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
  • 임정진
  • 승인 200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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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1. 봉구와 은주의 아침


아침은 항상 신선하다. 온도 조절이 잘되는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꺼내는 오이맛? 혹은 예상했던 문제가 여섯 개나 나오는 바람에 자신 있게 시험지를 일찍 제출하고 나와 세수를 했을 때의 기분? 누가 뭐래도 아침이 신선한 건,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이 돋보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둥지 아파트 B동의 관리인 최씨는 신문 배달부와 우유 아줌마의 목례를 유리창 안에서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제 2시간만 더 있으면 교대를 하고 집에 가서 한숨 푹 잘 수 있는 것이다. 밤새 바람에 날려 와 현관 앞에 쌓인 먼지며 솜털 같은 꽃가루, 나뭇잎새를 쓸었다.

창수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계속 호수를 확인하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배달 사고가 하나라도 나서 보급소로 전화가 오게 되면 영락없이 지각을 해야 하니까.

「천이백삼 호... 천이백오 호...」

얼른 돌리려는 욕심으로 뛰면서 신문을 배달하던 창수는 순간적으로 멈칫 서버렸다. 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쪽지가 문 앞에 붙어 있었다. <신문사절>이라고 써붙인 쪽지인가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신문사절>은 아니었다.

<발소리 엄금!! 고3있음 ! ! !>

창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새학기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다. 이제는 <맹견 주의>보다 <고3 있음>이 더 강력한 필체로 경고문에 등장하는 메뉴이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1205호를 통과하여 다시 뛰던 창수는 두 집을 지나 또 경고문이 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창수는 또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신문사절이 아니었다.

<호흡엄금! 고3에 중3, 재수생까지 완비!>

창수는 호흡을 가다듬고 그 집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배달을 하다가는 언제 B동을 다 끝낼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다.


창수가 신문을 배달하는 집 중에는 같은 반인 봉구네도 있었다. 창수는 봉구와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지만 봉구가 좋은 아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벌써 맘에 맞는 아이들끼리는 몇 년 사귄 사이처럼 죽이 잘 맞고 있었다. 창수는 누구에게도 여유를 보여주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친구를 사귀고 나면 자기의 집안 사정도 자연히 알려지게 되고 그러면 금방 소문이 나서 얼마 안 가 모든 아이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창수는 그러느니 차라리 친구 없이 비밀에 싸인 아이로 남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올라와 5년 동안 지내며 터득한 지혜 중 가장 쓸모 있는 것이었다.


봉구는 창수가 신문을 현관 앞에 내려놓고 간 후 1시간이나 있다가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나 정작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그 후 10분이 지나야 한다. 1차로 자명종 시계가 울리고 나서 5분 뒤 어머니가 와 흔들어 주고 다시 5분 뒤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하고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열고 들어와 이불을 확 잡아당겨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봉구는 2학년이 되면서부터 새벽마다 악몽을 꾸는 버릇이 생겼다. 봉구의 학교에는 전국대회 3연패를 자랑하는 농구부가 장악하고 있어 평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학교 체육관이 있다. 꿈속에선 텅 빈 그 체육관 안에서 봉구 혼자 농구 골대를 타고 오르는 것이다. 마루 바닥에는 책가방과 운동화, 흰 봉투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농구 골대 위에 간신히 밧줄을 걸어 놓고는 밧줄 고리 안에다 얼굴을 들이민다. 그리고는 걸상을 발로 툭 차버린다. 갑자기 목에 밧줄이 조여지는 긴장감을 느낀 순간부터 봉구는 실제로도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윽 ――― 윽 ―――」

몸부림을 치는 끝에 밧줄이 확 풀어져 봉구는 마루 바닥에 쾅 떨어져 버린다.

「아 ---- 악.」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고서도 두 손으로 목을 잡고 봉구는 괴로워했다.

「봉구야, 봉구야.」

봉구의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온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자 그제서야 봉구는 제정신이 들었다. 얼떨결에 <예---예> 하고 대답을 한 봉구는 다시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또 떨어졌냐?」

「예」

「문 좀 열어 봐.」

봉구는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문을 열고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 반찬이 뭐예요?」

「반찬이 문제니? 어디 부러진 데는 없어?」

「무사해요. 워낙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그 정도로 부상당하진 않아요.」

「곧 죽어도 잘난 체는. 공부는 못하는 게 만날 자다가 떨어지는 꿈만 꾸면 어떡해? 재수없 게...」

「엄마, 그럼 어떻게 내 맘대로 꿈을 바꿔요?」

「벌써 며칠째 같은 꿈을 꾸니까 그렇지. 정신 상태가 틀려먹어서 그래.」

「내가 뭘요.」

봉구는 입이 비쭉 앞으로 나왔다.

「입 집어넣어. 그 얼굴에 입까지 내밀구. 네가 정신 차리고 공부해 봐라. 매일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꾸지.」

「엄마는, 나보구 지구를 떠나라 이 말이에요?」

목욕탕 문이 벌컥 열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침부터 모자가 입씨름이야, 시끄럽게. 이 금쪽같은 아침 시간에.」

할수 없이 어머니는 부엌으로 돌아가고 봉구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나오면서 봉구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버지, 왜요? 내 얼굴 잘생겼죠?」

「너 내 면도기 쓰냐?」

「예-----이」

순간 꿀밤이 날아왔다. 잠도 덜 깬 상태라 봉구는 무방비 상태로 꿀밤을 맞고 말았다.

「이놈아, 썼으면 좀 깨끗이 해놔.」

봉구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목매 죽느냐, 맞아 죽느냐, 그것이 문제구나. 아침마다 악몽을 꾸니까 살맛이 안나.」


부엌에서는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변기에 앉아 있던 봉구는 닫힌 문새로 스며드는 음식 냄새와 엉덩이 밑에서 나는 냄새 사이에서 용케 아침상의 메뉴를 알아맞혔다.

「으음, 게 찌개. 연근 조림, 이건 뭐냐? 갈치구나 갈치.」

「오빠, 빨리 나와. 나 늦겠어.」

「알았어. 알았어.」

아침마다 머리를 감느라 부산을 떠는 여동생 진수에게 목욕탕을 물려주고 봉구는 후다닥 식탁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아버님, 아바마마.」

그러나 아버지는 찌개 국물만 떠 마실 뿐 봉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대꾸를 했다.

「왜 그래, 너 또 돈 다 썼니?」

「엄만, 내가 무슨 이코노믹 애니멀이야? 아버지와 대화를 하려는 거지. <지금 곧 자녀와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그 광고도 못 보셨어요?」

그제서야 아버지는 봉구 쪽을 바라보았다. 봉구는 신이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나 학교에 좀 태워다 주세요. 지하철, 어떤지 아시죠? 머릿속에 간신히 집어넣은 게 다 튀어나온다니까요.」

「안돼.」

「왜 안돼요?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게 아버지 좌우명이셨다면서...」

「나 좌우명 바꿨어. 안 되는 건 어떻게 해도 안 되더라.」

「왜 안 돼요?」

「그 차가 내 차냐. 회사 차지. 기름도 회사 돈으로 넣는 거야. 사리사욕을 위해 회사 물건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거야.」

「기왕 달리는 거, 저 좀 태우고 달리다가 싹 내리는 건데 어때요.」

「너 때문에 5백 미터쯤 돌아가야지, 네 무게만큼 차에 부담 가니까 차 헐지, 타이어 닳지, 시트 꺼지지. 안 돼.」

아버지의 논리정연한 대답에 기가 죽은 봉구는 별수 없이 지긋지긋한 지하철 4호선에 끼어 들었다.



봉구와 같은 반인 은주는 그 시간에 버스 안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가방은 왼쪽으로 달아나려 하고 있었고 발은 오른쪽밖에 딛을 곳이 없었다. 뒤에서는 점잖게 생긴 40대의 어떤 아저씨가 찰싹 달라붙어 마늘 냄새 나는 입김을 훅훅 내보냈다. 은주는 결사적으로 그 아저씨에게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만한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차가 밀려서 보통 때보다 5분이나 더 걸려 학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은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내일부터는 좌석버스를 타야겠어. 도저히...」

어머니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등교하던 일이 그리워지려는 순간, 은주는 계속해서 버스에서 쏟아지듯 내려서는 많은 학생을 보았다. 책가방에서 이름표를 꺼내 달면서 은주는 잠깐이나마 자가용 차를 그리워한 자신을 꾸짖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를 설득해 버스를 타고 다니겠다고 했던 것은 은주 자신이었다.

은주는 학교에 자가용으로 등교하는 학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은주는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 같이 타고 오면서 하던 얘기들을 즐겁게 털어놓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엄마 곁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십 분 동안이나마 단어장을 들여다보며 등교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이 매일매일 치르는 전쟁이니 은주도 그 전쟁에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보니 힘든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교문 앞에서 선도부가 두 줄로 쭉 늘어서서 눈초리도 매섭게 등교하는 학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복장이 불량하다고(칼라 없는 티셔츠나 모자 달린 점퍼, 원색의 옷), 이름표를 안 달고 학교 배지를 안 달았다고, 머리에 무스 발랐다고 붙잡아서는 교문 옆에 세워 두거나 기합을 받고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항상 교문 앞은 살벌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좋은 시간을 살벌한 눈초리와 조마조마한 분위기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은주는 슬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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