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6)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6)
  • 임정진
  • 승인 200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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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6. 잠 못 이루는 청춘들



천재 어머니는 천재 방에 불이 꺼지지 않자 의심스러워 들어가 보았다.

「그럴 줄 알았어. 책상 위에 책만 펴놓고 저는 신나게 자고.」

천재 어머니는 천재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책상을 정돈해 줄까 하고 어지럽게 늘어놓은 책을 가지런히 쌓았다. 연습장이 펼쳐 있는 것을 들여다보니 거기엔 깨알 같은 글씨로 같은 문장이 몇 번이나 써져 있었다.

<난 졸립지 않다. 난 졸립지 않다...>

천재 어머니는 웃으며 불을 끄고 나갔다. 천재는 또 양호 선생님 꿈을 꾸며 단잠을 잤다.


은주는 학기말 고사 준비를 하면서 소연이에게 빌린 변진섭 테이프를 듣기로 하였다.

은주 어머니는 갖가지 과일을 믹서에 넣어 주스를 몇 잔 만들었다. 다른 것은 냉장고에 놓고 그중 한 잔을 가지고 은주 방에 들어갔다. 은주는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을 들으며 공부를 하느라 어머니가 방에 들어선지도 몰랐다.

은주 어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은주 책상 위에 주스잔을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은주는 흠칫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스톱 스위치를 눌렀다. 은주는 고개를 숙였다.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겼구나. 시험 끝나면 음악회에 보내주마. 미국에서 좀전에 전화가 왔다. 네 오빠하고 새언니 둘다 논문 통과했단다. 박사 부부가 된 거다. 얼마나 경사스럽니? 아마 곧 귀국할 거다.」

은주는 조금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은주 어머니는 카세트 라디오를 책장 안에 집어넣었다.

「이거 마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라. 난 네가 잘 때까지 거실에서 책 보며 기다리겠다.」

어머니는 살짝 문을 닫고 나갔다. 은주는 가만히 주스 잔을 노려보더니 주스 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곤 창문을 열고 주스를 쏟아 버렸다.


창수는 삼일 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박 선생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창수를 찾을 결심이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창수의 소식을 몰랐다. 박 선생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체육관을 찾아갔다.

「혹 창수 소식 아는 애 있나 물어 봐 줘.」

사범은 연습하던 관원들을 모이게 하고 창수 소식을 아느냐고 물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황전갈파에 들어갔다던데요.」

「그래? 걔들은 어디가 아지트야?」

「낮에는 용산전자상가 어디서 히로뽕 팔고 밤에는 삼각지 부근의 쪽방에 모인다던데요. 제가 말했다고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박 선생은 학기말 고사가 시작되기 이틀 전에 간신히 창수를 찾아냈다. 만나자마자 멱살을 잡고 학교로 데리고 갔다. 학교 체육관으로 창수를 끌고 간 박 선생은 말도 없이 창수를 집어 던졌다. 몇 번이나 그렇게 집어 던지자 창수는 고통으로 몸을 웅크리고 뒹굴었다.

「일어나.」

창수는 기를 쓰고 일어섰다. 하지만 박 선생은 창수가 몸을 채 펴기도 전에 또 집어 던졌다. 창수는 힘없이 나뒹굴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주먹을 쓰겠다고 뒷골목을 출입해? 그렇게 주먹에 자신 있으면 먼저 나부터 손 좀 봐주시지. 권투 선수 되라고 체육관에 넣어 줬더니 깡패가 돼? 자, 날 때려 눕혀.」

창수는 누운 채 주먹을 쥐고 이를 꽉 물었다. 박 선생은 창수에게 다가와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박 선생과 창수는 서로 노려보았다. 누구로 향한 것인지 종잡을 수는 없는 분노가 두 사람 눈에서 불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너와 난, 선생과 제자가 아니야. 사나이와 사나이일 뿐이야. 패배자가 학교를 떠나기로 하지. 자 덤벼, 어서, 어서 해봐, 임마.」

창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박 선생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철썩.>

창수의 뺨에 박 선생의 넓적한 손이 날아왔다. 창수는 놀라고 모욕당했다는 심정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어 박 선생을 노려보았다.

「이래두, 이래두 안 해.」

박 선생의 손은 창수의 뺨을 좌우로 너댓 번이나 후려갈겼다. 창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익」

창수는 소리를 내지르며 박 선생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박 선생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창수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어쩔 줄 몰랐다. 천천히 일어서는 박 선생의 입가엔 의외로 옅은 미소가 감겨 있었다.

창수는 눈물이 배어 나오는 걸 느끼며 박 선생에게 다가갔다.

「서... 선생님.」

박 선생은 창수와 마주서서 환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후련하냐?」

창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바로 들 수가 없었다.

「후련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어?」

「네에.」

「죄송하지 않게 해주랴?」

창수는 박 선생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박 선생의 주먹이 창수의 턱으로 날아들었다. 창수는 좀전의 박 선생과 마찬가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제 됐지?」

박 선생은 느긋하게 말했다. 창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슬며시 웃음이 나오던 창수는 벌떡 일어나 <선생님>하며 박 선생의 품을 파고들었다.

「자식.」

박 선생도 힘차게 창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진수는 말로만 듣던 일일찻집이란 데를 처음 가보게 되었다. 같은 반의 효선이가 강매하다시피 일일찻집 티켓을 떠맡긴 이유도 있었고 한번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다. 효선은 진수에게 오기만 하면 끝내 주는 음악과 신선한 파트너를 제공하겠다고 떠들었다.

「효선아, 그럼 거기서 미팅도 하는 거야?」

「그럼 얘. 내가 넌 특별히 신경 써서 파트너 골라 줄게. 만약 맘에 안 들면 2명, 3명이라도 해줄게.」

「근데 일일찻집 하면 보통 명분이 있잖아. 심장병 어린이 돕기 라던가 아니면 청소년 가장 돕기라든가 그런 거...」

「얜, 촌스럽기는, 그런 거 걸고 하는 애들 중에 이익금 진짜 그렇게 쓰는 애가 있는 줄 아니? 우린 비열하게 그런 짓 안 한다. 우린 딱 까놓고 하는 거야. 돈 벌라고. 뒤로 호박씨 까는 거보다 낫지 뭐.」

「몇이서 같이 하는 건데?」

「응, 여자 다섯, 남자 다섯. 남자애들은 성훈중학교 애들이야.」

「그렇게 돈 벌어서 뭐 할 건데?」

「티켓 한 장 팔아주면서 별 걸 다 꼬치꼬치 캐묻네. 천원이나 얼른 내. 돈 벌어서 뭐 하긴, 디스코텍 가서 하룻밤 신나게 놀고 그래도 돈 더 남으면 싸구려 뷔페라도 가는 거지 뭐.」

그래서 진수는 일요일에 화실 간다고 나서서 약도에 그려진 다방을 찾아갔다. 다방 입구에서 진수는 벌써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다방 안은 담배 연기가 꽉 차 숨쉬기가 힘들었고 자리마다 아이들이 꽉 차 떠드는 바람에 음악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된 상황이니 DJ는 더욱더 요란한 음악만 트는 모양이었다. 일부는 테이블 사이에 서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진수 왔구나. 어서 와. 자리가 모자라니까 합석해.」

앞치마를 두른 효선이가 진수를 구석 자리로 데리고 가 앉혔다.

「티켓 이리 줘. 음료는 티켓으로 교환해 마실 수 있어. 콜라? 커피? 사이다?」

「응, 코, 콜라 줘.」

「그래.」

진수는 웬 남자애 두 명과 여자애 한 명이 앉은 테이블에 엉거주춤 끼어 앉아 효선이가 가져다 준 콜라를 우선 마셨다. 어찌나 얼음을 많이 넣었는지 콜라맛을 느낄 수도 없는 물 콜라였다. 조명은 또 어찌나 어둠침침한지 앞에 앉은 사람 코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진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세 아이들은 노래에 맞춰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를 들썩이다 <소방차>와 <세또래>를 나란히 놓으면 누구와 누구를 짝짓는 것이 좋겠는가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는데 아주 즐거워 보였다. 진수는 멀거니 춤추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다방에서 이렇게들 춤추는 걸 보니 이상하게도 불쌍해 보였다.

「진수야, 미팅해. 괜찮은 애 하나 대기시켜 놨어.」

「아냐, 나 좀 앉아 있다 그냥 갈래.」

진수는 미팅을 이렇게 난장판인 곳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효선이는 막무가내로 진수를 끌고 가 어떤 남자애 앞에 앉혔다.

「인사해요. 진수야, 이쪽은 박형식, 이쪽은 김진수. 그럼 재밌게 얘기해요.」

효선은 간단히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더니 진수에게 살짝 귓속말을 하고 테이블을 떠났다. 진수는 <매상 좀 올려 줘>하는 효선의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했다. 효선이말고 다른 아이가 메뉴판을 들고 곧 다가왔다. 진수는 <나 콜라 마셨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형식이는 메뉴판을 진수에게 넘겨줬다. 골라 보라는 제스처를 했다. 진수는 컴컴해서 잘 보이지도 앉아 간신히 메뉴를 읽었다. 너무 비쌌다.


팝콘과 크래커 1,000원

캔디와 쵸코렛 1,500원

주스 1,500원

맥주 2,000원

칵테일 2,500원


아까 마셔 본 콜라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것들도 뻔할 것 같았다. 그중 제일 싼 팝콘을 시켰다. 형식은 담배가 얼마냐고 묻고는 주문받으러 온 아이에게 천이백 원을 주었다.

팝콘이 올 때까지 형식과 진수는 DJ가 하는 엉터리 퀴즈문제를 들었다. 팝콘이 오자 진수는 저도 모르게 <애걔걔> 하는 소리가 나왔다. 손바닥만한 은박 접시에 팝콘이 간신히 한 겹 깔려 있고 크래커 세 개가 올려져 있었다. 형식이 주문한 담배는 리본에 묶인 두 개비가 다였다.

「너무 비싸네요.」

형식은 담뱃불을 붙이더니 씩 웃었다.

「말 놔, 너 일일찻집 처음 와보니?」

진수는 처음 본 남자애에게 반말을 쓰기가 뭣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일일찻집 다 이래. 원래 다방에선 술은 못 팔게 되어 있는데 애들은 매상 올리려고 막 팔지. 안 그러면 다방 임대료 빼고 남는 게 없으니까.」

「임대료가 얼만데?」

「동네마다 다르겠지. 좀 변두리는 한 15만 원 하고 좀 깨끗하고 중심가에 있으면 30만 원도 받고 그러나 봐. 한나절 빌려 주고 그 정도 수입이면 괜찮은 거지.」

「이런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다들 그래. 한번 와보면 실망하고 안 오지. 난 친구놈이 한다고, 안 오면 죽인다고 해서 별수없이 왔어. 일요일에 어디 갈 데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몇 학년이야?」

「그런 건 알아서 뭐 하니? 다시 만날 것도 아닌데.」

진수는 형식이란 애가 학년도 말해 주지 않자 몹시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억지로 하는 미팅이라지만 그 정도 친절도 베풀지 않는 무례한 남자애와 마주앉아 있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진수를 화를 참으며 팝콘을 씹었다.

형식은 화가 난 진수가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학년을 말하고 학교를 말하다 보면 야간이라는 것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야간에 다닌다고 하면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동정을 했다. <이 여자애에게서까지 그런 취급을 받을 필요가 뭐 있는가.> 그는 그런 생각이었다. 형식은 언제나 집에서 일찍 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야간에 다니는 애라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립 도서관에서 가서 신문도 보고 잡지도 보다가 잠도 좀 자고 학교로 가는 날도 있었고, 만화방에서 죽치다 학교 가는 일도 많았다. 학교에도 도서관이 있지만 주간 아이들 자리잡아 놓은 데 앉아 있기도 싫었고 주간 아이들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야구 시합 응원 가는 것도 언제나 야간부였고 자연보호 행사에 동원되는 것도 야간부였다. 등록금은 같이 내면서도 언제나 차별 대우 하는 학교에 일찍 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늘 등교 시간까지 밖에서 방황하느라 용돈도 많이 필요했다.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야간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 사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야간에 다니는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지는 않았다.

진수는 팝콘을 다 먹고 음악을 좀 듣다 일어섰다.

「나 그만 갈래.」

「그래.」

형식은 진수가 어서 가기를 바란 듯 선선히 대답했다. 진수는 더욱 기분이 나빴다. 입구로 나오자 효선이 진수를 붙잡았다.

「얘, 왜 벌써 가니?」

「응, 할 말이 없어서.」

「그럼 다른 애 해줄게. 좀 기다려.」

「아냐, 나 갈래.」

「진수야, 지금 여자가 모자라. 미팅 시켜 준다고 선전하고 티켓 팔았는데 여자가 없어서 미팅 못 하고 가는 애들이 화낸단 말야. 그럼 매상에도 막대한 차질이 있어. 너 두 탕만 더 해. 응?」

「싫어, 얘. 내가 무슨 네 밥이니?」

진수는 효선을 뿌리치고 나와 버렸다. 화실에 가봐야 문도 잠겼을 테고 집에 가기도 뭣해서 진수는 망설이다 독서실로 갔다. 독서실에는 엉덩이에 납덩이 매단 애들이 주르르 앉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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