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쌀 나눔 운동으로 세상을 데우는 이선구 이사장
사랑의 쌀 나눔 운동으로 세상을 데우는 이선구 이사장
  • 김두호
  • 승인 200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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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의 늪에서 깨달은 나눔의 성(城)이 화환 대신 쌀 쌓기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사랑의 쌀 나눔 운동’은 이제 특정 단체의 활동 영역을 뛰어넘어 사회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번져가고 있다. 각종 행사장에 축하화환 대신 불우 이웃을 위해 쌀을 기증하자는 것으로 시작된 쌀 나눔 운동은 무료급식용 식당차량을 통해 거리에서 직접 밥상을 차려주는 ‘빨간 밥차 운동’까지 발전했다. 쌀 나눔 운동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잇는다. 개인에서 단체, 공공기관에서 기업체 직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쌀 나눔 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이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을 둔 ‘사랑의쌀 나눔운동본부’의 이선구 이사장(58)이다. 한 때 천 억대의 자금을 움직이던 건설회사 CEO가 사회사업가로 변신해 불과 3년 만에 가장 실질적이고 소중한 이웃돕기 실천운동의 성공사례를 이끌어냈다. 그의 봉사사업은 흡사 설계도에 따라 빠른 공정으로 축조되는 건설사업처럼 창립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종 사업을 단계적이고 공격적으로 쌓아 올려가고 있다.


이선구 이사장에게 사랑의 쌀 나눔 운동은 봉사인생의 제2막이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한국신장협회를 설립해 장기기증 캠페인과 함께 불행한 환자를 돕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질곡의 여정’으로 표현했다. 그의 봉사정신은 가난과 실패와 성공을 고루 체득하면서 순이 돋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가난하게 자랐고 거부가 되었다가 IMF로 빈손이 되었을 때 그는 “손에 움켜쥐고자 하는 것은 언제라도 다시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쌓아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을 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바로 나눔의 성(城)이라고 밝히고 있다.



쌀 나눔 운동은 특색 있는 사업입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요?

관심을 둔 것은 10년도 넘습니다. 나는 1983년 대한주택건설협회 창립당시 전국 조직담당 임원으로 참여했고 초대 회장이 현재 우리 나눔운동본부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허석 회장입니다.

주택 건설업체가 분양을 위해 모델하우스를 세우면 100여개 이상의 대형 화환이 들어옵니다. 그걸 보면서 허 회장과 나는 너무 아깝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화환 한 개에 10만원으로 보면 1천만 원 이상이 꽃값으로 날아가는 것이지요. 화환은 시들면 쓰레기밖에 안됩니다. 연간 모델하우스가 전국에서 500여 곳 오픈한다고 볼 때 꽃값만으로 백만명 이상이 먹을 쌀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06년 사랑의 쌀 나눔 운동본부를 설립해 모델하우스 화환부터 기증용 사랑의 쌀로 바꾸자는 운동을 시작을 했습니다.

후원기관으로 대한주택건설협회, 주택산업연구원, 대한주택보증 등 주택건설기관이 앞장을 섰으나 지금은 계층과 업종분야를 가리지 않고 참여합니다. 결혼식이나 사무실 이전과 개업식장에서도 ‘쌀화환’을 챙겨줍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기증받은 지역의 장애가정, 독거노인시설이나 결식아동을 위해 전달하게 됩니다.


기증 받은 쌀을 적절하게 분배해 주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국의 복지시설이 모두 대상인데 지원하는 곳이 200여개소가 넘습니다. 대한주택보증 같은 기관은 수 백가마를 기증해옵니다. 또 현금 지원을 해오면 사회복지 기관의 시설물 개보수 사업비로 전달해요. 금년은 18곳, 내년은 30개 지역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자립 능력이 부족한 복지시설을 우선으로 도와주고 있어요.



쌀 나눔 운동과 함께 밥차도 운영하고 있지요?

전국에 혼자 사는 노인이 97만 명에 이릅니다. 자녀가 있어도 돌보지 않는 독거노인까지 150만 명으로 추산되는 데 그분들을 생각하며 밥차를 마련했습니다. 또 거리의 노숙자도 가장 불행한 소외층입니다. 빨간색으로 된 식당차를 기증받아 ‘빨간 밥차 운동’이란 이름으로 현재 서울역과 주안역 부평역 영등포역에서 무료 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현장에 가서 밥을 퍼고 있습니다만 모두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교대로 밥 짓고 반찬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밥상을 차려주는 일을 합니다.


혜택 받는 사람의 숫자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일주일에 1500여명의 식사를 대접해왔어요. 12월부터는 안산과 신도림역, 동인천역으로 확대해 일주일에 3500여명, 한 달에 1만5000명에서 2만 여명 분의 식사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1년이면 20만 명까지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쌀은 충분하지만 김치나 국거리 등 부식은 한 주에 25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지만 주안장로교회, 서울역의 농협하나로마트, 드림아카데미, 한성식품 등에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밥차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동 없이는 운영이 힘들겠습니다.

사실입니다. 중노동입니다. 특히 그릇에 불결한 오물이 묻어나와 식기를 가마솥에 넣고 세척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랍니다.


사랑의 쌀 나눔운동을 하시기 전 건설업체를 경영하셨다면서요?

내 인생은 소설입니다. IMF때 건설기업의 파산 도미노에 휘말려 천억 대의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가 순식간에 빚더미를 안고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참담했지요.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나도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던 사람입니다. 모질게 고생하며 성장해 이제 나는 인생의 승자가 되었다며 골프채나 휘두르며 살다가 다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나 자신이었습니다. 손에 움켜쥐고자 하는 것은 언제라도 다시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래서 쌓아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이웃을 위해 나눔의 성을 쌓아올려야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성장기에 어떤 고생을 하셨어요?

충남 천원군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아버님이 별세한 뒤 집안이 기울었고 어머니와 서울로 이주했어요. 서대문 충정로에서 어머니가 작은 식당을 운영했지만 끼니를 떼우기 힘들어 밀주찌꺼기를 먹고 학교에 갔다가 비틀거리는 술기운이 나타나 선생님한테 혼난 일도 있습니다. 8살 때였어요. 9살 때는 살던 허름한 집에 불이나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어머니는 유치장에 가셨어요. 소방차가 출동하면 벌금을 내야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처벌을 받은 겁니다. 9살 된 나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3주 동안 굶어 죽을 뻔했지요. 무악재 넘어 당시 논밭이었던 불광동 냇가에서 올챙이를 잡아 다른 아이들에게 놀이감으로 판 돈으로 국수를 사먹은 기억이 납니다. 잠 잘 집이 없었으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기도 하고.

중학교도 고학으로 시작했지요. 한국일보 신문 배달도 하고 상이용사 출신의 전매청 사람이 의족에 몰래 숨겨 가지고 나온 가치담배를 팔아주는 일에서 껌팔이, 구두닦이, 여름에는 아이스케이크장수, 빈병을 수집해 파는 고물장수, 비가 오면 비닐우산장수 등 안해 본 장사가 없었어요. 껌 팔고 구두닦이 할 때는 남의 지역에 침범했다고 얻어맞기도 하고.

중학 3학년 때는 장승백이 철거민촌으로 옮겨가 천막 하나에 4가구가 살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셨는데 그 무렵 불량배와 어울려 다니다가 어머니에게 죽도록 맞았어요. 당신은 불교신자인데 급하니까 교회에 데리고 가셨어요. 나는 비로소 선량하게 살아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고 주일학교 여선생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 불량배와 계속해서 어울렸다면 전과자로 교도소에서 세월을 보냈을 겁니다. 그때 친구들이 대개 그렇게 인생을 시작했거든요.

학생시절 내 가방은 언제나 너덜너덜 했고 교복도 얻어 입고 새 책을 사 본 기억도 없어요.


성공담도 듣고 싶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스물세 살 때 서울 신촌에서 인테리어 가구점을 시작했어요. 소규모 주택업자를 상대하면서 주택사업에 눈이 떴고 강남에서 단독 주택을 짓기 시작했지요. 1976년부터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서 연립주택으로 규모를 키우고 1979년에는 영진프라자건설회사를 경영하는 중형 건설사업체로 성장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무실이 있는 동북빌딩(여의도), 강남의 팔레스호텔, 마포 가든호텔, 종로3가 공평빌딩 등을 모두 내가 지었지요.

사업 이익과 부동산 등 개인재산이 주체 못할 정도로 불어났고 틈이 나면 여행하며 골프치고 마음대로 즐기며 살았습니다. 내가 지원하는 사회단체에서 준 직함만 13개가 됐어요. 그러다가 IMF로 상호 보증관계에 있던 건설사들과 한꺼번에 무너졌지요. 아마도 1천여개의 건설사가 망했을 겁니다. 죽기로 작정하다가 정신을 차린 어느날 가족을 불러놓고 선언을 했어요.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봉사의 길을 가겠다고 했지요.


한국신장협회를 창립하실 때는 사업이 번창할 때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때도 뭔가 좋은 일을 찾아다녔어요. 사회사업을 하는 라이온스나 청년회의소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사업을 할 때인데 어느날 퇴근길에 승용차 안에서 <사랑의 꽃다발>이라는 심야 기독교방송을 듣다가 신학대에서 강의 중 신장병으로 쓰러진 목사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그분의 부인이 자신의 콩팥을 이식하고 싶지만 수술비가 없다는 호소를 듣고 바로 방송국에 전화를 해 수술비를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나는 그분들을 통해 며칠에 한번 붉은 피를 밖으로 끌어내 투석하는 신장병 환자들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신장병 환자를 돕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분이 3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지요.

1990년 초 사단법인 한국신장협회를 만들어 장기기증 운동도 폈지만 법적인 제약도 많아 뇌사자 장기기증 관련법부터 만들도록 5년간 투쟁도 했어요. 전국을 돌며 캠페인 강연도 하고. 인간이 죽으면 그냥 쓸모없이 한 줌의 재가 되지만 장기 기증을 하면 한사람의 장기로 두 사람이 눈을 뜨게 하고 또 신장병 환자까지 7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탤런트 한명이 뇌사상태로 쓰러졌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가 부모에게 장기기증을 설득했지요. 어머니는 자식을 두 번 죽인다고 반대하셨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좋은 결과가 따랐습니다. 식물인간은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예도 있지만 뇌사상태는 인공호홉기를 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법을 만들 때 김수환추기경을 비롯해 불교 기독교 지도자를 모두 만났는데 부모가 준 몸을 기증할 수 없다는 유림쪽의 반대가 심했어요.

서울 정도600주년 기념행사 때는 ‘사랑의 새생명 600명 살리기’ 모금운동과 장기 기증행사를 제안해 채택이 되기도 했지요.


불행한 이웃이라면 가난보다 오히려 병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더 절박한 처지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장협회 일을 보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9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던 어머니 한분이 쓴 246쪽의 유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 고아로 자라나 장애인 남자를 만나 휠체어를 끌며 살다가 신부전증으로 시달림을 받게 되자 남자의 짐이 되기 싫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두 눈을 비롯한 장기 기증과 몸까지 해부용으로 맡기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자살이 미수에 그쳐 기구한 내용이 밖으로 알려졌고 그 분에게 자신의 콩팥을 이식시켜 주겠다는 분이 나타나기도 했어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신앙인이었는데 조직검사 결과 이식수술이 가능하게 되어 신장협회와 병원이 절반씩 지원해 강동성모병원에서 시술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불행한자도 있지만 곁에는 그들을 돕는 분도 있다는, 어둡고 아름다운 양면을 보여준 사례였지요. 건강을 회복한 환자를 둘러싸고 나도 울었지만 다들 많이 울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완도에서도 한 시간 거리의 낙도에 사는 초등학교 전교생 11명이 순이라는 13살 소녀를 구해달라고 호소해와 콩팥이식 수술을 도운 일이 있어요. 그 소녀는 수술 후 기증자인 간호사의 손을 잡고 자신도 간호사가 되겠다며 흐느끼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일화가 끝이 없군요. 앞으로 또 어떤 사업을 하실 건가요?

우선 사랑의 빨간 밥차를 10대 이상 늘여야겠어요. 그쯤 돼야 연간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혜택을 봅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거든요. 그리고 사업 규모를 조금씩 확대해 국제 쌀 나눔 단체로 키우려합니다. 마더 테레사가 생전에 움직인 단체만큼 큰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눔운동의 설계사이거나 심부름꾼입니다. 모든 일이 내 맘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인공도 아닙니다. 사회사업이나 봉사단체는 모두 자원봉사자와 후원 단체 또는 기업들의 따뜻한 손길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쌀 나눔 운동은 농촌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운동이지만 꽃을 생산하고 점포를 운영하는 화훼산업 쪽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항의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모두 농협 산하인데 화훼산업도 소중하지만 아무래도 쌀과 관련된 분야를 염두에 둘 때 비교할 수 없지요. 또 꽃시장의 규모가 1조 원대라고 하는데 화환 쌀의 시장은 100억대 규모밖에 안됩니다.


가족 분들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내(이정숙 55)도 도움을 주고 있지만 사업할 때보다 더 보람을 느끼고 신뢰를 합니다. 홍콩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과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이 있어요. 유치원 다닐 때부터 장사 중에 세상에서 가장 수지맞는 장사가 남을 돕는거라는 말을 노래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도와줘서 되돌려 받는 것은 하늘이 너에게 갚을 것이 없지만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것을 도와주면 하늘이 축복을 내리므로 그보다 더 수지맞는 일이 없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들려주었어요. 중앙대 건설대학원에서 강의도 하지만 틈틈이 여러 곳에서 특강이나 초청 강연을 합니다. 사회사업 관연 강연 때는 많은 청중들이 쌀화환 운동에 공감을 표하고 격려를 해줍니다. 보이지 않는 큰 힘입니다.



못다한 말씀을 해주시지요.

밥을 퍼면서 아랫도리가 보이는 남루한 노숙자를 볼 때마다 테레사 수녀님을 생각합니다. 그럼 마음이 더욱 따뜻해지고 그 분들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짐승처럼 살지 말라고 자주 말합니다. 짐승은 나눔을 모르고 삽니다. 새끼는 생각하지만 절대로 남을 위해 먹이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고귀한 삶을 그렇게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요.


[인터뷰이 나우] 서울역, 인천부평역, 주안역, 고양시 등지에서 빨간 밥차를 세워두고 무료급식을 하고 있는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가 사랑의 밥차 차량운행을 맡을 사회복지사를 모집하고 있다. 35∼50세 사이의 1종 대형운전면허를 가진 남성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야 응시 가능하다. 주 5일 근무에 4대 보험을 제공하는 등 일반 기업의 사원 대우를 하게 되는데 지원 신청은 9월 20일까지, 제출서류는 자기 소개서와 이력서로 접수는 이메일로 해야 한다고. 주소는 loverice5333@naver,com 문의는 1600-4022 정세욱 사무차장.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는 ‘쌀산타’로 통하는 사회사업가 이선구 회장이 설립하고 운영해온 무의탁노인, 노숙인, 미자립 복지시설 등을 돕는 비영리 민간구호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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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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