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화랑무예 창시한 추리작가 안홍열
대도화랑무예 창시한 추리작가 안홍열
  • 김두호
  • 승인 201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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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꿈 접고 전통무예의 고수로

【인터뷰365 김두호】사단법인 한국전통무예진흥회 대도화랑무예를 창시한 안홍열(70) 무도인(武道人)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특별한 인생을 살고 있다. 대학 연극영화과의 원조로 볼 수 있는 서라벌예대(중앙대와 통합)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한때 배우가 되기도 했던 그는 주간 현대연예신문 기자 경력도 있고 추리소설가로도 활동해 왔다. 지금도 종합문예지와 연예신문 발행인으로 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장기(長技)는 문필보다 무술에 있다.

중고시절부터 유도 공수도 당수도의 검은 띠를 두르고 도장에서 기합소리를 내며 성장했고 복싱과 보디빌딩 등 많은 운동을 접하기도 했던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운동만큼은 빼놓지 않았다. 각종 운동의 고수가 된 그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다양한 우리 고유의 무술을 통일된 명칭인 ‘국기 태권도’로 공식화 시켰지만 전통무예의 본류를 제대로 살려야겠다는 욕심에서 1998년 7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극기화랑기권도 중앙도장을 개관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 유현목 영화감독, 택견의 고수인 장동휘 영화배우가 고문으로 참여했다. 현재의 대도화랑무예의 전신이다.

전통무예에서 흔히 사용하는 화랑이란 이름은 삼국통일의 토대가 된 신라 화랑도에서 유래된 것인데 안홍열 무도인이 추구해온 대도화랑무예도 심신수련 정신을 화랑도에 두고 있다. 그러나 화랑도는 구체적인 기술면의 수련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대도화랑무예도 전래된 우리 고유의 음악과 춤, 체조, 선, 무술을 바탕으로 체력연마와 운동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동작으로 새롭게 창안된 무예로 볼 수 있다.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듯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강한 힘을 솟게 해 근육과 관절을 이완시키는 ‘얼쑤덩더쿵’이라는 선체조도 그의 도장에서 개발한 화랑수련법이다.
무술이 몸에 밴 삶을 살았지만 주먹을 휘둘러 본 기억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는 안홍열 무도인은 중년기 이후부터 무도의 내공을 쌓기 위한 기공수련을 시작해 그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고 있다. 고희에 이른 나이에도 발차기와 던지기 기법 등 고난도의 시범경기를 보여주며 선공 무예의 사부로 후진들의 귀감을 사고 있다.


화랑무예는 실전 종합무술

명함에는 대도화랑무예 대총사 겸 명예총재라는 직함과 함께 연예스포츠신문(일간) 회장,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 등의 직함들이 들어 있다. 요즘 활동 비중을 어느 쪽에 두고 있는가?
모두 관계하고 있다. 대총사란 이름은 창시자를 의미한다.

대도화랑무예란 한마디로 어떤 운동인가?
삼국통일의 문무정신인 신라 화랑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수련공법은 옛 사람들이 10년 수련하던 것을 단지 몇 개월이면 터득할 수 있게 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 재창시한 운동이다. 옛날에는 명산대천을 찾아다니고 부엌일에서 청소까지 10년 고행을 하며 스승의 높은 공력을 전수받았지만 지금은 무공 기술을 엑기스 형태로 함축해 가르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전수받을 수 있다.
내가 일생동안 배우고 연구하고 체험을 통해 정리한 화랑무예는 체력을 강하고 활기 있게 이끌어내는 내공과 외공 혼합운동이다. 눈으로 보고 공격과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육감과 기의 흐름으로 동작을 하는 실전 종합무술이다.

택견, 해동검도 등 전통무예를 표방하는 무예들이 많다. 사람을 통해 전수 전래된 무예나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기술을 토대로 하지 않고 명칭만 가져온다면 전통무예로 볼 수 없지 않은가?
무예는 싸움이나 전쟁을 시작을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우리의 전통 무예는 삼국시대부터 꽃을 피웠지만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전래 무예의 기술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통 전수자가 있을 수도 없고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정신과 기술의 뿌리는 태권도, 씨름 등 전통 운동이나 노래와 춤사위 같은 가무를 통해서도 배우고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각종 전통무예는 현대인이 조상의 숨결에 근접해 새롭게 복원하거나 재창조한 것으로 보면 된다.
대도화랑무예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선공, 둘째는 권법, 셋째는 검술이다. 선공은 건강 증진법이고 후자는 무술 경기공이다. 선공에는 움직이지 않고 수련하는 명상법(정공)이 있다. 그리고 움직이면서 수련하는 얼쑤덩더쿵 선공체조법과 자율파동을 통한 치료법인 외기법이 있다. 권법에는 또 손 팔꿉 발 무릎의 꺾기, 메치기, 조르기, 누르기 등 실전 종합 권법과 화랑검술이 있다.
우리는 선공 명상법을 천기신통법이라고 부른다. 정공 , 내공으로 분류도 하는데 움직이지 않고 서서 하거나 누워서, 또는 앉아서 기를 축적시키는 공법이다. 대부분 단전호흡을 통해 아래에서부터 기를 축적하여 위로 올라가게 하지만 선공 명상법은 반대로 위에서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편안한 호흡법을 통해 수련한다. 의식적인 단전호흡법으로부터 오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효력 있는 공법이다.

‘얼쑤덩더쿵 선체조법’이란 이름이 재미있다. 춤을 추듯이 보여주는 운동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구동공으로 일컫기도 한다. 움직이면서 근육과 관절을 이완시키면서 호흡법과 정신수련을 동시에 하는 공법이다. 우리 고유의 춤사위와 체조를 혼합 변형하여 개발한 체조다. 신명나는 우리 고유의 덩더꿍, 굿거리 등의 장단에 맞추어 덩실 덩실 춤사위와 체조를 한다. 부드러움 속에 강한 힘이 소용돌이치고 빠른 곡에서 빠르고 좀 과격하게 근육을 이완시켜 주면 몸 안의 폐기운이 밖으로 발산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온몸에 자연의 기를 모았다가 빠른 음악과 동작으로 폐기를 내뿜는다. 장단에 맞추어 움직이면서 정신을 집중시키면 호흡과 장단을 통해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정신이 집중되어 있을 때 선체조에 몰입되면 자신의 호흡을 통한 최고 최저의 상태가 자유롭게 유지되고 동적 수련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심신 운동은 인내력과 강한 심성을 심어주고 자아를 성숙케 한다. 운동을 제대로 하면 신체의 균형이 잡히고 오장육부의 기능도 강화 된다. 춤추듯이 움직이지만 분출되는 에너지는 평상시 자신의 에너지보다 파워가 3∼30배까지 상승한다.

직접 대련 시범을 보이는 안홍렬 대총사


치료적인 효과가 있다는 자율파동을 통한 외기법이란 무엇인가?
자율 파동공은 다른 기법처럼 미리 짜여진 격식과 순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색다른 공법이다. 의식적으로 어떤 동작을 이끌지도 않으며 저절로 일어나는 동작을 의식적으로 멈추지도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몸과 마음이 불편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자연 발생적인 동작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하는 하품이나 기지개 따위는 따분한 마음의 상태나 피곤한 육체적 상태를 해소하려고 저절로 일어나는 생태현상이다. 이러한 상태를 조성하는 것이 정공이다. 정공의 반응 중에 외동이 있다. 정공에서 호흡조절과 정신 집중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내기가 발동하여 활발하게 온몸을 운행하기 시작한다.
외동은 처음에 손끝의 떨림이나 몸통의 가벼운 움직임으로 나타나는데 의식적으로 억제하면 대개는 가라앉게 된다.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운동과 비교해서 설명해 달라.
한마디로 대도화랑무예는 손, 발, 팔꿉, 메치기, 조르기, 누르기, 꺾기 등으로 다양하게 공격 방어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실전 종합무술이다. 각종 무술은 모두 서로 다른 특징과 장단점이 있다. 태권도는 발 위주의 상단 공격위주로 하여 상대방과의 사정거리가 넓어야 공격하기가 좋고, 권투는 손으로만 공격과 방어를 하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도 유리하다. 또한 유도는 상대방을 잡아야 공격을 하기에 태권도나 유도와는 반대가 되는 조건을 가져야 한다.
화랑권법은 그 모두의 특성을 활용한다. 공격과 방어 연습을 하는 과정을 통해 심신의 힘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체험, 그리고 반사 신경의 양성을 통해서 정력을 가장 좋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운동정신을 싸움에 두지 않고 체력단련과 바람직한 인간으로서의 덕성과 참된 인격 함양에 두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연예기자가 된 공채 배우

한때 영화배우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인생은 사연이 많다. 영화배우 이대근, 작고한 연기인 김난영과 성우 최응찬 등이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동기들이다. 1962년 신인배우 공모를 통해 선발되어 강성우 감독이 연출한 <피가 흐르는 강>이라는 전쟁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 후 대학은사인 안종화 감독이 <나무들 비탈에 서다>(뒤에 최하원 감독이 연출)를 준비할 때 김기영 감독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로 스타가 된 김운하와 나를 두고 캐스팅에 고심할 무렵에 입대영장이 나왔다. 안종화 감독이 병무청에 연락해 6개월 연장을 시켰으나 촬영이 지연되면서 결국 군에 입대했고 제대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제대 후 스스로 진로를 바꾼 것인가?
다시 충무로를 찾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마침 선배가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고 해서 따라 다녔지만 뚜렷한 비전이 없었다. 그 형 소개로 김효천 감독도 만나 충무로 여관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돕기도 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도 운동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신문에 난 연예신문 기자 모집을 보니 마감시간이 임박해 도장에서 곧장 신문사로 달려갔다. 응시자가 엄청나게 몰려 있었다. 그런데 면접을 보던 사장이 코트 밖으로 빠져나온 빛바랜 검은 띠를 보고 신기해 하며 대학을 나온 사람이 운동까지 고단수라 호감이 간다면서 합격시켰다.
출근 첫날 KBS 방송국 국장 인터뷰 지시를 했다. 경력기자도 함부로 접근 못하는 인물을 기사 한 줄도 써 본적이 없는 신입 기자에게 시켰지만 나는 겁 없이 남산 방송국을 찾아가 국장실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놀란 여비서가 토끼눈을 뜨고 달려나와 문을 열었고 마침 국장도 주먹 노크소리를 듣고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신분과 방문이유를 밝히고 취재차 왔으니 우선 사진과 이력서부터 요구했다.
그때야 국장의 안색도 밝아지면서 요청을 들어주었다. 신문사 사장은 방송국 국장을 만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로부터 취재부장까지 하며 영화기자로 분주하게 살았다. 한 때는 접었던 배우가 될 기회도 있었지만 다시 그길로 들어서지 않고 연예잡지발행인이 되기도 했지만 운동은 천직삼아 쉬지 않고 계속했다.

영화배우인 고 장동휘씨는 택견의 고수였다. 그는 안홍렬씨가 운영하던 극기화랑기권도 중앙도장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영화가 연간 200여편 이상 제작되던 1960년대 충무로에서 연예신문이나 영화잡지의 기자 활동을 했으면 재미있는 일화도 많았을 것 같다.
그 무렵 충무로는 스타의 거리였다. 그러면서 한편은 그들의 그늘 밑에서 가난하고 이름 없는 별들의 애환도 쉬지 않고 피고 졌다. 밝히기 곤란한 인기 스타들의 비화도 수없이 마주쳤다. 승진할 기회도 많았지만 현장기자가 좋아 취재부장을 하다가도 그만두고 말단 기자로 뛰었다. 운동을 좋아한 체질 탓인지 한자리에 앉아 있기보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활동성 일이 마음에 들었다.

신문과 잡지를 파는 거리의 좌판대 상인을 처음으로 조직화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무렵 돈을 많이 벌었다는 얘기도 따른다.
기자생활 3년째가 되던 해였다. 그 무렵은 거리에 신문가판대나 보급망이 따로 없고 길바닥에 자리를 펴놓고 신문 잡지를 파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뜨이던 시절인데 내가 선배의 태권도 도장을 찾아가 직업이 없는 수련생 20명으로 지역별 가판 판매 보급 조직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사실은 내가 만든 ‘스타앨범’이란 책을 팔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한 것인데 조직원들이 판매수익금을 들고 사라지는 사고가 잇달아 처음에는 돈을 벌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신문사들이 가판 유통망을 구축해 신문잡지의 가판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때 이소룡의 사망소식에 맞추어 ‘이소룡은 살아 있다’와 배우 김지미, 가수 나훈아와 관련된 ‘나훈아 아내는 나였다’라는 읽을거리 책을 가판대에 내놓아 크게 히트를 쳤다. 한동안 나는 가판용 책에 재미를 붙여 그 사업을 하기도 했다.

기공이나 도술로 쓰러진 환자를 일으켜 세운다는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나는 39살 때 호홉기 질환으로 쓰러져 장기간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한 적이 있다. 아버지 대에 3형제 분이 모두 기관지염으로 타계해 피할 수 없는 유전병으로 생각되었다.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다가 치료를 포기하고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내가 익힌 운동과 호흡법을 통한 기공으로 완치했다. 이어서 혈압으로 쓰러진 음식점 환자에게 내 몸에서 나온 기를 주입해 정상으로 회복시킨 일과 차안에서 복통으로 혼절한 손녀아이의 등에 손을 넣어 기 치료로 회복되는 결과를 보고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체육관 일로 출장 간 경북 언양에서는 뇌출혈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분을 기로 일으켜 세운 적이 있다. 그렇게 기가 통할 때가 있지만 기가 의술을 대체할 수 있다거나 나의 기공 능력이 만능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일들을 겪게 된 나의 기공법은 누구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독학과 자체 실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공 수련

누구나 쉽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기(氣) 운동을 소개해 달라.
사람은 대다수 한쪽 손을 많이 사용한다. 오른손으로 글을 쓰거나 물건을 집는 오른손잡이 사람은 왼손으로 글을 쓰는 훈련을 하면 자세도 교정되고 몸의 균형도 바로 잡을 수 있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숫자를 1에서 100까지 왼손으로 쓰거나 0자 숫자만 100까지 헤아리며 쓰는 훈련을 하면 건강에 좋은 기공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숫자를 세면서 글씨를 쓰면 먼저 마음을 집중 시키는 명상수련이 되고 또 그로인해 오른손만 사용해 불균형이 된 몸의 자세가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대도화랑무예에서는 발차기 던지기 모든 것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다 사용한다. 우리의 몸은 뒤 틀린데서 만병이 발생한다. 자세만 똑 바르면 만병이 없어진다. 운동이 건강의 보약이라고 하지만 운동도 자신에 맞게 하면서 앞뒤 좌우 균형을 잡는 운동이 효과적이다.
나도 꾸준한 반대 운동법으로 지금은 90% 정도 신체 균형을 되찾았다. 누구에게나 어깨나 허리 등이 아프다고 하면 이러한 운동법을 가르쳐주어 많이 치유되었다고 들었다.
중국인들은 기공체조가 생활화 되어 있다. 어떤 룰에 얽매이지 말고 춤추듯이 제멋대로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면 건강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꺾어옆차기 시범을 보이는 안홍렬 대총사
오른손잡이는 왼손, 왼손잡이는 오른손을 자주 사용하면 기공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를 느끼게 한다. 추리소설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가?
기자로 활동할 때 <얼굴 없는 재벌>이라는 만화 스토리를 쓴 적이 있다. 주변에서 그걸 영화로 만들려고도 했고 또 추리소설로 옮겨보라고 권해 책으로 만든 것이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유령이 아닌 여자> <안개부인의 검은 돈> <금빼지>등 추리소설도 발표하면서 내 본업인 무예와 건강에 관한 <운동과 건강의 궁합> <대혁명 키 7센티 더 크기> <기적의 당뇨병 완치> 등 10여권을 펴냈다.

앞으로의 특별한 계획은?
우선 내 몸이 건강하고 이젠 자식들도 장성하여 걱정이 없다. 앞으로의 꿈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이나 쓰면서 운동을 할 수 있을 때 까지 계속하면서 내년 안으로 1.000페이지 정도 되는 화랑무예 교본을 내놓을 생각이다. 칠순에 접어들었지만 지금도 나는 젊은 친구 몇 명 정도는 대적할 힘이 있다. 하하하.

가족을 소개할 수 있는가?
큰아들 안재범(42)은 스포츠의학을 전공해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인천광역시 장애인체육회 관장으로 있다. 둘째 아들 안재권(41)은 동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수입자동차 회사의 지점장으로 있다.

[인터뷰이 나우] 추리작가이면서 고수(高手) 무도인(武道人) 안홍열 대도화랑무예 총재는 요즘 무예 교본 기공편의 집필을 끝내고 출간을 준비중이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무술로 연마한 강건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안 총재는 교본에 소개할 사진도 다양한 액션 자세를 직접 보여주는 장면을 영상 카메라에 담고 있다. 전통 무예라고 하지만 대부분 선조들의 기공무술을 기초로 해서 안 총재가 응용하고 창안한 기법들이다. 교본은 1000페이지 분량의 대작으로 올해 안에 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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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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