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는 죄가 없다
폭탄주는 죄가 없다
  • 김세원
  • 승인 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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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의 살롱 큐리어스


[인터뷰365 김세원] 벌써 십년쯤 전의 일이다. 99년 가을 북미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과 파리 워싱턴 등지에서 베를린으로 모여들었던 기자들은 모두 도널드 닭을 기억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도널드 닭은 동독 출신으로 베를린 한국대사관의 차량 운전기사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그는 동독 북한대표부에서 만나기로 하면 정문 앞에 ‘열중 쉬엇’ 자세로 꼼짝 않고 서 있을 정도로 고지식했다. 체격은 유니버설 솔저처럼 건장하면서 머리는 작아 ‘도널드 닭’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북미회담은 시작 시간만 있을 뿐, 언제 끝나고 어떤 내용의 이야기가 오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묻지 마’ 스타일이 특징이다. 기자들은 회담장 앞에 모여 대표들이 회담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길거리에서 ‘뻗치기’를 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북풍한설이 몰아치면 몰아치는 대로 ‘망부석’ 마냥, 한 마디라도 귀동냥을 할 까 싶어 대표들이 회담장 밖에 나오기를 기다린다. 점심은 근처 테이크아웃 식당에서 피자를 사다 먹는다. 하루 종일 뻗치기를 한 대가로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란 대개 “내일 회담은 이곳에서 아홉시에 열리갔습네다” 정도다.


비싼 출장비 값을 하려면 뭔가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기자들에게는 성과가 변변히 없는 북미회담 취재가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북유럽의 가을 해는 또 왜 그리 빨리 지는지. 취재진들은 회담 대표들이 숙소로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허전한 마음을 달래러 호프집에 모여 한국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돌리곤 했다. 하루는 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던 도널드 닭을 술자리에 불렀다. 처음엔 극구 사양하던 그도 ‘폭탄’이란 말에 호기심이 당겼는지 동참했다.


제조 방식은 회오리주. 도널드에게는 허리케인 칵테일로 번역됐다. 유리컵에 맥주를 적당히 채운 다음, 양주잔을 빠뜨리고 컵의 윗부분을 종이 냅킨과 손으로 감싸서 휘휘 돌린 뒤 컵 속에 이는 회오리를 참석자들에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술에 젖은 냅킨을 천장이나 벽을 향해 힘껏 집어던진다. ‘도널드’는 처음 보는 동양의 ‘음주 의식’이 너무도 신기한 듯,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자기 차례가 오자 단숨에 술을 마신 뒤, 성스런 의식을 치르는 제사장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젖은 냅킨을 허공을 향해 냅다 던졌다.


다음 날 아침부터, 도널드는 오늘 저녁엔 어떤 음주 의식을 보여줄 거냐며 기대가 큰 눈치였다. 그의 기대가 헛되지 않도록 다음날엔 ‘마빡주’를 선보였다. 도널드는 맥주가 가득 담긴 컵 위에 젓가락 두 개를 나란히 걸쳐 놓고 젓가락 위에 양주잔을 올려놓은 뒤, 이마로 컵을 놓은 테이블을 부딪치면 양주잔이 맥주컵으로 빠지는 ‘장관’을 그야말로 홀린듯 쳐다보았다.


2002년 6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친 동생인 닐 부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저녁 술자리에서 그를 초청한 H그룹의 C명예회장이 손수 폭탄주 제조 시범을 보였다. 유럽에 있었던 4년 동안 폭탄주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궁금하던 차에 ‘(오사마)빈 라덴’이란 이름의 폭탄주 제조법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 제조법을 설명하겠다. 맥주를 채운 유리컵을 사람 수대로 나란히 붙여 늘어놓고 커다란 종이로 덮는다. 종이 위로 유리컵 사이의 빈 공간에 양주잔을 올려놓는다. ‘얍’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종이를 잡아당기면 뇌관이 유리컵 안으로 빠지면서 한꺼번에 여러 잔의 폭탄주가 만들어진다.


대통령의 동생이란 후광덕분에 웬만한 접대에 익숙해있을 닐 부시도 차례로 양주잔이 맥주잔 속으로 빠지면서 스물다섯 잔의 폭탄주가 만들어지는 장관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각자 잔을 비운 뒤 빈 잔을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를 내는 것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폭탄주를 화제로 한동안 얘기가 오갔고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그의 방문 목적은 고향인 텍사스 주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온라인 교육사업의 아시아 진출을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이그나이트’란 이름대신 부시 가문의 지명도를 활용해 문제아의 비율이 높은 전 세계 대통령 자녀들을 위한 특별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어떠냐는 조크도 나왔다.


한국산 칵테일

잔을 돌려 술을 강요하고 한 번 마셨다 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한국인의 음주습관이 탄생시킨 폭탄주는 애증이 엇갈리는 한국산 칵테일이다. 제조법과 ‘뇌관’ 및 폭약의 재료에 따라 다양한 아류를 만들어냈다. 수폭주, 심청주, 드라큘라주, 금테주, 회오리주, 레인보우주 퐁당주 오십세주 충성주 노털주 도미노주 같은 이름은 시대의 변천사와 사회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정경 유착이 빚어낸 비정상적인 뒷거래의 이면에는 향응이 따랐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식의 결과 제일주의는 서로를 무장해제 시키고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방편으로 '같이 먹고 죽자'는 폭탄주 문화를 확산시켰다.


비록 탄생 배경은 자랑스럽지 못하더라도 조직의 상하관계에서 빚어진 긴장감을 해소하고 초면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바꾸거나 갈등을 푸는 데는 아직도 폭탄주가 효과적이다.


폭탄주는 죄가 없다

서양의 칵테일은 손님의 주문을 받고 바텐더가 만들어준다. 술 마시는 방식도 스탠드바란 이름처럼 서서, 또는 스툴에 각자 홀로 앉아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크류 드라이버’ ‘B52' '블랙 러시안’ ‘러스티 네일’ ‘섹스 온 더 비치’같은 이름이 분위기 조성에 한몫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폭탄주는 손님들이 직접 제조하는 재미에, 그때그때 사회상을 반영하는 기발한 작명, 처음 보는 사람들 간에 대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아이스 브레이킹’ 효과가 탁월하다. 이른바 요즘 유행하는 펀(fun)경영, 감성 경영추세에도 들어맞는다. 억지로 강요하고 도를 넘도록 마시는 것이 문제이지 개발하기 따라서는 한국의 '다이나믹'한 음주문화를 알리는 무형 관광 상품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알콜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이온음료 칵테일, 음미하며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빨대 폭탄주등 제조법과 주법을 다각화해야할 필요성은 있다.


연말 연이은 망년모임으로 폭탄주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기도 하다. 폭탄주가 사람들을 인사불성 초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기가 될 것인지,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폭파시키는 다이너마이트가 될 것인지는 각자 하기에 달려 있다. 폭탄주 자체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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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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