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의 역사, 영원한 연극 청년 최치림 교수
한국 연극의 역사, 영원한 연극 청년 최치림 교수
  • 서영석
  • 승인 200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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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가 세계 공연 메카 되는 것이 평생 꿈”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최치림(65) 교수는 한국 연극계의 산 역사이자 학계의 기둥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64학번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은 이후 한번도 연극 이외의 일은 해보지 않은 그는 여전히 연극 현장에서 뛰고 있는 ‘영원한 연극 청년’이다.

국립극단 예술감독 직을 겸하고 있는 최 교수는 현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 <세자매> 작업을 하고 있으며 11월에는 직접 연출을 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또 전국연극학과 교수협의회 회장, 연극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국예술대학교수협의회 상임대표를 맡아 우리 연극예술과 타장르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실험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몇 번의 전화 통화와 만남이 있었고 마지막 만남은 명동예술극장에서 마무리됐다. 최 교수는 교수라는 직함과 국립극단 예술감독에 어울리는 권위보다는 수더분한 인상의 친근한 연극예술인 그 자체였다.



대학 입학 당시에 연극영화과는 생소한 학과였을 텐데 특별히 진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라도 있습니까?

연극부가 유명한 양정고등학교를 다녔어요. 나는 연극부가 아니라 권투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학구파였어요. 고등학교 당시 세익스피어 400주년 기념연극제가 열려 다발식으로 세익스피어 공연이 있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김석강씨가 출연했던 <뜻대로하세요>를 관람했는데 너무 재미있고 독창적이더라고요. 나도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진 인생이 될까? 결국 연극영화과로의 진로가 결정된 셈이죠.


부모님께서 그같은 진로 결정을 찬성하셨나요?

아버님께서는 전혀 모르고 계셨어요. 문학을 좋아하시고 출판사를 운영하시던 작은 아버지의 도움이 컸습니다. 일본 무사시노 공대 토목과를 졸업하신 부친께서는 당신의 뒤를 잇거나 집안에 의사가 많아서 의대로 진학할 것을 원하셨지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공사 현장을 누비시다 보니 제가 무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계셨고 작은아버지께서 비밀을 지켜주시며 학비 등을 지원해 주셨기에 연극영화과 진학과 학교 다니기가 가능했지요. 또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던 4촌 누님의 지원도 큰 힘이 되었지요.


결국 부친께서는 교수님의 전공을 모르셨나요?

부모님 속이고 연극영화과를 지원했지요. 입학할 당시 연극영화과가 문리대에 속해 있어서 10등까지는 장학금을 받았어요. 학비 걱정은 덜 수 있었죠. 항상 현장을 누비시던 아버님이 자식 사랑을 엉뚱하게 푸시는 바람에 3학년 때 들통이 났어요. 부산 현장에서 공사를 하실 적에 부산에 사는 제 친구를 불러 당신의 자식인양 식사를 하시곤 했는데 그 친구가 그만 내 전공을 말씀을 드렸어요. 한바탕 난리가 났지요. 아버님의 용서를 받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졸업 후 내가 TV에서 연출상을 받는 장면이 방영되면 채널을 돌리시거나 꺼버리시곤 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세를 타고 각종 연출상들을 쓸어담으니까 그제서야 용서를 하시더라고요.


유년 시절의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제 인생에 천복(天福), 천권(天權), 천문(天文), 천고(天孤)가 있답디다. 천복은 지금까지 삶에 있어서 그다지 어려움 없이 지내온 것으로, 천권은 이 바닥에서 교수나 연출하면 그나마 조금의 권력이 있지 않을까요? 천문은 유학과 공부를 조금 했고 마지막으로 천고, 이것이 문제입니다. 고독과 외로움이 유년 시절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버님은 당시의 어른들이 흔히 그랬듯이 외도가 잦았어요. 또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연애결혼을 하셨는데 인정을 받지 못해서 불화가 잦았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조부모님께선 결혼은 인정 못했지만 손자가 보고 싶어 억지로 인정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고요. 아버님이 일본으로 직장을 옮기자 할머니의 며느리 구박은 정도를 넘어 결국 버티지 못하신 어머님이 제가 6살 때 아버지와 이혼을 하셨어요.

어린 시절에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보니 정신적 혼란과 사람들과의 관계, 종교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이 인생과 삶에 대한 의문으로 다가서더라고요. 지금까지 고독과 외로움은 내 인생에서 떠나지 않는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렴풋하지만 좀 별난 아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여섯 살인가..., 어린 놈이 인생과 삶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어요. 인생이 무엇이냐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가 머리를 맞았던 기억도 납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은 저를 문학이나 드라마 예술의 세계로 이끈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움이나 외로움이 없으면 드라마나 예술은 어렵겠지요.


학창시절의 추억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방과 후 충무로와 명동을 빵떡모자를 쓰고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죽치기도, 그야말로 젊은 날의 치기였지요. 또 친구들과 거리에 흩어졌다가 1시간 후에 만나기로, 여자 팔짱을 못 끼고 나타나면 ‘저녁내기’라는 벌칙을 만들어 어거지로 작업을 하는 낭만을 즐기기도 했어요. 그때 장난으로 만난 파트너와 결혼을 한 친구도 있어요.

학창시절 연극영화과에 2개의 그룹이 있었어요. 걸신당과 타락당이라고. 걸신당의 당수는 최상식으로 훗날 KBS의 드마라 PD로 너무도 유명해진 친구입니다. 걸신당의 강령 1조, 담배는 백조(당시 싸구려 담배) 이상 피우지 않기, 2조는 점심은 라면 이하로 제한(단 얻어먹는 것은 제외)을 강령으로 내세웠고 내가 당수로 있던 타락당은 낭만을 즐기기 위해 “인종, 국적,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를 사랑하자”라는 강령으로 무수한 작업을 강행, 일명 오입당이라는 귀여운 것 갔으면서도 망측스런 애칭을 얻기도 했어요.

무대에서 배우로도 활동을 하셨다고?

배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괴테 작 <공범자>의 연출을 했는데 공연의 막이 오르려는데 주인공 오길주씨(중앙대 동기, 전 KBS 영상사업단 국장)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을 해버렸답니다. 사촌 여동생과 친구들이 공연을 보겠다고 좌석에 버티고 있는데 공연을 안 할 수도 없고, 연출이 대본을 제일 많이 외우고 있으니, 또 선배들이 어깨를 떠밀며 프롬푸터를 해 주겠다는데 어쩔 수 없이 배우로 데뷔를 하게 되었지요. 첫 대사가 “편지 왔어요?”였는데 지방 출신이라 사투리가 나오는 바람에 객석이 웃음바다로 변해버렸어요. 또 한번은 전세권씨 연출 <제5방향>의 지방공연에서 또 그 친구가 몸이 아파 대타로 무대에 섰어요. 막과 막 사이에 무대 뒤에서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잠시 공연이 중단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도 벌어졌지요. 그때 배우란 진짜 어려운 직업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연출 데뷔작을 기억하십니까?

1970년 <그물 안의 여인들>(박양원 작)로 연출 데뷔를 했지요. 연출 데뷔가 나이에 비해 꽤 빨랐지요. 학교를 졸업 시기가 되니 바야흐로 영화와 방송의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어요. 선배님들이 제가 다른 장르로 도망을 갈까 발목을 잡으려고 빨리 데뷔를 시켰던 것 같아요. 배우 신성일씨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작품 <청춘스케치>에서 감독지도역을 구한다고 양광남 교수님의 소개가 있었어요. 영화로 빠지면 다시 연극계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그때 연출을 맡겼던 것 같아요. 이어 드라마센타에서 <프로랑스는 어디에>로 한국일보 연출상을 받았고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한국 초연으로 동아연극상 그랑프리를 차지했지요. 정신없이 바쁘게 까페 데아뜨르, 드라마센타, 세실극장, 국립극장 등을 날아다니며 연극을 했어요.


결혼에 대한 에피소드도 유명하시던데요?

아내는 초등학교 2년 후배였어요. 당시 학원출판사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국일보연출상을 받으니 인터뷰 요청을 계기로 만나게 되었어요. 그 사람은 까페 떼아뜨르 시절부터 10년 동안 내 공연을 꿰고 있었답니다.

그 시절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해서 그냥 극장이나 목욕탕에서 토막잠을 자면서 지내기가 일쑤였지요. 문득, 외롭다,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운명처럼 뇌리를 스치더라고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머리에 떠올리니, 당연히 생각이 나더라고요. 못 먹는 소주를 두 잔씩이나 마시고 아내가 사는 여의도의 아파트를 찾아가, “합치는 게 어때?” 했죠. 집사람 대답이 걸작이었어요. “알면서 묻느냐!” 바로 날을 잡고 결혼식을 한 기억이 납니다.


결혼을 하고 유학을 결행하기란 쉽지 않았을텐데요?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요. 예술인 해외연수 프로그램 3기생으로 NYU(New York University)에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당시 공연학과에 이승규씨, 연극학과에 김우옥씨 등 뒤를 이어 김성만, 윤호진, 김수남, 조병진, 이영란 등이 공부를 했고요. 현재 한국 연극의 중추역할을 하는 분들 중 NYU 출신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2년 후 가족을 초청해서 가족과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와중에 모교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어요.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엉겁결에 귀국을 했지요. 기러기 아빠, 또 그 놈의 고(孤)가 날 외로움으로 내몰았지요.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아 의욕적인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 작품의 근저에 항상 고독과 그리움이 남아있는 까닭이 이런 연유가 아닌가 합니다.


연극 하면 우리말과 사상을 가장 작품에 근접해서 표출을 해야 되는데 사상이나 문법이 전혀 생소한 외국에서 배운다는 자체가 언밸런스라는 의견도 다분합니다. 교수님 견해는 어떻습니까?

연극은 당대의 미학, 철학, 관습, 테크놀로지의 결정판입니다. 현대에 있어서 세익스피어의 공연을 ‘어떻게(How)’라는 관점에서 고민과 실험을 거친 나라에서 메소드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고전의 현대화를 실험했던 노하우의 전수와 그러한 실험작들이나 해외의 공연물의 한국적 수용에도 용이하다는 부분에서 긍정적이라 봅니다. 1970년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행은 예술, 문화, 국가와 인종의 벽을 무너뜨리고 융합의 시대를 불러왔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양문화를 서구가 수용하는 실험을 국내에서의 시각으로는 어렵겠지요. 국경이 무너져버린 시대적 상황에서 새로운 연극을 창출해야 되는 경쟁을 위해 유학은 권장하고픈 개인적 견해입니다. 내가 중앙대 교수로 복귀 후에 최재오, 항정미, 김광섭 등 여러 제자들을 유학 보냈습니다.


연극하면 일반인들은 흔히 배우를 생각하는데 굳이 연출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연극이 좋았고 연극영화과 지원동기도 연극을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소설이나 시를 무척 좋아했어요. 특히 영화를 보면 거의 비평을 쓰다시피 노트에 가득 메모를 남겼지요. 지금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고등학생이 쓴 것 치고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자평을 하곤 합니다.


연출가의 기본 소양으로는 어떤 점들이 강조가 됩니까?

드라마의 본성은 사람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응당 인문적 소양이 우선이겠죠. 연출은 물론 배우나 여타 연극에 관여하는 모든 분야에서 먼저 가장 소중하게 요구되는 부분이 바로 먼저 “인간이 돼라!”라는 명제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애정은 필수이고 창작을 위한 고뇌와 고통을 승화시킬 줄 알고 인간의 혼과 감정을 아우를 수 있는 전인적 인간이 기본이겠지요. NYU의 커리큘럼의 예를 들자면 절반 이상이 문화인류학 강의로 이루어져있어요. 드라마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삶의 조건들과 충돌하고 타협한 기록들의 산물이하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인류학의 두 가지 관점은 바로 갈등과 투쟁이라 봅니다. 연극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연출가는 인문적 소양과 예술가적 감성이 구비되어야겠지요.


대학원에서 독특한 강의로도 유명하신데요?

사회 전체의 중심이 바로 공연인류학이라 생각합니다. 산업사회 후 수동문화로 분리가 되었는데 아르또나 그로토프스키의 철학은 적극문화로의 반전을 강조합니다. 내 강의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연극 요소 찾기’를 강조하고 그 토대 위에 이론을 정립하라고 요구합니다. 아직은 젊다는 혈기에 전국토의 공연장화, 공연의 생활화, 전국민의 배우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의 중심은 공연에 있다고 봅니다.

현재 대학에 너무 많은 연극영화과가 있는데 문제점이 있다면?

작금의 문제는 대학들이 너무 장사에만 골몰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안타깝습니다. 연극영화과에 학생들이 모이니 특성도 없이 너나 나나 학과를 만들어 놓고는 손을 놓아버리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하는지 황당할 따름이지요. 또 학교마다의 특성이 없어요. 배우 배출은 기본이겠지만 작가나 연출의 배출에는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동아연극상이나 기타의 연극제 관련 심사를 보는데 대상이 안나올까 걱정이 앞서는 것은 교수로, 선배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림이나 테크닉만으로는 절대 좋은 연출이 되지 않습니다. 극단적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폴란드나 헝가리 등 우리보다 그 방면에 선진국에서는 학부에 연극영화과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개인적 바람이라면 연극관련학과 학부의 커리큘럼에 좀더 많은 고전 읽기같은 과목이 아쉽네요.



대학로가 다문화의 탁류에 휩싸여 본연의 기능을 외면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교수님의 견해는?

성급한지는 몰라도 가슴 아픈 것은 예술, 연극의 혼이 사라졌다는 현실입니다. 물론 정통에 뿌리를 둔 작품을 외면하고 말초신경 자극으로 관객들의 입맛에 맞추기에 급급한 수준이하의 공연들과 흥행이라는 타이틀만 노리는 뮤지컬의 범람이라는 현실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문화정책의 부재를 몇몇 고위공무원들의 무지(?)로 돌리기에는 연극인들이 책임도 그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공연에는 얼마든지 관객들이 줄을 섭니다. 대학로는 연극인들 스스로가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할 바로 우리들, 연극인들의 공간입니다. 현실적으로 대학로를 중심으로 인근에 130개가 넘는 소극장이 산재해있습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의 유래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만의 소중한 자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10년 세계연극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됩니다. 이런 세계적 행사를 기회로 대학로를 세계유네스코 연극특구 지정의 공인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미 금년(2009년 2월)에 세계협회장이 다녀갔습니다. 평생을 연극관련직에 종사한 제 포부는 서울, 특히 대학로를 세계 공연의 메카로 유네스코의 공인을 받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직도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으시죠?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하다보니 지금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안톤 체홉의 <세자매>가 끝나면 11월에 국립 달오름극장에서 <둥둥낙랑둥>을 준비하고 있어요. 특히 <둥둥낙랑둥>은 직접 연출을 맡아서 내가 위원으로 있는 세계연극올림픽에 출품을 합니다.


여타의 예술관련 분야에도 많은 활동을 하시던데요?

이제 예술은 연극도 중요하지만 총체적 예술로의 발전 역시 중요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합니다. 연극에서 뮤지컬, 이젠 연극과 뮤지컬, 무용과 영상 등이 어우러지는 장르의 개발이 시급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전국예술대교수협의회의 탄생도 중요한 출발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제분들에게 당부의 말씀이나 앞으로의 포부가 있으시면?

2007년 집사람이 미국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으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픕니다. 아들이 둘 있는데 나름대로 자기들의 삶을 잘 운영해 나가고 있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장남은 의대 졸업반이고 둘째는 영화연출관련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밥(현실)보다는 즐기고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인생을 살기를 권합니다.

개인적인 관심사는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대학로의 세계유네스코 연극특구 지정의 공인에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금년(2009년 2월)에 세계협회장이 다녀갔습니다. 평생을 연극 관련직에 종사한 제게 이러한 작업은 제 자신의 꿈이기도 하지만 우리 연극인 모두의 희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 특히 대학로가 세계 공연의 메카로 유네스코의 공인을 받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평생의 작업을 위해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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