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산타의 크리스마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산타의 크리스마스
  • 김우성
  • 승인 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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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합니다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크리스마스로 거리가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크리스마스 하면 모든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오늘밤 아이들은 선물을 가득 실었을 루돌프 썰매를 기다리며 잠자리에 들 것이다. 국제산타클로스협회 한국지부(이하 산타클로스협회) 남철희 회장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향하던 날 강원도 정선에서는 마침 산타클로스협회가 주관하는 2007 대한민국 산타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산타클로스협회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국제산타클로스협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박애정신을 널리 알리고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단체로써 터키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서기 275년 비잔틴 시대의 에게해 지방에 산타 할아버지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게 지금의 터키이지요. 산타 할아버지의 무덤도 있습니다. 그러한 연유 이외에도 아시다시피 터키는 이슬람 문화권이지 않습니까.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자는 취지에서도 그곳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습니다. 원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는 세계의 사랑과 평화입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서로 싸우지 말고 사랑하며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던 것이 지금은 대단히 상업적으로 변질이 되어있습니다. 선물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무조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노래에도 있지 않습니까. 산타할아버지는 착한 일을 한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저 어릴 적만 해도 12월이 되면 선물을 받고 싶어서 동네 골목 한 번이라도 더 쓸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물을 줄 땐 동기가 있어야 하는 거죠. 산타할아버지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본래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으로 되돌려 놓자는 것이 국제산타클로스협회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산타 할아버지라 하면 썰매를 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선물을 나눠주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지금까지 ‘산타하면 선물’이라는 등식이었지요. 저희 역시 사회복지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다 보니 ‘왜 우리에게는 찾아오지 않느냐’, ‘어떤 기준으로 찾아가느냐’ 등의 아쉬움들을 전해 오셔서 이제는 자제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필요한 곳에 산타 할아버지 복장과 장구 등을 지원해 드리고 있으며 소외된 이웃이 참여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강원도 정선에서는 2007 대한민국 산타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들을 초청하여 함께하는 문화행사인데요. 산타할아버지가 밝은 이미지이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기보다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밝은 곳으로 이끌자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입니다. 내년부터는 12월뿐만 아니라 어린이날과 여름시즌, 가을시즌 등 1년에 4번 개최하여 선행한 사람들도 발굴하고 산타 할아버지의 정신을 되새기며 연중 내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행사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단체의 성격상 산타 할아버지들은 자원해서 오시는 분들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매년 10월 경 자원봉사하실 분들을 모집 하면 각 분야별로 뜻있는 분들께서 모이십니다. 기술파트를 위해 고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비를 들여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산타 축제에 참여하고 계신 50 여분의 산타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사실 자원봉사라는 게 하는 사람만 합니다. 해본 사람만 한다는 거죠. 일반인들께서는 생각은 있으셔도 어렵게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생업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보통 대여섯 군데를 돕고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저희 산타협회만을 위해서 전력을 쏟아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부분이 협회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어려운 점이 아닐까 합니다. 고아원, 소년의집, 양로원 등 부지런히 찾아뵙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지만 자원봉사자 분들의 도움 없이는 운영 자체가 힘든 상황이다 보니 행사의 연속성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홈페이지 관리를 담당해주시던 자원봉사자 분이 그만 두시면 당장에 홈페이지를 관리할 메뉴 소스를 못 찾아서 수정을 못하기도 하니까요. 하하.



이렇게 좋은 취지로 운영되는데도 후원하려는 곳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순수하지 못하게 이용될 뻔 했던 적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구체적으로 기사화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현재 한 인터넷 포털 측에서 마련해준 공식 블로그를 통해서 작은 정성들이 모이고 있다며 뜻있는 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산타클로스의 정신을 알리셔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증오와 미움만 있고 사랑이 없습니다. 남을 이겨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쟁 위주의 교육 시스템에서 남에게 베푸는 사랑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정치는 어떻습니까. 정책은 없고 욕설만 오고 갑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환경적 요인과 무관치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상태에서 국토는 작고 인구는 많아 해외로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가 안에서 소모되고 있습니다. 언론은 선악을 구분 지으며 이를 더욱 부추기려 합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입니까. 자신만의 기준일 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종교와 이념과 종족이 다르다고 전쟁을 벌이고 학살을 자행합니다. 산타할아버지의 정신을 받들어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을 베풀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자는 거죠. 그러기에 산타협회는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를 임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산타클로스 협회에 몸담게 되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는지요.

어릴 적 꿈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고아원을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제 고향이 대구인데 당시 대구는 6.25 이후 미군부대와 고아원이 엄청나게 많았었죠. 그 때 제 또래의 아이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고교에 진학해서도 봉사활동 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던 전력이 문제가 되어 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제제가 따랐습니다. 직장에도 취직할 수 없음은 물론 이사할 때도 신고를 해야 하는 등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해외로 출국도 할 수 없었죠. 사업을 하려고 해도 해외로 나가질 못하니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정권 말기 즈음 제제가 풀려 사업관계상 여러 나라를 다니게 되면서 국제산타클로스협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거죠. 먼 길을 돌아온 셈입니다.


학생운동이요?

평범한 시민으로서 불의를 보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도 돕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개혁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이죠. 지금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정말 목숨 걸고 했습니다. 주변에 사형 선고 받거나 실제 사형 당하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저는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71년 10월 15일 위수령이 떨어져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장, 단과대회장, 동아리회장 등 주요 간부들이 모두 끌려들어갔습니다. 그들을 잡아 들여야 학원가에서 반발이 없겠다 판단한 거죠. 그렇게 끌려간 친구들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그 해 12월 20일경 모두 최전방으로 징집되었습니다. 1개 중대 한명씩 GP에 배치하여 처음엔 휴가도 안보내고 편지도 할 수 없었죠. 사단장은 연병장에 사열해 있는 병사들 앞에서 ‘학생운동 하는 놈들 다 사형시켜야 한다’ 하고 혹시나 지뢰라도 밟게 해서 죽이지는 않을까 어찌나 겁이 나던지. 하하. 집에서는 아무 소식도 모르고 기다리시는 거지. 줄기차게 써 보냈던 편지가 후에 내가 휴가 나와 있으니까 한꺼번에 도착을 하더라고요. 내용물도 막 바뀌어 있고. 부모님은 나 때문에 사업하시는데 불이익도 많이 받으셨죠.




위수령이란 당시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질서 및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대통령령을 말한다. 남철희 회장은 1971년 유신반대 학생운동을 벌이다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의 모임 ‘71동지회’ 회원이다. 71동지회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회 각계의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포진되어 있어 처음 모임이 결성될 당시 정당을 조직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개 섞인 말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상 등이 많이 이루어졌는데요.

보상을 받으려면 그 당시 병원 기록을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아직도 귀에서 쇳소리가 들리거든요. 한동안 무기력증도 오고, 화병 비슷한 것도 났던 거고. 병원에 가보니 30년 이상 지난 기록은 폐기하고 없다고 하고. 그러면 당시 당사자들로부터 인증 비슷한 걸 받으면 가능하다는데 그러면 됐다고 했어요. 명예회복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까지 해서 보상 받으려는 생각 없다고 말이죠. 위수령 당시 구치소 기록은 남아 있었거든요. 그건 이제 없어졌어요.


시대가 많이 바뀌어 가는 모습들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 잘 된 사람들은 잘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병원을 끼고 사는 사람들도 많고요. 정치를 하시는 분들도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계심은 분명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도 타협이라고 보여 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여를 안 했습니다. 올곧은 사람들, 쓴소리 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도 절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들 눈에는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특별히 좋을 것이 없습니다. 좋은 것도 있을 것이지만 안 좋은 건 그대로 따라가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들이 국내기업 멕시코 법인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경험 좀 쌓고 돌아오라니까 싫다는 겁니다. 어찌나 서운하던지요. 부모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근데 그 때 느꼈어요. 예전에 정권을 비판하고 싸우던 내가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내 아들이 안 오겠다는 나라를 만든 나 역시 역사의 죄인이 되었구나 하고 말이죠.



산타클로스 협회장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아직도 우리 사회 그늘진 곳에는 소외된 이웃이 많습니다. 나라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따뜻한 손길이 미치지 않는 어려운 사람들은 계속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물질적 도움이 아닙니다. 밝은 곳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랑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 태안 원유 유출 사고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이웃을 위한 위대한 사랑을 믿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역량으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사랑을 전 세계에 전하고 싶습니다.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기대합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 지지하는 후보가 달랐다. 자신들의 후보가 아니라면 나라의 미래가 없다며 서로를 편 가르고 싸우던 우리들을 향해 남철희 회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아무런 증오나 적개심도 남아 있지 않은 채 오로지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그의 미소는 다름 아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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