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 야사 하이페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 야사 하이페츠
  • 소혁조
  • 승인 200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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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질투하는 바이올리니스트 / 소혁조


[인터뷰365 소혁조] 언젠가부터 유행했던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 무엇 이냐고. 어찌 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명료한 대답처럼 쓰이는 한 구절이 있다. 하이페츠(Jascha Heifetz) 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라는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것이다. 하이페츠가 연주한 비탈리의 샤콘느를 발매한 RCA사의 마케팅 담당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히 선정적인 이 짤막한 문구가 상당히 먹혀 들었고 지금까지도 유행하는 것으로 봐선 이 담당자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 무엇일까 궁금한 사람들은 호기심 삼아 여러 루트를 통해 그 음악을 찾으려 할 것이고 인터넷 검색엔진 등에서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라는 음악을 알게 된다면 몰랐던 세 가지의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이니 이런 식의 선정적인 문구를 만들어 낸 사람의 수완을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비탈리라는 작곡가는 바흐 이전에 태어났던 아주 옛날의 작곡가이며 샤콘느라는 곡 외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또한 샤콘느라는 곡 역시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한 유명한 곡도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라는 문구 때문에 유명해졌다면 20세기에 들어서 하이페츠 덕분에 유명해진 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탈리와 샤콘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하이페츠라는 바이올리니스트는 20세기 바이올린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에겐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며 강박관념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신동 중의 신동 하이폐츠


하이페츠는 1901년에 러시아의 네빌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1901년이란 설도 있고 1899년이란 설도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1901년이라고 명시한 것으로 보아 1901년을 정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가 바이올린의 교사였고 오케스트라의 단원이기도 한 관계로 세 살 때부터 어린이용 바이올린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7세에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하였다. 9세 때부터는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된다. 레오폴드 아우어는 19세기 러시아 바이올리니즘의 대명사였으며 시조격인 사람이다. 9세에 아우어의 제자가 된 하이페츠는 10살 때부터 공개연주회를 갖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아우어의 제자가 된 그는 12살 때부터 독일을 비롯한 해외에서 연주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 어린 꼬마 아이의 연주는 그야말로 감탄과 경이를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 더 유명한 20세기 바이올린의 거장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12세 소년 하이페츠의 연주를 보고 다른 청중들에게 감탄하며 이르기를 ‘(저 소년 때문에)우리는 앞으로 바이올린을 다 박살내야 할지 모른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의 솜씨가 얼마나 경악할 만한 것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1917년엔 미국에서 데뷔하였다.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열린 이 데뷔 무대는 하이페츠의 명성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알린 일대 사건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뻣뻣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초인적인 기교를 선보이는 그의 모습에 미국인들은 열광했고 데뷔 첫해에만 미국에서 무려 30회의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신이 질투하는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명성을 얻다.


20세기의 신흥강대국이지만 문화예술의 신천지이자 불모지였던 미국. 유럽의 난리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수많은 예술인들처럼 하이페츠 역시 미국에 눌러 앉게 되었다. 그가 데뷔한 1917년 10월 27일이 지나고 며칠 후에 러시아에선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20세도 채 되지 않은 소년 하이페츠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24세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선 유럽에서 망명한 문화예술인들에 대해 극진히 대접해주며 미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았는데 하이페츠 또한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본 사람이었다. 활발한 레코딩과 연주회 활동을 통해 바이올리니스트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와 영광을 다 누렸고 몇 편의 상업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그와 동떨어진 인생을 사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의 俳優로서의 출연은 아니고 ‘They shall have a music’이란 영화에서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를 연주하는 장면이랄지 프리츠 라이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하는 모습, 또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하이페츠는 신기의 테크닉을 가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경이로운 대상으로 우상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이 선사한 하이페츠의 완벽한 연주를 두고 쏟아진 극찬들의 사례를 몇 가지만 살펴본다. 독설가로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하이페츠가 19살 때 런던에서 그의 연주를 처음 보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편지엔 '제발 잠들기 전, 기도 대신 아무 곡이나 서툴게 연주해라.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신처럼 완벽하게 연주하다간 자칫 하느님의 시기로 요절할지도 모른다'라고 적혀 있었다. 꽤 재미있게 과장된 표현이다. 버나드 쇼는 신이 연주하는 걸 들어본 적 있나 보다.


또 칼 플레쉬라는 평론가는 “역사적으로 절대 완벽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가 유일한 예다.”라고 극찬하였다. 그 정도로 하이페츠의 연주는 듣는 이를 감탄, 감탄, 또 감탄케 하며 질식할 듯한 충격으로 몰아넣는 마력이 있다. 아마 하이페츠와 같은 완벽한 기교를 가진 연주자는 향후 백 년 이내엔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은퇴 이후. 그리고 인간 하이페츠


10살도 채 안된 어린 소년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영광과 극찬을 한 몸에 받은 하이페츠는 1972년 10월 23일 마지막 공연 이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이 공연에서 하이페츠가 은퇴를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공연이 있고 난 후 3년이 지나고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더 이상 활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하이페츠는 1962년부터 UCLA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퇴 이후엔 쭉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하이페츠를 거론할 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이다. 미국과 소련의 양대 강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고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확고히 하여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이 비교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하이페츠와 오이스트라흐가 비교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후진양성에 대한 것이다. 오이스트라흐는 그 자신이 뛰어난 연주자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명성 또한 대단한 것에 비해 하이페츠는 제자를 잘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너무도 완벽한 성격에 그 성격만큼 완벽한 연주를 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가도만을 달렸던 인생이기에 그에겐 어린 묘목을 잡아주고 가꾸어 거목으로 만드는 재능만큼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가 은퇴 이후에 후진양성을 했다고 하나 세계적인 명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사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애제자로 삼고 키웠던 에릭 프라이드만이란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는데 그 역시 그저 그런 준척급으로 머물다가 훗날엔 대학교수가 되었던 사람이다. 하이페츠는 이 에릭 프라이드만이란 연주자와 함께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고 이 연주의 동영상 또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참고로 하이페츠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협연한 유일한 예가 바로 그의 제자인 에릭 프라디어만이란 사람과 함께 한 것이며 심지어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의 녹음도 그 자신이 혼자 하기도 했다. 이 부분 역시 에후디 메뉴이랄지 아들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 등과 함께 협연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하이페츠는 연습벌레에 지독하게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로도 유명했다.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반영한다는 말처럼 같은 곡이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이페츠의 연주는 너무도 완벽하고 급하다. 결점을 찾을 수 없는 그의 연주에서 유일한 결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너무 완벽하기에 정감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결점이라면 결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연주가 아마 그의 완벽한 성격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이페츠는 또한 자존심이 무척 강했고 독불장군 같은 면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함께 일명 100만불 트리오라 불리는 실내악단을 구성하기도 했는데 기대 이상의 큰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로 루빈스타인은 하이페츠의 독선적인 바이올린 연주 때문에 전혀 만족스러운 연주를 들려줄 수 없었다고 맹비난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매우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많은 다툼이 있었고 또한 품성이 곱고 겸손하기로 유명한 루빈스타인이 이 정도로까지 비난한 것을 보면 확실히 그가 팀워크를 구성하여 하모니를 이루는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이유로 하이페츠가 남긴 수많은 주옥 같은 명반들 중 유독 실내악 분야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1972년에 마지막 무대를 가졌던 하이페츠는 1987년 12월에 86세에 비버리 힐스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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