다. 당대에서 정리해야 할 사안들은 절대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시각의 혼돈을 초래할 과오를 저지를 수 있지요. 현재가 건강하려면 과거의 부끄러움도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아픈 상처를 들여다보는 혜안, 그 자체로 보고 과거를 다루는 예술이 필요합니다. 다른 시각을 가지고 보는 색안경은 예술의 다양한 기능을 축소할 독소를 지니고 있지요. 과거, 현재, 미래는 따로 떨어진 이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연속성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서울시극단 단장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석만 단장. 그는 연극의 오늘을 얘기하면서도 끊임없이 과거의 사건들을 떠올린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과거의 아픈 상처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것이 햇빛을 받아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곪은 상처 그대로의 냄새를 진동시킬지 그 누구도 알지 못 한다면서. 지금 그가 준비하는 작업들도 실험으로 시작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 궁금하지만 그의 열정만은 한국 연극계 희망의 불씨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삶의 기쁨과 슬픔 모두를 연극과 더불어 엮어 온 그는 진정한 우리 연극계의 리더이며 현역 연극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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