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최초의 거물 신상옥④ > 헐리우드로 간다. 끝까지 간다.
<한국영화 최초의 거물 신상옥④ > 헐리우드로 간다. 끝까지 간다.
  • 황기성
  • 승인 2007.12.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상옥은 가장 우뚝한 감독이고, 제작자였다. / 황기성


[인터뷰365 황기성] 출장차 LA에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워싱턴 DC에 있는 신상옥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최은희가 북한을 탈출하고 미국으로 왔다 하여 한참 소동이 있은지 한 달 쯤 되었을 때다. 감격스런 목소리를 기대했다. 인사를 건네면서 안부부터 묻는데 왕초는 또 튀는 소리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건강은 어떠시구요?”

“하.하.하. 야. 그따위 소리 말고, 내일 너한테 이북에서 만든 영화 5편의 비디오를 보낼 테니 보는 대로 나 한데 전화하라 알간?”


7년만의 전화치고는 이렇게 멋대가리 없을 수가. 김창규 선생으로 부터 비디오테이프를 받았다. 김 선생은 신 감독을 자랑스러워하는 함흥 중학 동창생이다. 신 감독과 김 선생의 우정은 각별했다.


LA의 호텔에서 신 감독의 영화를 먼저 본다.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상치 않은 돌발 사태로 회사 출장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날마다 영화 한편씩을 보고 워싱턴으로 전화를 해야 했다. 시간이 지체하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뭘 봤나?”

“<소금>보았죠”

“영화 어떻게 보았나?”

“한국에서 만든 감독님 영화보다 좋은데, 웬일이죠?”

“야. 제작비 걱정 않고, 흥행생각 안하고 만드니까 좋을 수밖에 핫. 하. 하”


칭찬을 해주면 좋아 야단인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며칠을 그러다가 결국 내 일은 뒤로 밀어버리고 돌아왔다. 왕초의 이기심이 미워지기도 했다.


1991년. 신 감독은 그 엄청난 허리우드에 <신 프로덕션>을 세운다. 허리우드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영화와 영상물을 만들어 토해내는 고래 같은 존재다. 영화산업에 관계가 없거나, 관심이 없는 이들은 허리우드가 얼마나 크고 막강한 괴물인가를 잘 알지 못한다. 입이 벌어질 규모의 메이저 영화사가 있는가하면 숫자를 가름할 수도 없는 프로덕션들 - 흰둥이, 검둥이, 누렁이 할 것 없이 세계의 영화인들이 모두 모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꿈의 전쟁터’ 라고나 할까. 여기에 북한을 탈출하자마자 신상옥은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쓰리 닌자>는 키드 액션영화로 프로듀서 신상옥이 허리우드 틈새시장을 노린 첫 번째 기획영화다. 신 감독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과거 한국의 신필름 전속작가였던 김강윤 에게 맡겼다. 김강윤은 이미 미국에 이민을 와있던 터였다. 영어번역을 거쳐 손에 쥔 초고 시나리오를 가지고 그는 신인감독을 찾는다. 허리우드는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자들이 자작 단편영화나 시나리오 등을 들고 제작자를 찾아다닌다. 신 감독의 필이 꽃인 신인감독 ‘존 터틀타웁’ 이 연출자로 결정되어 졌다.

<쓰리 닌자>의 제작비는 450만불. 허리우드 시스템에선 최저가의 제작비였다. 일본인 추종자가 투자자로 나섰다. 무명의 동양인 프로듀서가 만든 이 영화 견본시사회(흥행사들이 보는 초청시사회)에서 허리우드는 깜짝 놀란다. ‘디즈니’는 즉각 신 프로덕션으로부터 판권을 입수하여 미국 전역 1,500개 극장에 배급을 결정한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한국영화인이 이러한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화제의 사건이 있을 때, 감독은 흥분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못 당할 놈들이야, 450만 불짜리 영화를 사가지고 선전비만 1300만 불을 투자 하는게 미국 놈들이야, 이걸 어떻게 당하냐 ?”


그는 성공의 기쁨보다 막강한 자본주의 머니파워에 황당해 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갈 길을 염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쓰리 닌자>는 미국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 해서 신 감독은 허리우드에서 ‘키드액션’에 관한한 확실한 자리를 확보한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허리우드 메이저 배급사들이 저마다 <쓰리 닌자>의 속편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신 감독은 내심 더 낳은 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허리우드의 벽은 높았고 그에게는 <쓰리 닌자> 시리즈 만이 요구되었다. 2탄의 시나리오를 내 놓았을 때 - 전편에서 데뷔시킨 신인감독 ‘존 터틀타웁’은 이미 ‘디즈니’가 전속감독으로 채 가버렸다. (존 터틀타웁은 그 이후 디즈니에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내셔날 트레져>같은 세계적인 흥행영화의 감독이 된다.) 단돈 5만불로 데뷔시킨 존 터블타웁의 몸값은 이미 500만불로 뛰어 올라 있었다.


화가 난 신감독이 직접 연출자로 나선다. 영화가 완성되고 주변의 사람들(한국인들)은 하나같이 1편 보다 재미있고 더 잘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일을 어쩌랴. 미국시장에서 신상옥 감독의 <쓰리 닌자 2>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드라마는 전편보다 더 좋은데 코믹 액션영화의 한 축인 ‘코미디 감정’이 미국인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와 정서가 다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었다.


이 함정 속에서도 신 감독은 꿋꿋이 콜럼비아의 투자를 받아 <쓰리 닌자 2> <쓰리 닌자 3> <쓰리 닌자 4>를 만든다.(신감독이 연출한 속편은 콜럼비아가 입수하되, ‘2편’이란 행세는 하지 않고 비디오 시장으로 보내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트라이스타’의 투자를 받아가며 <가가메스> <사이렌 스크림> <증발>에 이르기 까지 7편의 영화를 허리우드에서 내 놓았다.


필자가, 이 추억담을 끝내면서 ‘허리우드 10년’의 신상옥에 대하여 구구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그의 노력과 성과, 가치에 대하여 어떤 개인이나 매체, 또는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언급한 바가 없고, 100년의 한국영화사상 오늘까지도 ‘세계 영화산업의 본고장 허리우드’에 신상옥 만큼의 탁월한 실적을 남긴 한국영화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화와 영화인들이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집안 굿만을 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LA 신상옥 감독 집무실 커다란 유리창 저 아래 산등성이에 ‘HOLYWOOD' 란 하얀 글씨가 내려다보인다. 저녁나절의 실루엣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쇼트로 인상지어 진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감독님이 제일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0년만 더 젊어서 미국에 왔더라면. 영어를 할 줄 알았더라면.”


2006년 4 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신상옥은 거물이다. 내 작은 영화인생에 그 분을 선생으로 만날 수 있었던 일을 감사한다.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황기성
황기성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