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로 줄리아드까지 간 인간승리의 소프라노 이지연
홀로서기로 줄리아드까지 간 인간승리의 소프라노 이지연
  • 김두호
  • 승인 201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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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곡(悲曲)을 노래하는 프리마돈나의 눈물과 사랑과 꿈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소프라노 이지연(경희대 출강)은 2009년을 마감하며 전국에서 열린 크고 작은 송년음악회에서 가장 바쁘게 활동하고 가장 인기를 누린 음악인이다. 미국 오페라무대에서 <나비부인> <춘희> <라보엠> <리꼴레또> <안드레아 쉐니에> <시몬 보까네그라> <투란도트> <오델로> 등의 프리마돈나로 활동했던 그는 15년 만에 돌아와 지난 6월13일 서울 오페라단이 마련한 오페라 갈라콘서트와 W필하모닉오케스트라 협연을 계기로 국내활동을 시작했다.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음악인의 출발점이 국제적인 음악콩쿠르라면 이지연 성악가의 수상 경력은 한참 나열해야할 만큼 화려하다. 국내 동아콩쿠르 2위로 시작해 미국 퀸즈오페라컴퍼티션 1위, 미국 뉴저지 오페라국제콩쿠르 1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컴퍼티션 1위, 이탈리아 알타무라 카루소국제콩쿠르 금메달, 미국 리치아알베네제 주최 푸치니콩쿠르 1위, 세르지오 프랑키 스칼라십 연속 4회 수상으로 아티스트 인터내셔널이 최고의 성악가로 선정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데뷔 공연무대가 마련되고 1996년에는 링컨센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그러나 음악인 이지연에게는 수많은 수상 전력보다 더 빛나고 자랑스러운 이력이 있다. 독학으로 음악의 길을 걸어 줄리아드까지 간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아주 어릴 때 ‘줄리아드 꿈’을 간직했으나 음악수업은 물론 학교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숙대 음대에 전공학과 수석 입학을 했고 3살 아기의 엄마가 된 뒤 마지막 꿈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줄리아드의 좁은 문턱까지 혼자 힘으로 넘어섰던 그를 신은 밸칸토 발성의 소프라노로 화려한 오페라 무대에 등장시켰다.


오페라는 사랑과 꿈을 노래하지만 프리마돈나는 대개 비곡(悲曲)을 부르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홀을 가득 채우며 울리는 넒은 음역과 맑은 고음의 음색으로 감성의 소리 공간을 이끌어내는 이지연 소프라노의 노래는 드라마틱한 오페라일수록 더 객석을 매료한다는 평가가 따른다. 그는 참으로 많은 삶의 변화와 고통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음악의 길을 혼자서 찾아다녔다. 믿는 것은 오르지 자신의 성악소질뿐이었던 그에게 꿈은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 속에서 음악을 하고 예술을 전공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의미를 새겨주는 그의 삶은 현재도 진행형이지 고전이 아니다.



인터뷰 요청을 한 지 보름만에 시간을 주셨다. 바쁘게 사는 모습이 밝고 행복해 보인다.

힘들다 해도 어두운 모습을 싫어한다. 바쁘게 사는 것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이제 막 현대건설에서 주관하는 힐스테이트홀(서울 양재동) 음악회 리허설을 하고 왔다.


기업에서 주관하는 음악회도 출연하는가?

명분이 있으면 크고 작은 행사를 가리지 않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모르는 많은 음악팬들과의 만남이다. 주로 미국지역에서 활동해 소프라노 이지연을 잘 모른다.


최근의 공연 스케줄은?

KBS홀 숙대동문음악회부터 시작해 <얼굴> 작곡가인 신귀복선생 기념초청연주회, 세종문화회관 세진회공연 특별출연, 영평상시상식 축하공연, 숙대 100주년기념관 공연, 안산시립연주회와 대전예술의전당 송년음악회 등 연말까지 지난 4개월간 출연횟수가 30여 차례 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 돌아와 국내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줄리아드 음대(석사과정) 재학 때부터 잠깐씩 귀국해 공연을 해왔다. 1998년 국내 오페라단 오디션에서 1등 한 것을 계기로 <라보엠>을 공연했고 김자경오페라단에서 <카르맨>, 졸업직후에 대전오페라단과 <오텔로>, 2002년에는 국립오페라단이 초연한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에 출연했다.

미국에서의 활동을 일단 접고 돌아온 것은 지난 4월이다. 6월 13일 세종문화회관 오페라갈라콘서트 공연을 시작으로 모든 일정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줄리아드 음대는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음악인재들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줄리아드는 초등학생 때부터 나의 꿈이었다. 나중에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큰 오빠가 대구에 있는 경북사대부고에 다닐 때 초등학생인 나에게 “지연아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대뜸 세상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마리아 칼라스가 되겠다고 대답했다. 오빠는 그럼 줄리아드를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때 처음 들은 줄리아드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단호하게 “오빠 나 꼭 줄리아드 갈 거야”하고 말한 기억이 생생하다. 오빠는 “그래 꿈은 꿈꾸는 사람에게 돌아간다”던 말도 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서 음악의 길을 걸어 숙명여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다시 혼자서 줄리아드를 향해 떠났다. 결혼해서 3살박이 아들을 둔 엄마가 되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기꺼이 아기를 대신 돌보며 나의 길을 열어주었다. 1993년 12월이었다.

하지만 도착 후 줄리아드 교수의 레슨 없이 쉽게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에 빠지기도 했다. 레슨에는 막대한 재정적인 밑받침이 필요하고 레슨을 받아도 1, 2년은 준비해야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응시해도 2회 이상 탈락하면 응시자격이 상실되는 곳이었다. 포기하기는 억울해 일단 줄리아드 이디스(Edith) 교수의 레슨 테스트나 받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나를 테스트한 이디스 교수는 “너는 탑(Top)이다”고 외쳤다. 가르친 선생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9월 학기를 앞두고 남녀 한명씩을 선발하는 1994년 5월 입학시험에 응시토록 한 뒤 지도 교수의 이름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자신이 레슨을 하던 다른 학생에게 다음 기회에 응시토록 통고하고 레슨도 받지 않은 나를 추천한 것이다. 미국에 간지 몇 달만에 줄리아드에 응시했고 과제로 준 10곡을 불렀을 때 시험관 교수들이 일제히 일어나 나를 둘러싸고 원더풀을 외치며 박수를 쳤다. 2차 시험까지 치르고 아기가 보고 싶어 서울에 돌아온 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줄리아드까지의 이야기들이 듣기만 해도 극적인 장면들을 떠올린다. 대학까지 혼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가.

먹는 것이 제대로 해결 안되는 성장기가 있었다. 일주일 내내 밀가루 수제비를 먹기도 하며 초등학교를 네 곳이나 옮겨 다니고 한 해에 이사를 열 번 다닌 일도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간부였고 국가유공자였지만 강직해서 신분을 활용하지 않았다. 공직에 계실 때는 선물이나 뇌물을 받는 부하를 용납하지 않아 가난하고 외롭게 보내셨다. 아버지가 공직을 떠나 사업하시다가 사기를 당하고 실패해 많은 가족들이 그때부터 자활하거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해야 했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나의 음악 선생은 FM 음악프로그램이었다. 라디오는 노래자랑 대회 같은 곳에서 입상을 하고 받은 상품이었다. 겨울을 보내기가 너무 고통스럽고 추웠던 기억이 있다. 머리맡에 둔 물그릇이 아침에 보면 얼음덩이로 변하는 방에서 살 때 저렇게 많은 집들 중에 따뜻하게 살 수 있는 우리 집 한 채가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집념이 놀랍다.

아기일 때 아버지가 가야금을 사다주신 것이 아마도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음악이나 무용으로 유명했던 선화여중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종교재단 학교보다 일반 중학교를 선택토록 하셔서 대구에 있는 신명여중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만 다니고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철이 없었던 때라 겁도 없었다. KBS가 남산에 있을 때 부근에 있던 음악원을 찾아가 청소일이나 심부름을 하는 조건으로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노래 선생이 고교와 대학진학을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서울예고에 입학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고 입학에는 피아노 연주 등 레슨이 필요한데 또 무작정 서울음대 연습실을 찾아가 레슨비용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알게 된 분이 강신택 선생이었다. 그 분의 소개로 작곡가 선배언니를 만났고 서울예고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노래시험도 보았으나 면접시험에서 나의 학력을 보고 “우리 학교에서 검정고시로 입학한 학생이 아직 없다”면서 의아해하는 선생의 표정을 보며 불길한 생각을 했지만 결국 불합격됐다. 사실 합격을 해도 예고는 재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대학시험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지?

하하하. 그 때는 복수지원이 가능한데 원서비용을 아끼려고 숙명여대 한 곳만 냈다. 입학 후 교수가 이지연을 찾는데 동명이인이 있었다. 수석한 학생이 이지연이라는데 처음에는 내가 아닌 줄 알았다.


생활이 안정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대학 졸업반 때인 1984년 윤학원 선생이 지휘하는 대우합창단에 입단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국립합창단보다 네 곱 더 대우가 좋았다. 1989년 해체될 때까지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줄리아드 음악교육의 특색은 무엇인가? 스스로도 음악적 성장을 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명문으로 생각하는가?

연주든 성악이든 기본 소양과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입학도 힘들지만 졸업도 쉽지 않다. 줄리아드는 음악에서 세계적인 시각과 역사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이미 그곳을 거쳐나간 음악인들이 그대로 산 교본이 된다는 점에서도 음악적 큰 스케일과 꿈을 키우게 된다. 입학해 영어가 부족했지만 1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이나 형식보다 활동성과 전문실기에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재학 중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뉴욕지역과 동부지역에서 1위를 하는 등 학교 밖의 활동으로 교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분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테너 출신의 국제적인 음악인 백태범 선생이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했지만 이탈리아 발성의 특성을 가진 것을 장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분은 밸칸토 발성법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고 그에 많은 비밀이 있다고 보는 분이다.


밸칸토라면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로 18세기 이탈리아에서 비롯된 가창기법으로 알고 있다. 오페라에서 가장 이상적인 창법인데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그 비밀을 터득한 것인가?

성악가에게는 몸이 악기다. 노래는 목구멍을 열고 닫으며 나오는 소리를 호흡을 통해 실어내는 작업이다. 노래하는 사람에게 발성법을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새로운 테크닉을 터득했을 때만큼 큰 희열은 없다. 나는 백태범 선생을 만나면서 발성법 레슨을 다시 받았다. 한동안 활동을 접고 새로운 발성법에 몰두했고 미국에서 오페라 오디션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낸 것도 새로운 발성법을 익힌 그 무렵부터였다. 특히 오페라 <나비부인>은 모든 곡을 소화할 수 있어야하는 힘든 역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인을 비롯해 저명한 인물들을 많이 만났을 것 같다.

플라시도 도밍고(스페인 출신의 바리톤 가수)는 나를 만나면 소프라노 몽셰라 까바이에와 같다면서 극찬을 많이 한다. 그의 추천으로 <라보엠> 등 공연 계약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그의 매니저먼트에서 유럽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도록 권했지만 가족과 미국에서 합류해 사는데 다시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초청공연이 있으면 다녀오곤 했다.


유럽에서 보여준 공연은 어떤 작품들인가?

스페인의 알리깐데에서 <라 트라비아타>(춘희)에 출연했다. 작품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고급 창녀의 얘기인데 내게도 그런 숨어 있는 끼가 있다는 것을 느끼며 공연을 했다. 오페라 가수는 극중 인물과 살아 있는 듯이 영혼을 교감하는 일체가 되어야 풍부한 감성의 좋은 노래가 나온다.

이제 가족 얘기가 궁금하다.

내가 독학을 하던 시절 독서실에 출입할 때 평소 내가 앉던 자리를 차지해 앉아 있는 친구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녀가 시누이가 됐다. 1986년 결혼한 남편(조중현)은 과학기술원에 근무하다가 2000년 미국으로 건너와 함께 살며 사업을 하고 있고, 내가 미국으로 갈 때 3살이었던 아들은 생물학 전공의 대학생이다.


가족과 함께 고생을 많이 하신 아버님은?

가난 속에서 음악을 한다고 철없이 설쳐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시던 아버님은 화려한 무대에 오르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씀을 남기고 1983년에 떠나셨다. 아무것도 보여드릴 수 없었던 때였다. 어머님도 지난 9월에 사별했다. 그런데 4남2녀의 우리 친가쪽 집안에 있을 수 없는 비극이 두차례 찾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 부부 두 분과 남동생이 잇달아 떠나는 불행이 있었는데 작년에는 큰 오빠 부부가 몇 달 사이에 타계하시고 이어서 또 한 분의 오빠도 뒤를 따랐다. 그 사건으로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삶이 두렵고 무서웠다.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불행이다.

나는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이가 몽땅 빠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나는 교회에 다녀 비현실적인 생각을 안하지만 충격이 많았다. 대구 시공갤러리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한 큰오빠는 나의 장래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격려하던 분이다. 맨 나중에 돌아가신 오빠는 우리 집에 한 명이 더 떠난다는 불길한 얘기를 하셨다는데 정작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말이 됐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은?

경희대에서 연주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내가 잘나서 혼자서 이루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도 베풀어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국제무대에 설 수 있는 제자를 키우는 것이 앞으로 해야할 일 가운데 가장 큰 일로 생각한다. 내년에는 우리 가곡 중심의 독창회도 열고 음반도 낼 생각이다.

[인터뷰이 나우] 소프라노 이지연 씨는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개최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공연에 백작부인 역으로 열연해 갈채를 받았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의 3대 가극 중 하나로 모차르트가 가장 사랑한 오페라이다.


줄리어드대 음대 출신의 이지연은 미국 퀸즈 오페라 컴페티션 1위와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컴페티션 동부 1위 출신의 중견 음악인이다. 귀족과 서민으로 신분이 다른 남녀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사회의식을 투영한 <피가로의 결혼>에는 이지연 소프라노를 비롯해 김진추 이정현 홍은영 윤수현 정혜욱 등 국내의 뛰어난 성악가들이 대거 참여해 이틀에 걸쳐 관객들에게 다이내믹한 감동을 선물했다. 특히 이번 '피가로의 결혼'은 원작에 충실하면서 이 시대 남자와 여자가 공감하는 요소를 극대화 시켜 연출했고 모차르트 음악을 영상과 조명을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한층 많은 화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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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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