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발표한 IT산업의 1세대 기업인 김영태 회장
역사소설 발표한 IT산업의 1세대 기업인 김영태 회장
  • 김두호
  • 승인 201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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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 명예의 전당에 이름 남긴 극복의 CEO 출신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한국소프트웨어세계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주)프리씨이오(Free CEO)의 김영태 명예회장(76)은 글로벌 기업인 LG그룹에서 전자산업의 태동에 기여한 한국 IT산업의 1세대 기업인 출신이다. 그는 LG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던 금성사, 치약을 만들던 럭키를 기업브랜드로 서울 을지로 임대 빌딩에서 대기업의 기초를 다지던 시절부터 LG CNS의 최고 경영자(CEO)가 되어 퇴임까지 34년간 피와 땀의 성장 기록을 기업과 함께 했다.


고희를 저만치 넘어섰지만 대기업 CEO를 역임한 기업인들과 경영컨설턴트로 프리씨이오를 운영하면서 지금도 주로 온라인(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살고 있다. 그의 삶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기업을 떠난 후에도 나이를 초월한 변화와 도전의 새로운 인생 프로젝트를 쉬지 않고 진행했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이 살던 선사시대부터 신라통일시대까지의 신화와 사료를 토대로 대하장강(大河長江)의 역사소설 <환단의 후예> 전 6권을 출간한 것은 인간 능력의 무한함을 보여준 사례다. 더욱이 <환단의 후예>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 동북아 지역을 현장 답사하고 한 중 일 3개국을 돌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구상에서 집필까지 10여년에 걸쳐 완성했다.


은퇴가 없는 경제인 김영태 회장이 보여준 인간 승리의 기록 중에 평생을 안고 산 불치의 난치병을 극복한 이야기도 있다. 세계적으로 희귀하고 치료방법이 없다는 강직성척추염으로 허리가 45도까지 굽는 병을 안고 살다가 척추를 인공뼈로 재조립하는 수술로 이제는 허리를 일으켜 세워 살고 있다. 병세가 나타난 지 45년만인 72세 때의 기적이다.


기업에도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LG그룹에는 전문 CEO 김영태 회장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퇴임식에서는 그의 기록필름을 제작해 보여줄 정도였고 구자경 그룹명예회장은 척추수술을 하던 김 회장의 병실을 직접 문병할 만큼 자신을 도와 기업을 이끌었던 김 회장을 잊지 않고 산다.


김영태 회장은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언행에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젊은이에게도 조심스러워 했고, 어떤 질문에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정감으로 응답했다. 그가 아직도 젊은이들과 e메일로 대화를 나누고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젊은이들과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지혜로운 인생관 때문으로 느껴진다.



지금 명예회장으로 참여하시는 프리씨이오는 어떤 성격의 기업입니까?

이름 그대로 기업을 떠난 CEO들이 뜻을 모아 활동하는 일터입니다. 기업이라기보다 자신들의 체험과 지식 등 경영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전문 경영컨설턴트 단체에 가깝습니다. 운영을 위해 수익사업을 연계하지만 기업정신은 봉사와 지원입니다.


언제 창립하셨으며 어떤 분들이 참여하고 있는지요?

1996년 34년간 근무한 LG그룹을 떠난 후 4년만인 2000년에 나와 같은 퇴임 CEO와 후배 전문가들이 서로 뜻이 통해 창업했어요. 회장 일을 하다가 3년만인 2003년부터 명예회장으로 한걸음 물러났지만 전처럼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분은 김택호 현 회장(전 현대정보기술 사장)을 비롯해 진수테리(미국 어드반스트 글로벌 코넥션즈 사장), 김대규(전 BT코리아 대표), 정용환(전 인텔코리아 대표), 김원국(전 Sun Micronix 한국 사장), 성기중(전 한국정보통신부회장), 홍성원(전 시스코시스템코리아 회장), 유완재(전 지트로닉스코리아 대표), 박찬모(한국 연구재단 이사장) 총장 등 주로 IT 기업의 초기 세대로 30명이 넘습니다.


이제 꿈을 간직하고 사회활동을 시작하시던 시절로 돌아가 주시지요.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셨지요?

1957년에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휘문고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었지요. 이어서 서울사대부고로 옮겨 강사활동을 하며 남는 시간을 활용해 <영어단어의 정복> <영어어원사전> <객관식 대학입시문제집> 등 영어교재를 3권 출판해 몇 년간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럼 금성사(LG의 전신)는 언제 입사하셨습니까?

1962년 사원 모집 때 시험을 거쳐 입사했어요. 회사가 을지로3가에 있는 건물에서 사무실을 임대해 사용할 때였지요.


그때 기업의 입사시험은 어떤 과목들인가요?

기업의 업무성격과 필요성에 따라 채용 대상이나 시험과목도 달랐을 겁니다. 내가 입사할 때는 영어 일어 무역실무 경제까지 4과목이었는데 영어와 일어 활용능력을 특별히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신입사원 시절인 1960년대 초기의 기업 근무환경이 궁금합니다.

신입사원 교육도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되어 눈치로 선배사원들의 일을 익혀나가는 시대였지요. 지금은 골동품이 된 주판이 책상마다 필수도구로 놓여있던 기억이 납니다.


재무관련 업무부서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신 건가요?

아니에요. 그때는 주판이 계산 기계 구실을 해 만년필처럼 누구에게나 업무용 필수품이었어요. 입사 얼마 후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부의 인허가와 관련된 각종 행정업무였지요.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상공부(현 지식경제부) 등을 출입하는 회사의 행정사원이었던 셈이죠. 주한 미8군 납품에서 해외 수출 업무도 함께 했어요. 전자산업의 원조인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동남아와 미국, 중남미까지 수출해 100만 달러의 신용장을 받았다고 축하를 받은 기억이 있어서 국산품을 수출해서 돈을 번 것은 자랑스러웠죠.


지금의 LG그룹은 GS, LS, LIG로 3개 그룹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연간매출 125조원 규모의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발전해 있습니다. 수출 100만 달러 시대라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나중에 업무도 자주 바뀌었겠군요.

1965년 1월1일자로 과장에 승진되어 금성사의 모기업인 럭키화학(현 LG화학)으로 옮겨 국내외에서 원료를 조달하는 구매과장을 했어요. 지금 같으면 몇 개의 부서가 할 일을 혼자서 뛰던 시대였지요. 힘들었지만 그때의 다양한 경험이 평생을 두고 기업 활동에 매우 유용한 지식이 됐습니다.


이름이 LG화학으로 바뀐 럭키화학은 주로 치약 비누 합성세제류를 생산하던 기업 아닌가요?

PVC나 플라스틱 원료에서 염료 안료 면포 등을 수입하는 사업도 큰 몫을 차지했어요. 회사가 나중에 두 개를 더 합병해 규모가 커진 뒤는 종합관리과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재정과 경영합리화를 위한 기획 작업을 한 뒤 부장으로 승진했어요. 계리부장 겸 관리부장을 하다가 전혀 업무파악이 안 되는 진단부장이라는 신규 업무를 맡게 됐어요. 그게 요즘 기업의 전산실 전신입니다. 하하하.


몇 년도입니까?

1968년에 LG화학이 도입한 것이 3세대 컴퓨터로는 국내 1호가 될 겁니다. 그 전에 유한양행에서 2세대 컴퓨터를 가져왔었지요. 그런데 크기가 집채만 했어요. 어쨌거나 인간이 쉽게 해낼 수 없는 각종 경영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 하고 방대한 수리계산을 순식간에 해결해내는 마력을 보여 마침내 주판을 들고 철야작업을 하던 시대가 무너지고 디지털의 새 역사가 시작된 걸 실감하게 됐지요.


새로운 시스템의 운용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요.

물론이죠. 녹음기와 필기도구를 들고 수출입 협력업체인 일본 기업들과 일본 IBM에서 두 달간 경영정보시스템의 현황을 조사하고 교육도 받았어요. 성과가 나타나면서 윗분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어요. 원래 영문타자를 익숙하게 사용했었지만 그 무렵부터 키보드를 만지는 것이 생활화 되어 컴퓨터와 지금도 친숙하게 지내고 있는 겁니다.


국내에서 기업의 전산시대를 연 1세대이면서 개척자로 생각됩니다.

회사로부터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행복했어요. 그 후 전산 구매 인사 관리 감사업무까지 총괄하는 관리본부장과 상무이사로 승진되었어요. 1974년이었죠. 얼마 후 본사 관리직보다 현장 책임자로 나가고 싶다는 요청을 받아주어서 여천에 있는 합성수지공장을 관장하는 화성사업부를 맡았지요. 2년이 지난 뒤 그룹 회장실(기획조정실)로 인사발령이 나 회장님을 보좌해 경영 전반의 업무조정 일을 하는 동안 전무로 승진했었지요.


실력 있고 성실하면 계단을 오르듯 그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 회사원의 성공담이군요. 그 다음은요?

4년차 전무였을 때 또 기업 현장이 그립더군요. 개인적인 희망을 들어주셔서 금성계전 부사장으로 이동했고 다행히 내가 가서 2년만에 흑자기업으로 달라져 또 인정을 받은 덕분인지 그룹의 주력 기업인 금성사(현 LG전자) 부사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업무 전반을 총괄하면서 가장 애정을 쏟은 곳이 컴퓨터 부문의 제조 판매 사업이었지요. 2년만에 다시 회장실로 이동하게 되어 그때 회장님을 도와 ‘F 88’이라는 그룹개혁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추진했습니다.


어떤 내용의 프로그램입니까?

그룹 계열기업의 대부분이 전자 전기부문인데 20여개 회사의 중복된 사업을 통폐합하고 조정하는 작업이었어요. 그와 함께 E(전자)프로젝트도 맡았는데 정보처리 시스템을 통합하기 위해 미국의 대표기업 EDS와 합작기업을 창설하는 획기적인 과제였어요. 1년간 준비해서 세운 회사가 STM으로 지금의 LG CNS입니다. 현재 연매출이 2조8천억 원에 이르는 그 회사를 만들어 1996년 은퇴할 때까지 9년간 사장으로 근무했었지요.



오너가 아닌 전문 CEO로는 드물게 화려한 퇴임식을 가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의 장면을 전해주시지요.

그 긴 세월동안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업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지막까지 열어주신 구자경 회장님 배려로 무사히 현역을 마치게 되었는데 회사에서 나를 위한 퇴임식을 마련해 주어서 그저 만감을 느끼게 했었지요. 특히 퇴임 사장의 발자취를 담은 영상을 특별히 제작해서 보여준 것이 다른 기업인들에게도 부러움을 많이 샀던 것 같아요.


신체적인 결함이라면?

회사에 있을 때 내 별명이 ‘허리 굽은 사장’이었어요. 심지어 ‘괴물’소리까지 들렸어요. 세계적으로 10만명에 129명 정도가 걸린다는 강직성척추염으로 젊을 때부터 허리가 굽기 시작했어요. 현대의학으로 치료방법이 없다는 병입니다. 45도까지 굽어 땅을 내려다보며 40여년을 살면서도 다행히 일을 할 수 있어서 국내 업무는 물론 기술 제휴나 합작 사업을 위해 세계 각지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활동해도 쓰러진 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보이지 않게 정신적인 설움도 많이 겪었어요. 등 뒤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느냐는 소리도 들렸고 야유회에서 꼽추 춤을 요청받는 조롱도 받았던 일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나를 밀어주고 용기를 주는 인간애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곳이 LG 그룹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구본무 회장님의 취임 15주년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사원들에게 ‘일등 LG’를 강조해 왔지만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 구호라고 밝혔더군요. 그게 실제 그룹의 정신입니다.


물론 평생을 두고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위한 몸부림은 계속됐어요. 그룹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님도 나를 보면 답답하신지 회사에 계실 때는 회장실로 불러 한의사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도록 하셨고 럭키화학 시절엔 허신구 사장님이 세계적인 미국 척추교정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도록 주선을 하셨지만 수술을 앞두고 포기했어요. 수술을 받아도 50%의 성공률 밖에 없고 실패하면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얘기에 가족들까지 반대했었지요.


그런 병을 어떻게 고치셨어요?

평소 형님으로 모시는 이재연 회장님을 통해 강직성척추염 수술에 성공해온 서울 시너지병원의 김원중 원장을 소개받아 2006년 봄 수술을 결정했어요. 환자에게 실패보다 성공에 대한 신뢰를 갖게했어요. 8개의 척추 뼈에 티타늄 못을 박고 그 위에 플라스틱 판을 부착시키는 12시간짜리 수술이 끝나고 나는 조금씩 허리를 펴기 시작했고 마침내 145cm의 키가 15cm 늘어나 160cm로 벌떡 일어선 것이지요. 칠순을 넘은 나이의 내 인생이 맞이한 기적이었습니다. 허리 굽은 사장이 허리를 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구자경 명예회장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기쁨을 함께해 주셨어요.


이제 역사소설 집필하신 얘기를 해주시지요. 어떻게 기업 CEO에서 소설가가 되신 건가요?

대학시절 저명한 수필가이셨던 피천득 교수님에게 총애를 받은 제자입니다. 그 분과는 인연도 깊고 사연도 많아요. 나의 약혼식과 결혼식에 오셔서 축사를 하셨고 대학 졸업 때는 조교로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하셨는데 가족 부양을 이유로 거절했어요. 그래도 휘문고 교사로 가도록 추천을 해주셨어요. 금성사에 다닐 때 다시 한 번 불러서 “자네 같은 사람이 학교에 있어야한다”시며 조교로 올 것을 바라셨지만 또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단지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는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다가 실현한 것이지요.


제자에게 애써 소설을 쓰도록 권유한 동기가 있을 것 같군요.

1990년대 말 <정보화시대의 경영전략>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어요. 첫머리에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관계를 거론하며 삼국시대에도 서로 말이 통했다는 얘기를 다룬 대목이 있는데 그걸 아주 재미있게 읽으시고 꼭 소설 하나를 써야한다, 단 한 권이라도 좋으니 꼭 쓰도록 하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약속을 하셨나요?

예,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었지요. 그 후 기업을 떠나면서 구상을 시작해 2006년 <환단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1,2권이 먼저 인쇄되어 나오자 곧장 선생님께 달려가 바쳤지요.


보시고 어떤 소감을 말씀하셨습니까?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직접 읽을 수 없어서 돈을 주고 책을 읽어주는 도우미를 통해 모두 읽고 너무 재미있었다며 칭찬을 겸한 감탄을 하셨습니다. 얼마 전 별세하셔서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생전에 약속을 지켜드렸던 것이 위안이 됩니다.


<환단의 후예>는 역사 서적처럼 주석을 달아 사실감을 더 느끼게 합니다. 실제 철기시대의 생활도구나 농기구에서 무기류인 국궁의 활용방법 등 고대의 생활양식들을 고증에 근거해서 치밀하게 표현한 부문들이 관심을 끌게 합니다. 내용 구성이나 집필 배경을 두고 저자의 입장을 말씀해 주시지요.

‘환단’은 단군의 시조인 환인 환웅과 단군을, ‘후예’는 단군의 핏줄인 우리들을 뜻합니다. 동북아 일대에 살았던 동이족이 단군조선에서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를 만들고 일본의 왜까지 건국해 간 역사를 다루었지요.

단군조선은 왕위가 40여대까지 이어진 실존 국가입니다. 형식은 소설이지만 사기와 야사 등 각종 사료를 사실적인 골격으로 세우고 알 수 없는 소멸된 역사 부문은 현장을 답사해 가며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방법을 시도했어요.


발자취가 있는 역사를 황당한 픽션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점에서 글을 쓰는 일보다 자료를 찾고 역사의 현장 체험을 하는 소재 헌팅과정이 더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백두산을 더듬어 오르고 일본 땅도 여러 번 헤집고 다녔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왕자시절 백두산에 오르는 모습 같은 장면은 실제 답사가 도움이 됐어요. 10장의 집필을 위해 100장이 넘는 자료들이 필요했지요.

전 6권의 시대 배경은 선사시대부터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때까지입니다.




피천득 교수는 회장님이 생애에 영향을 많이 준 멘토이셨군요.

나에게는 두 분의 멘토를 꼽을 수 있어요. 바로 학교 때 만난 피천득 선생님과 사회에 나와 회사원이 되어 과장 때부터 모신 구자경 명예 회장님이지요.


사시면서 늘 잊혀 지지 않는 어릴 때의 일들을 회고해 주시지요.

나는 1934년 도쿄 한복판에 있는 그곳 적십자병원에서 출생했어요. 5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고향인 경남 하동군 양보면으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그곳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셨지요. 선친이 도쿄에 계셔서 7살 때 다시 도쿄로 건너가 그곳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4학년 때 돌아왔어요. 해방 전후 혼란기에 하동에서 진주 삼천포 등지로 여섯 번이나 옮겨 다니며 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진주사범병설중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사대 영문과를 선택했으니 일찍 선생이 되는 길로 들어선 셈이지요.


사실 대학 졸업을 전후해 해군에서 번역관도 하고 부두화물 노동일에서 가내공업의 판매원, 영문타자학원도 경영하는 등 경험이 많아요. 책도 장르와 영역을 가리지 않고 많이 읽었지요. 그런 과거로 인해 일본어와 영어는 우리말처럼 하게 되고 독일어 중국어도 공부해 나중에 기업에서 다방면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재산이 됐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이나 신념을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어떤 표현을 하실 건가요?

‘낙업(樂業)이 낙토(樂土)’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자신의 업(일)을 즐겨야 즐거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한 말입니다. 싫은 일을 하면 그게 지옥이지요. 일을 할 때 일하고 놀 때 놀아라는 속담도 좋아합니다. 그 말은 동서고금을 안 가리고 통하는 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부러워 한 걸인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모습은 인간이 어떤 환경에 살아도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면 남부러워 하지 않고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좋은 교훈입니다. 과욕 안 부리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만족 느끼며 사는 것도 내 인생관입니다.


연로하신 어른들을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만 인터넷과 친숙해 있는 분이 드물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의 사회는 종이문화권에서 떨어져 나가 인터넷사회로 이동해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에서 보내시는 모습이 놀랍고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가장 큰 이유는 쉬지 않고 일을 해온 덕분입니다. 어제는 2차대전의 자료를 뒤지다가 오키나와에서 치른 미군의 전쟁 다큐를 유튜브 동영상으로 흥미있게 보았습니다. 오늘도 스위스에서 일하는 분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정말 편리한 웹 세상에서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지금 하시는 일 가운데 한국소프트웨어세계회위원회는 어떤 일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까?

2008년에 활동을 시작했어요. 수출을 주도하는 전자통신 자동차 선박 등 우리의 주력산업이 모두 하드웨어 중심입니다. 우리의 소프트웨어산업이 하드웨어에 비해 9대 1의 비율로 추산되기도 합니다.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핵심 분야인 소프트웨어 시장이 수십 배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개혁적인 변화가 따라야합니다.


이 위원회는 ‘지혜로운 사회로 만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80여명의 관련 인사들이 참여해 각종 정보교류와 자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우리가 애용하는 계몽운동이 중요합니다. 또 장래를 위해서는 당장 필요한 응용과학 분야 못지않게 기초과학 분야를 육성 발전시켜 가야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장래 희망을 보면 요즘 의사 변호사 등 사회적 신분이나 수입을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빌 게이츠 같은 소프트웨어의 영웅이 되기를 선호합니다.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지요.

일자리, 일자리 창출하는데 소프트웨어 산업에 인재들이 몰려 발전하면 그런 것도 쉽게 해소됩니다.

참여한 인사는 어떤 분들입니까?

(주)프리씨이오를 함께 하고 있는 김택호(전 현대정보통신 사장), 송병남(전 대우자동차 사장), 김천사(전 두산그룹 기업사장), 이장규(전 엘지그룹 기업사장), 이단형(카이스트 교수), 정기원(숭실대 교수), 정용환(전 인텔코리아 사장), 신재식(정보통신산업진흥원 단장), 유정열(지식경제부 과장) 씨 등입니다. 최근에 59차 회의를 가졌는데 매주 목요일 만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추진합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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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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