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움직인 26살 사회운동가 한나 김
미국을 움직인 26살 사회운동가 한나 김
  • 김두호
  • 승인 200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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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정전협정일을 미국기념일로 만들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27일을 ‘6.25 참전용사 휴전일'로 선포하고 전국에 조기를 달게 했다. 미국이 6.25 정전협정 체결일을 뒤늦게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는 데 앞장을 선 사람은 놀랍게도 20대의 아직도 어린 동포 여성이다.

주인공 한나 김(26 한국명 김예진)은 6.25 전쟁이 역사에 묻혀버린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휴전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리멤버(Remember) 7.27’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사회운동가이다. 미국 하원의원 435명과 행정부 고위관리들을 접촉해 가며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의 지지를 받아낸 집념의 젊고 아름다운 여장부다.


시대적으로 6.25와 거리가 먼 젊은 세대인 한나 김씨는 ‘리멤버 7.27’운동을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평화운동으로 시작했다. 6살 때 이민을 떠났지만 자신이 태어난 모국에 대한 애정과 아직도 살아 있는 참전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일, 그리고 전쟁을 통해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혈맹관계를 복원하는데 뜻을 두고 있다.

6.25 전쟁은 남한쪽에서만 민간인까지 150여만명을 희생시켰고 UN 참전국을 제외한 미국 군인만 6만3천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 10만3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1950년에 전쟁이 일어나고 1953년 7월 27일에 전쟁이 종결되지 않고 휴전협정을 한 것인데 한국은 물론 미국까지 과거사를 까맣게 잊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한 여성의 안타까움이 ‘리멤버 7.27’운동을 일으켜 마침내 미국 사회를 움직인 것이다.


한나 김씨는 참으로 특별한 여자다. 이 땅에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도 목소리를 잃어버린 ‘리멤버 7.27’운동을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펼쳐온 그녀가 국내 대학에서의 강연과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당신의 명함이 재미있다. 왼쪽의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 가운데 무궁화를 중심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상징하는 꽃들이 하트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그림이다. 한반도에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는 소망을 함께 담은 ‘리멤버 7.27’운동의 상징적인 그림이다. 나의 운동을 지원해주시는 진효비 화백님에게 부탁드려 만들어진 작품이다.

당신이 펼치고 있는 ‘리멤버 7.27’은 한마디로 어떤 성격의 운동인가?

내년이 6.25 전쟁 60주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6.25를 옛날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전협정 체결일인 7.27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도 효력이 지속되고 있는 전쟁의 연장선에 걸려있는 현실이다. 참전용사들의 상처도 아직 살아 있는 현실이다. 이산가족의 상봉도 7.27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7.27을 다시 기억하자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체이름을 ‘한국전쟁 화해연합회’로 했으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해 ‘리멤버 7.27’로 이름을 바꾸었다.



미국 정부가 그 날에 조기를 달게 하는 기념일로 정하기까지 당신의 ‘리멤버 7.27’운동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 같다.

사실이다. 나도 결과를 보고 어마어마한 일이 이루어졌구나, 그걸 내가 주도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일찍부터 나에게 희망을 심어준 말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려깊고 헌신적인 몇몇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는 여성학자의 말이다.


그동안의 활동 과정을 들려달라.

나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다. 내가 ‘리멤버 7.27’을 이끌고 있지만 나는 주연을 맡거나 주인공이 아니라 좋은 화음이 이루어지도록 뒷전에서 밀어주는 스태프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즉 나는 피아노를 열심히 치지만 연주자가 아니라 반주를 하는 사람이다. 무대 중심에서 합창을 하는 사람들이 성공적인 공연을 하도록 열심히 성실하게 반주를 넣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활동을 해왔다. 미국의 6.25 참전용사 단체를 찾아다니고 435명의 하원의원들의 사무실을 출입하거나 힐러리 국무장관까지 만나 지지를 호소하는 일을 계속했다. 지난 1년간 전화 접촉을 한 사람들만 1만여명이 넘을 것이다. 의원 보좌관들은 내 목소리만 들으면 용건을 묻지도 않고 대답을 미리 해줄 정도였다.


20대인 당신의 그런 열정이 왜 어디서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구나 당신은 6.25를 실감하지 못하는 세대가 아닌가?

나는 6살 때 미국 LA로 이주했다. 아버지(LA 새소망교회 김성범 목사)는 이민사회와 유학생 봉사에 앞장서서 실천신앙에 뜻이 많은 분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국가관이나 사상적인 대화를 통해 한국과 미국의 국제관계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한미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초중고를 미국에서 다닌 후 대학은 한국으로 역유학을 해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온몸으로 느끼며 공부하고 싶었다. 졸업 후 미국으로 돌아가 UCLA대에서 전문경영인 과정을 수료하고 다시 조지워싱턴대의 정치경영대학원에서 입법 등 의회관계학 석사학위를 받는 와중에 평화봉사단과 국회지원 평화연구소에 입사했다. 나에게 주어진 첫 과제가 <한국인의 식민지 역사의식>이었고 그 과제의 다음 연결부분이 6.25 전쟁이어서 자연스럽게 6.25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 무렵 나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2006년 1월 19일 밤에 내가 150km로 몰던 차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어 전복된 것이다. 에어백이 터져 생명을 건졌지만 상당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삶의 소중함을 느꼈고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시간이 없다는 초조함을 동시에 느꼈다.

한국계 학생에 의해 벌어진 대학 캠퍼스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충격을 받았던 때였다. 나는 한미관계를 깊이 되새기며 두 나라의 할아버지 세대들이 혈맹이 되어 6.25를 치른 역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전 참전용사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며 ‘한국전쟁 참전 용사의 날’부터 정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들면서 나는 아직도 정전협정일이 유효하게 지속되고 있는 현실에 “오 마이 갓!”을 외치며 ‘리멤버 7.27’을 구상한 것이다. 지금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일을 하고 있다.


지금 국내에는 6.25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리멤버 7.27’운동을 펼칠 생각은 없는가?

서울에 온 후 많은 분들을 만나 미국처럼 기념일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그저께 국회에 가서도 미국처럼 기념일로 정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들이 현충일(6월 6일)이 있는데 다시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더라. 막연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을 추모하는 현충일과 6.25 정전협정체결일은 엄연히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다. 미국에 사는 한국계 2세, 3세들도 한국어조차 잃어버리고 있으니 어른들이 일깨워 주지 않는 한 6.25를 기억하지 않는다. 미국에서의 ‘리멤버 7.27’운동의 결실은 우리 동포사회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매우 소중하다.


부정적인 반응에 실망이 컷을 것 같다.

충격 받았다. 한국은 참전용사들만 기억하는 날로 되어버린 것 같아서 슬펐다. 그렇더라도 내년 6.25 전쟁 60주년 기념행사 때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개최되어야 한다. 부모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듯이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들을 위한 따뜻한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마련해야 한다. 전쟁 후의 세대들은 그 분들에게 전쟁 얘기를 듣는 것보다 폐허 속에서 피땀 흘리며 극복의 시대를 살아온 삶의 지혜를 들어야 한다.




이번에 서울에 온 목적은 ‘리멤버 7.27’운동과도 관련이 있는가?

‘리멤버 7.27’은 눈길을 끌기 위한 이벤트 행사가 아니다. 나에게는 미국과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야 하는 미션과 같다. 지난 9.15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에 재향군인회 초청으로 왔고 참전용사들의 행사 참가와 함께 경희대 국제교육원의 초청강연도 있었다.


지금 6.25 전쟁을 상기(想起)하자고 하면 보수나 극우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오해를 받은 적은 없는가?

나는 논쟁을 좋아하지만 정치적 이념적 색깔이 없다. 민주주의는 논쟁을 필요로 한다. 물론 사물을 볼 때 보이는 쪽만 얘기하지 말고 안 보이는 쪽도 생각해야 한다. 6.25는 이념적인 논쟁을 하기 전에 사실로 나타난 전쟁의 역사적인 동기와 과정, 결과를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젊은이들이 국제관계와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없으면 장래도 문제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리멤버 7.27’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당신이 보여 준 것은 단체를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이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반장을 놓쳐 본 적이 없고 중학생 때는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고교과정은 조기 졸업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앞장을 서는 일이 즐거웠고 발표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성장기에 모델활동과 봉사활동에 빠져 보람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한국전 참전용사 인정 법안이 의회의 지지를 모으기까지는 리더십보다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설득 마케팅이 필요했다.

미국의 정치는 정책을 시민들에게 투표로 바꾸어 파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투표로 선택을 받기 위해 설득 마케팅을 하게 되는데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많은 시민단체를 참여 시키면서 ‘리멤버 7.27’의 목적을 두고 시민단체 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차츰 여론이 확대되도록 나는 그야말로 반주를 열심히 했다. 초기에는 미국 6.25참전용사협회 회장을 역임한 루이스 데커트 장군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결혼은?

미혼이다. 연애도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생각할 때가 된 건가?

하하하. 생각하지 않고 있다.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면 고려하겠다.


형제는?

위로 대학에서 MBA과정을 밟고 있는 언니가 있고 보건복지부에 근무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남동생이 한 명 있다. 우리 집은 어머니와 가족이 모두 다섯이지만 합숙소같이 많은 손님들이 북적거린다. 집을 정하지 못한 유학생이나 갈 곳이 마땅찮은 뜨내기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함께 지낼 때가 많다.


여전히 꿈은 외교관인가?

지금도 아는 분들은 나를 민간 외교관이라고들 한다.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꿈을 살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한나 김 씨는 미국의 거대한 정치사회에 뛰어들어 자신이 만든 단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담력있는 운동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여자의 맵시를 가진, 그저 상냥하고 말씨 좋은 숙녀처럼 보였다. 다만 긴 시간을 함께 해도 선뜻 헤아릴 수 없는 점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굳건하게 자리잡은 6.25 전쟁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한미 양국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려는 역사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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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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