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고도’를 세상에 처음 알린 다큐멘터리스트 박종우
‘차마고도’를 세상에 처음 알린 다큐멘터리스트 박종우
  • 육홍타
  • 승인 200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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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 소수민족 점점 사라져 마음이 급해” / 육홍타



[인터뷰365 육홍타] 박종우(51)는 아마도 ‘다큐멘터리스트’라는 직함으로 불리기 시작한 첫 번째 한국인일 것이다. 방송사 소속의 PD가 아닌 개인 차원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은 아직도 흔치 않고, 다큐멘터리스트라는 직함도 일반인에겐 생소한 것이 현실이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동영상 비디오와 스틸 사진을 병행하면서, 양쪽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사진기자로 출발해 독일의 GEO’와 이탈리아의 AIRONE’한국관련 사진을 기고했고, 독립프로덕션 ‘인디비전’을 통해 비디오 다큐를 찍어왔다.


차마고도 염정마을 사람들의 삶을 바깥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으로 시작해서 <차마고도-1000일의 기록> <사향지로>로 이어지는 <차마고도> 시리즈를 비롯하여, <신의 산 에베레스트에 서다> 등의 산악 시리즈, <물 위를 떠도는 영혼-바다 집시> <마지막 불의 전설> <인류 최대의 축제 쿰브멜라> <최후의 샹그릴라> <동방대협곡> 등등 비디오 작품 리스트도 길지만, 올해는 사진작가로서의 모습이 부쩍 돋보인다. 봄에는 사진집 <히말라야 : 20년의 오디세이>를 묶어내면서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히말라야 모노그래프> 전시회를 가졌고, 8월부터 이달 말까지는 대구 아르토갤러리에서 <히말라야 20년의 오디세이> 사진전을 열고 있다.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은 우리 방송 사상 처음으로 유럽의 정통 다큐멘터리 채널인 프랑스의 아르떼TV에 판매돼서, (마지막 소금 캐러밴)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작품들은 블로그
http://blog.naver.com/khampa, http://docu.tistory.com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진전의 반응은 어떤가?

부산 전시회 때 작품을 구입하고 싶다고 연락처를 적어놓고 간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곳은 상업화랑이 아니고 미술관이라 그런 일 처리를 내가 직접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사진 팔겠다고 원매자들에게 전화하는 일이 영 어색해서 연락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원래 신문사 사진기자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해서 다큐멘터리스트가 되었나?

1984년 공채로 한국일보사에 입사해서 월간지인 <스포츠레저> <월드 테니스>를 만들면서 일을 배웠다. 그것이 결국 지금의 일로 이어진 셈이다.

취미로 아마추어 무선(HAM)을 했는데 86년 여름 유고에서 국제 햄 회의가 열렸다. 당시 아마추어무선협회의 사무국장 일을 맡고 있던 참이라, 미수교국 여행이나 하자 싶어서 사표를 내고 참가했다가 유럽까지 돌고 왔다.

사표를 낸 김에 87년엔 히말라야에 가서 <히말라야를 가다>를 만들었다. 그게 첫 다큐였던 셈인데 계속 다큐를 하지 못하고 복직을 하게 됐다. 88 올림픽 취재에 기자가 부족하다고 반년만 일해달라는 바람에 이번엔 신문 사진기자로 복직을 했다. 올림픽 찍고 싶은 마음에 수락한 건데 올림픽 끝난 후 사표를 냈더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만 더... 하는 식으로 몇 번 하다보니 결국 주저앉게 됐고 그게 95년까지 갔다. 국회 출입을 많이 했는데 국회의원들 싸우는 거나 찍으면서 보낸 세월이 돌아보면 참 안타깝다.




<히말라야를 가다>의 탄생 과정은?

<스포츠레저> 시절, 당시 신예등산가인 유한규가 북한산 등반하는 것을 취재 갔다가 친구가 돼버렸다. 유한규의 절친인 윤평구와도 알게 되고... 윤평구는 뒤에 나와 같은 직장에 경력을 인정받고 들어와서 동료이자 선배가 됐다.

87년 2월에 유한규 윤평구 이 두 사람이 젊은 시절에 히말라야에 가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내게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당장 의기투합해서 팀을 꾸렸다. 강원도에서 지프차로 산간벽지를 전문으로 뛰던 택시기사 홍운기씨가 합세해서 4명이 하기로 하고 스폰서를 구했다.

아무래도 산악지대니 지프차로 가야할 텐데, 당시 지프 만드는 곳이 거화자동차밖에 없었다. 거화가 쌍용에 막 인수된 무렵이어서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을 찾아가 스폰서를 부탁했다. 김회장을 만나보니 회사 이름을 쌍용으로 바꾸고 첫 지프를 만들어 코란도로 명명하려는 참이었다. 홍보를 필요로 하는 시점이니, 한 마디로 타이밍이 좋았던 것이다. 흔쾌히 1억3천만원이란 거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면서 TV에 다큐가 나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KBS를 찾아가 그쪽 팀 4명과 같이 하기로 했다. 해외다큐 경험이 없어서 모든 게 다 처음하는 일이라 힘든 점이 많았다. 87년 8월 출발해서 6개월 걸려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을 돌며 촬영했는데 방송팀은 시간에 쫓겨 도중에 귀국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크고 작은 사고가 많이 나서 제대로 찍지 못한 것이 많아 아쉽다.


차마고도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차마고도-1000일의 기록>이 대표작처럼 되어 버렸는데...

2004년 중국 여행중에 자료를 찾으려고 들렀던 헌책방에서 벽에 걸린 사진을 본 게 시작이었다. 사진이 신기해서 책방주인에게 물었다가 차와 말의 교역로였던 차마고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거기 매혹되어 5부작 정도로 구상을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2005년에 촬영중 절벽서 떨어지는 대형사고가 났다. 카메라가 망가져서 촬영을 할 수 없으니 귀국하게 됐는데, 돈이 없어서 그때까지 작업한 것을 일단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서 KBS에서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다. 차마고도에 관한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5부작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고도’란 제목을 그때는 안 쓰고 아껴두었다.


원래 계획인 5부작은 어떻게 되었나?

2006년에 <차마고도-1000일의 기록> 2부작을, 2008년에 <사향지로> 2부작을 SBS에서 방영했다. 사향지로는 10여년전에 재발견된 고대의 교역 루트다. 그전까지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던 교역로가 실크로드의 초원길 2개와 바닷길 하나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시아의 사향이 유럽으로 수출되던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히말라야를 관통하는 이 고대 무역로는 티벳 라사를 출발해서 북인도를 경유, 인도양 바닷길을 지나 아라비아 반도로 연결된다.

나머지는 향료의 유통경로를 다룬 ‘향로의 길’ 2부작으로 해서 히말라야 교역 다큐멘터리 총6부작으로 완성하려는 계획인데, 여건상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진과 비디오 다큐를 둘 다 해오고 있는데, 두 매체를 비교하자면?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 사진서 안 되는 것은 비디오로, 비디오서 안 되는 것은 사진으로, 둘다 욕심을 내게 된다. 처음 해외취재에서 외국인들이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도 일하는구나”하고 신기하게 느꼈었다. 몸은 힘들지만 둘다 결과물이 생기니 좋긴 한데, 일하는 데선 서로 걸리는 점도 있다. 급박할 땐 사진과 비디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무엇을 택할지 고민하게 된다.

솔직히 스틸사진에 더 애착이 간다. 비디오는 순간에 못 찍더라도 커버할 영상이 가능한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않다. 순간의 에센스를 잡아낼 수 있는 게 사진이라고 본다. 게다가 비디오는 만들어 놓으면 내 손을 떠나는 셈이다. 방송국과 프리랜서 작가의 관계로 일을 하다보면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개인 프리랜서들은 약자의 입장이다보니 속상한 일도 많이 당한다. 그래서 비디오 다큐 하는 사람들은 극장용 다큐 생각을 많이들 한다. 내 경우엔 궁극적으로는 비디오를 놓고 스틸사진만 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작가로서 더 명성을 얻지 않았나?

어쩌다보니 다큐멘터리 작가로 분류되고 있는데, 나는 말이 다큐 작가지 사실 다큐작업을 많이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다큐가 아니라 좋은 이미지를 따내는데 관심이 많았다. 시간이 되면 사진으로 좋은 다큐 작업을 하고 싶은데, 인쇄 매체가 줄고 있어 발표할 마당이 없는 게 문제다. 요즘은 1년 프로젝트로 서울 성곽을 찍고 있다. 왜 남의 나라 것만 하느냐는 얘기도 있고 해서... 비디오는 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사진으로만 담고 있다.


‘왜 찍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히말라야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나는 사진작업을 ‘작가’로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젊은 날의 모험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거기 압도돼서 계속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악인 등반 다큐를 찍는 등 그곳에 자주 들락거리다보니 갈 때마다 자꾸 달라지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래서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금도 많이 바뀌는 곳을 찍고, 앞으로 바뀔 곳을 찾아다니면서 기록한다. 그러다보니 소재주의란 말을 듣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사라져가고 바뀌는 것을 기록하는 일의 보람과 아쉬움은?

1990년대 들어서 오지생활이나 소수민족이 관광자원화하는 등 변화하고 사라진 것이 많다. 예를 들면 파나마 산블라스 군도의 소수민족인 쿠나족은 원래 전통양식으로 살던 사람들인데 그곳은 이미 관광지가 되었다. 차마고도 마을에도 호텔이 생기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구경하러 엄청 많이 가는 실정이다.

그 사람들의 생활도 변화하고 있다. 차마고도만 해도 야크떼 100마리를 몰고 이동하는 것은 80년대에 이미 없어진 풍습이 되었다. 염정에서 소금 캐는 사람들은 요샌 일년에 며칠밖에 그 일을 안 한다. 벌이도 안 되는데다 버섯따기 등 다른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찍고 있는 것들이 우리 세대에서 아무래도 다 없어질 것 같다. 몇천년 이어온 것이 하필 우리세대에서 없어지게 되다니 속상하지만, 빨리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사실 이미 진정한 오지라는 건 없어졌다. 그래서 취재하기가 어려워진다, 작업하는 대상지 선정이 어려운 것이다. 그 다음 세대에선 아예 없어질 테니 지금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늦어버렸다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관광지화해버린 오지와 소수민족을 보면서 지금이라도 기록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우리 윗세대에선 그런 갈등없이 보람 갖고 했을 것 같은데...




다큐 찍으면서 위험한 순간도 많았을 것 같다.

차마고도에서는 진짜로 죽을 뻔했다. 40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추락했으니... 소금을 지고 가던 말이 그 소금 짐으로 나를 치는 바람에 떠밀려서 떨어졌는데, 3미터쯤 떨어지다가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많이 다치긴 했어도 어디 부러지거나 치명상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망가지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

동물들하고도 사건이 많았다. 미국 동물원에서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 촬영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린 적도 있고, 갈라파고스 섬에선 대형 이구아나에게 물렸고, 나미비아에선 사파리를 갔다가 표범에게 물렸다.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

다큐 후배들은 늘 ‘무엇’을 찍을까 묻는다. 영상 쪽 일은 먼저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남이 안한 것이 없다. 그러니 자기 시각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자기의 작업 주제를 자기 눈으로 재해석하는 것, 그걸 제대로 하는 작가가 좋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또, 다큐를 하는 사람들은 연출에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지 실정을 알고 있는 입장이라 그런 연출이 가해진 작품들은 조작 부분이 다 보이는데, 영상미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 진실되지 못한 걸 보면 참 아쉽다.

장비나 인원, 경비는 개인인 프리랜서가 방송국과 도저히 경쟁이 안 되는 부분이다. 방송국팀보다 더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시간밖에 없는데, 덕분에 더 사실에 충실한 다큐를 찍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카페 운영자로 알려져 있는데?

1997년에 Q채널과 경인방송이 조인트해서 ‘바다와 사람들’ 54부작을 하기로 했었다. 그일을 맡아서 출장을 가려고 환전하려는데 IMF가 터졌다. 환율이 엄청 뛰는 바람에 포기하고, 프로덕션도 접었다.

가만 보니 이 사태가 몇 년은 갈 것 같았다. 달러가 귀하니 달러나 벌자는 생각으로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원래 은퇴하면 게스트하우스를 하려던 계획이 있었는데 앞당겨서 연 것이다. 그런데 이 게스트하우스가 삼청동에 있으니 찾아오기가 어려웠다. 그걸 보완하려고 안국동 한국일보사 옆에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게 국내 인터넷 카페 1호인 ‘네트하우스’였다.

둘다 경영엔 실패했다. 처음 반년간은 직접 운영을 했는데, 입소문이 나는데 일년반이 걸렸다. 외국 배낭여행자들에게 소문이 났을 땐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손해를 보고 접었다.



취재여행을 다니느라 집을 자주 비우면 가족들이 불만을 갖지는 않는가?

그럴 거 같아서 결혼을 안하고 돌아다니고 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선배의 부인이 “이렇게 인생 살면 안 되잖냐”며 “참한 처자가 있으니 만나 보라”고 소개팅을 주선했다. 나가보니 그 참한 처자가 “한 달 동안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막 돌아온 참”이라고 했다. 천생연분이라고나 할까.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아내의 직업이 교사라 방학마다 같이 여행다닌다. 아들까지 셋이 늘 여행다니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어서 저축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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