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지고 농사짓고 호롱불 켜고 사는 서예가 육잠스님
지게 지고 농사짓고 호롱불 켜고 사는 서예가 육잠스님
  • 김두호
  • 승인 201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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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는 불가능한 말이고 넘치지 않게 살아야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 사진 홍진식] 경남 거창군 수도산 자락 작은 산동네에 자리잡은 풍외암(風外庵) 토굴에 세속의 문화예술계와 소통하지 않고 참선과 더불어 30여년을 서예와 선화(禪畵)에 정진해온 육잠(六岑) 스님이 산다.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 다고 해서 ‘지게도인’으로도 불리는 스님은 산중에 암자를 마련하면서부터 20년이 넘도록 전깃불을 비롯한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아직도 반(反) 문명인으로 살고 있다.


해발 850m 산골에 있는 풍외암은 거창읍에서 버스와 도보로 한 시간 길이다. 육잠 스님의 풍외암에는 모시고 있는 부처님까지 작은 석불(石佛)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질적인 가치를 느끼게 하는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지붕이 기와지만 방과 마루 부엌까지 3칸 좁은 공간에는 묵향(墨香)이 밴 책과 수십 년을 두고 쓴 서예작품들만 벽을 덮고 있다. 장작더미 앞에 지게 두 개와 마당 한 쪽에 농기구가 가지런히 걸려있는 바깥 풍경도 소박하면서 어디서나 청결감을 느끼게 하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 것도 아닌 물건들은 아주 깔끔하게 제자리를 차지해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만든다. 방안의 정돈된 붓걸이에서 심지어 재래식 해우소(화장실)도 ‘解憂所’ 뜻 그대로 번뇌가 사라지는 곳으로 느껴져 발자국을 남기기가 민망해진다. 풍외암은 보이는 모두가 정갈하고 청빈한, 그래서 무소유의 또다른 모습임을 떠올리는 절간이다.




스님은 3년 전 대구에 있는 봉산문화회관에서 ‘육잠스님 생명불식전'(生命不息展)을 가진 적이 있다. ‘살아 있는 것의 멈추지 않음’이라는 말을 깊이 사모하며 살아왔다는 그는 “지극하면 도(道) 아닌게 어디 있으랴, 그동안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여가에 가끔씩 즐겼던 졸묵(拙墨)을 세상에 처음 내놓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풍외암 생활의 단면을 고백했다.

<내 사는 곳은 산이 깊어 이른 봄이면 어린 머위순을 뜯어 밥을 싸먹고, 겨울이면 눈길을 더듬어서 나무를 하며 지게목발을 두드린다. 이것은 내 산거(山居)의 자연스런 주변으로 여기에 선(禪)이니, 도(道)니 하는 무거운 짐을 나는 애써 어깨에 걸치고 싶지 않다. 발우에 담긴 푸른 나물밥 한 그릇으로도 내 생애가 참으로 고맙다.>


호롱불 아래 붓을 들면 벼루 속에서 묵향을 맡으러 들어온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운다는 산거에서 그는 자연과 더불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자연의 일부로 사는 길을 가고 있다. 그는 반 문명 속에 살지만 반 문명주의자도 아니고 문명사회를 경원하거나 현대문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을 결코 경계하지 않는다. 찾아오는 불자들을 위해 언제나 방문을 열어두고 살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하고 꾸밈없는 순수한 인간미를 베풀어 준다. 다만 절간 입구에 ‘비닐봉지 한 장도 되가져 가시고 발자국도 가져가세요’라는 안내문을 걸어두었다.


가져온 그림자까지 함께 왔다가 함께 가져가기를 바라는 그의 산거를 찾은 날은 바로 ‘무소유’의 법정스님 다비식이 있던 날이었다. 맑고 향기롭게 사는 삶의 진리가 무소유 의식에 있다는 큰 울림을 남긴 법정 스님은 자신이 출가한 전남 순천의 송광사로 돌아가 수만 명의 추모 물결에 묻혀 이승을 떠났다. 그런데 육잠 스님을 만나보니 뜻밖에 그도 법정 스님의 영향을 받아 출가했고 그 분과도 연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지금 바깥세상의 눈길이 온통 법정 스님에게 쏠려 있습니다. 무소유를 스스로 실천하며 산 모습에서 한층 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남긴 것 같습니다.

무소유란 물질도 버리고 마음도 비운다는 것인데 인간이 인간 속에서 살며 실행하기에는 어렵고 불가능한 말입니다. 욕심을 가져도 과욕을 버리고 경계하며 자기 분수를 지키는 것이 곧 무소유 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도 법정 스님의 책을 일찍이 애독했고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분의 많은 저서 중에 어떤 책을 좋아하셨습니까?

1978년에 샘터사에서 나온 <서 있는 사람들>을 읽고 출가를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큰 영향을 받으셨다고요?

그 무렵 속가를 떠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던 시절인데 그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법정 스님이 계시던 송광사 불일암으로 찾아갔었지요. 출가할 뜻을 말씀드리고 받아주실 것을 요청 드렸지만 안받아주셨어요. 그래도 내 결심대로 속가를 떠나 해인사 강원에 들어가게 됐고 인호대화상(仁毫大和尙)을 은사로 모시고 길을 찾았지요.


출가를 하실 무렵의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산승이 지난 일을 떠올리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요. 내 속명은 유동한(劉東漢), 속가는 경남 의령인데 삼성가문의 선조가 살던 동네입니다. 1958년에 태어나 위로 형님 두 분이 계시지만 8살 때 아버님 별세하시고 10살에 어머님까지 떠나셔서 이웃 동네에 있는 외가댁에서 성장했습니다. 24살에 속가를 떠났지요. 1982년이군요.

그럼 올해로 법납이 28세시군요. 서예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서예 공부를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입니다. 어릴 때부터 펜글씨를 좋아해 펜글씨 쓰기를 즐기다가 서예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옛 시인 묵객이나 고승들의 글을 좋아하다보니 한학을 공부하고 지금도 붓 가는 데가 그 분들 글이 많습니다. 한학을 공부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경기도 남양주에서 생전에 지곡서당을 열었던 한학자 임창순 선생님께 편지로 가르침을 부탁드린 일이 있어요. 그 때 아주 친절하고 세심하게 문제에 대한 답장을 보내주셨어요. 그 분의 편지를 받고 내 이름이 지잠(之岑)인데 육잠으로 바뀌었습니다.


육잠이라는 이름을 그 분이 작명하신건가요?
어떻게 보면 그런 셈이었지요. 이름이 ‘지잠’(之岑)인데 선생님이 ‘지’(之)를 ‘육’(六)으로 잘 못 읽으시고 ‘六岑’(육잠)으로 오기를 하신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생각해보니 내가 살게 된 곳도 산봉우리가 그쯤 되는 곳이니 그 이름이 괜찮아 지금껏 부르고 있어요. 원래 내 법명은 해광(海光)이고 별호(別號)는 10개가 넘습니다.


이름이 10개가 넘는다고요? 모두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이름들입니까?

내가 지게를 지고 다니며 농사를 짓는다고 찾아오는 신도와 마을사람들이 ‘지게도인’으로 불러준 지는 오래됩니다. 고집스럽게 산다고 ‘외뿔소’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밖에 내 생각 속에서 가져온 북천야납(北天野衲) 육잠농납(六岑農衲) 화하오수산객(花下午睡山客) 의운자(衣雲子) 등의 이름을 서예에서 사용하고 있어요.




농사 짓고 꽃 아래서 낮잠 자거나 구름 옻을 걸치고 산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는 건가요? 풍외암(風外庵) 작명에는 어떤 유래가 있습니까?

일본의 에도시대에 살았던 선승(禪僧) 풍외(風外)선사의 전기를 읽고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그 분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어요.


어떤 분입니까?

성질이 좀 괴팍스럽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바위굴에 홀로 살며 선화를 그리며 선에 정진한 인물이지요.


지게를 지고 농사일하고 나뭇짐을 운반하신다는 데 언제부터입니까?

1991년 풍외암에 오면서 오랫동안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지었어요. 처음에는 일을 못하는 얼치기 소를 사서 고생했지만 그 녀석이 새끼를 낳아 줘서 덕을 봤지요. 사실 나는 중학교 시절까지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녔고 밭 메고 모 심는 농사 경험이 많아요. 지게는 힘이 있어도 누구나 쉽게 사용 못합니다. 기술적인 균형감각을 가져야 지탱을 합니다. 가로로 걸친 나뭇짐을 지고 숲속을 빠져 다니는 데 숙달되기까지는 요령과 오랜 경험이 필요하지요.


풍외암으로 오시기 전에는 어디에 계셨어요?

1987년부터는 대구근교에 있는 비슬산 용문사에서 주지로 있었지요. 시간이 갈수록 어쩐지 주지라는 자리가 내 생리에 안 맞고 불편해요. 어느 날 훌쩍 내려놓고 어디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났지요. 내손으로 씨를 뿌리고 거두면서 틈나면 먹이나 갈며 지낼 곳을 찾아 처음에는 지리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도처에 절이 있어서 발길을 경상도 오지인 봉화 쪽으로 돌렸습니다. 그곳 소천면이란 곳이 마음에 들었지만 냉기가 많아 평생을 두고 살기에는 추울 것도 같아 이곳으로 발길이 옮겨졌지요. 거창에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 어디냐”고 물으니 지금 이 마을이라고 해요. 고기가 뛰어놀고 있는 수정 같은 맑은 물길을 보고 그 줄기를 따라 산길을 오르니 집 두 채가 있더라고요.


두 채 중 한 채가 풍외암이 된 거군요.

깊은 산중에서 만난 그 외딴 집의 부부가 밭일을 하다가 나를 보고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해와 금방 정을 느꼈지요. 한 채는 빈집인데 연이 있었던지 빈집에서 하루를 묵고 난 다음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던 주인부부가 모처럼 들렸다며 나타나 집을 살 수 있었던 거죠. 옛집을 수리하고 고쳤지요. 그 분들이 농토까지 한 1600평방미터를 인계했어요.




전깃불이 없는 집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가설 신청을 하지 않은 겁니까? 아니면 신청해도 공사를 해주지 않은 겁니까?

해 준다고 해도 원치를 않은 것이지요. 호롱불과 촛불을 켜고 살아도 전혀 불편이 없어요. 불이 없어도 먹을 갈수 있고 촛불 밑에서도 책을 읽고 붓글씨를 써는데 불편함이 없어요.


전기는 그렇고 세탁기 냉장고 TV 선풍기 전화 등 아무 것도 없는데 불편하지 않으시다고요?

나는 문명이나 현대의 기물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활에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인간을 게으르게 하고 인간의 본성과 이성이 그것들에 얽매여 종속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나치게 낭비하고 의존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거칠어지고 정신문화도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도 합니다. 생명은 자연에게 신세지고 사는데 가능한 한 자연의 일부로 살아야지요. 조금만 움직이면 그런 것들에 의존 않고도 아주 즐겁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농협카드 하나와 핸드폰은 있어요. 바깥세상과 담을 쌓지 않고 사는 사람이니 필요해요. 핸드폰은 신호가 닿지 않아 터지는 장소로 하루 한 차례씩 이동해서 확인하는 정도로 사용합니다.


이웃집은 비어 있는 것 같은데요?

아, 그 부부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했어요. 어느 해 중고생의 자녀를 남겨 두고 경운기 사고로 별세하셨어요. 취중에 밤길을 오르다가 운전 부주의로 낭떠러지에 추락하셨지요. 사고가 나던 날 밤 심야까지 귀가를 안 해 불길한 마음을 가졌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지금은 자녀들이 친척 댁으로 떠나고 빈집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사시지만 우울한 일도 일어났었군요.

2004년 태풍 매미가 이 계곡을 사정없이 쓸어 버렸던 일도 있습니다. 이 집 밑기둥까지 모든 것이 흙더미에 묻혀버렸지요. 허탈했지요.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가져갈 물건도 없는 사람이니 왔을 때처럼 바랑에 붓자루와 벼루나 싸들고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자연과도 연이 있는데 그걸 쉽게 저버릴 수 없어서 그날부터 축대를 다시 쌓아올리며 골짜기의 물길을 내손으로 하나씩 다듬고 복구해 나갔지요. 모습을 되찾는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


차(茶) 맛이 특별합니다. 무슨 차인지요?

먹을 수 있는 모든 초목이 차가 될 수 있어요. 들국화 다래 냉이 쑥차 등 내가 개발해서 보급한 야생차가 수십 종류입니다.




주로 초서체 글씨를 많이 쓰시는군요. 서화전시회를 다시 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즐깁니다. 전시회는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화봉갤러리라는 곳과 올해 11월 3일부터 9일까지 70점 정도 전시하기로 약속을 해두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보시라는 것이 그것 밖에 없으니 그걸로 여유가 생기면 도움 주는 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풍외암 돌담 아래는 봄의 잔설이 녹아 흐르는 시냇물이 낮은 소리로 지절대며 흐르고 있고 밭둑을 따라 가면 목각 시비 하나가 풍외암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지금은 육신을 버렸지만 살아 생전에 풍외암을 찾아 육잠 스님을 벗해 살며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했던 아동문학가 임길택 선생의 시비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둘레에 따뜻한 마음을 풀었던 따뜻한 사람 임길택 선생님, 두곡산방(풍외암의 또다른 이름)은 유고시집 ‘똥 누고 가는 새’의 시심이 잉태한 곳, 임길택 문학의 향기와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꽃과 새와 구름과 함께 기쁘게 시비를 세웁니다.>라는 글이 거창문학회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임길택 시인은 강원도 탄광지대와 거창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동화 <산골마을 아이들> <탄광마을에 뜨는 달>을 비롯해 시집 <똥 누고 가는 새> 등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통나무를 정성껏 다듬어 세운 시비는 오랜 친구로 지낸 육잠 스님의 손으로 빚어졌다.

임길택 시인은 지금 발길을 끊었고 어디론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없지만 그가 즐겨 발을 담그곤 했다는 풍외암의 맑은 시냇물은 변함없이 산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육잠 스님은 이제 곧 진달래가 붉은 꽃잎으로 풍외암 산자락을 덮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길택 시인이 풍외암에 두고 간 <스님 재산>이라는 제목의 시 한수를 옮긴다.


장작더미에

기대어 놓은

지게와 작대기 하나

그리고

녹다 만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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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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