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리 치며 나타난 뮤지컬계의 ‘나쁜 남자’, 배우 강태을
큰 소리 치며 나타난 뮤지컬계의 ‘나쁜 남자’, 배우 강태을
  • 김선
  • 승인 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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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곯으며 견뎌낸 일본에서의 5년이 밑거름” / 김선



[인터뷰365 김선] 2008년 혜성같이 등장한 뮤지컬 배우 강태을(30). 강태을은 <대장금>(2008,2009) <록키호러쇼>(2008) <돈주앙>(2009) 등 3편을 연이어 출연해 그 이름을 알렸다. 클 태, 소리 을. ‘큰소리 치며 살라’며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처럼 그는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자 신인상을 거머쥐며 한국 뮤지컬계를 이끌 유망주로 우뚝 섰다.

2006년 일본 극단 ‘사계’ 소속으로 뮤지컬 <라이온 킹>으로 내한무대를 가진 것을 제외하곤 실질적으로 그가 한국 뮤지컬 무대에 활동한 건 1년이 채 안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뮤지컬 배우로 당당히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건 언제 어디서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준비된 배우였기 때문이다.

2004년, 뮤지컬 배우의 꿈을 안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 비행기 삯과 생활비를 마련해 간 일본에서 그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고된 연습을 견뎌냈다. 일본 유명 극단 ‘사계’의 연구생으로 시작했던 그는 6개월 만에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시몬 역으로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쳤고, 이후 <아이다> <캣츠> <라이온 킹>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주요배역을 맡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5년간 일본에서 다져온 탄탄한 기본 실력은 2008년 한국에서도 빛을 발했다. <대장금>과 <록키호러쇼>의 주연과 더불어 350대 1의 경쟁을 뚫고 프랑스 라이선스 뮤지컬 <돈주앙>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현재 강태을은 <돈주앙>에서 타이틀롤인 돈주앙을 맡아 공연중이다. 까칠한 턱수염에 긴머리를 질끈 묶은 ‘돈주앙스런’ 모습의 강태을을 공연이 열리고 있는 충무아트홀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만나봤다.



긴 머리가 인상적이다.

더워 죽겠다. 돈주앙 역에 어울리는 이미지에 맞추려고 일부러 머리를 길렀다. <돈주앙>이 끝난 후 9월 시작되는 뮤지컬 <어쌔신>에서 암살자 존 부스를 맡았는데, 이 역할에서도 긴 헤어스타일을 선보일 예정이라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 될 것 같다. 평소에는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지만, 수염은 매일 면도하는 것도 귀찮고 신경을 잘 쓰지 않는 편이라 그냥 내버려둔다. 주변에서도 수염 기른 게 잘 어울린다고도 하고. 하하하.


최근 출연작 <라이온킹>(2006)의 사자왕 무파사, <돈주앙>(2009) 속 돈주앙이나 앞으로 출연할 <어쌔신>도 그렇고, 남성스런 역할을 주로 맡고 있는데.

지금 나와 어울리는 역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30살이란 내 현재 나이에, 이런 모습에, 이런 감성을 가진 할 수 있는 역할들을 찾다보니 그런 것 같다. 이런 역할이 내게 맞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뮤지컬 <돈주앙>에서 연기하고 있는 돈주앙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옴므 파탈(l'homme fatal: 나쁜 남자) 캐릭터인데. 돈주앙의 이미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돈주앙이 가진 나쁜 남자의 면은 모든 남자에게 다 있다. 물론 모든 여자에게도 있겠지. 자기 안에 있는 나쁜 남자의 성향을 어떻게 확대시키는가가 과제였다. 역할을 맡으면서 ‘내가 만약 돈주앙이라면?’이란 생각을 놓지 않았다. 걸음걸이나 포즈, 말투며 일상생활에서도 돈주앙적인 모습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나도 모르게 내 생활에서 돈주앙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뿌듯하기도 했고. <돈주앙> 초연을 끝내고 <대장금>공연 연습에 갔더니 “돈주앙에 너무 빠져있는 게 아니냐. 말투나 포즈도 그렇고 왠지 느끼해졌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하하.

국내 무대 데뷔 전 일본에서 먼저 뮤지컬을 한 걸로 안다. 일본에는 어떻게 진출하게 된 건가.

2004년 KBS1TV ‘현장르포 제 3시대’에 방영된 ‘34인의 도전! 일본 뮤지컬속으로’란 다큐멘터리 프로에 참여하게 됐다. ‘34인의 도전’은 재학생 또는 졸업생으로 구성된 서울예술대학의 34명이 일본 극단 ‘사계(四季)’의 오디션에 참여하는 과정을 찍은 프로그램인데, 대학교(서울예술대학) 교수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극단에서 2주간의 레슨을 받은 후 오디션에 합격하게 됐고, 극단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사계’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유명 뮤지컬 극단이다. 1천여명의 스탭들과 실력있는 배우들로 구성돼 있으며, 매년 280개의 도시에서 2천 800회의 공연을 하고 230만 명의 관객들을 끌어 모으는 극단이다. ‘사계’는 명성만큼이나 지독한 레슨과 훈련, 까다로운 오디션으로 유명하다.



극단에서의 초기 일본 생활은 어땠나.

처음 극단에서 레슨을 받고 일본 공연을 보면서 일본에 남아 트레이닝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 트레이닝을 거치면 배우로서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극단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을 다 배우고 뽑아낼 것이 있으면 더 뽑아내 내 것으로 만들 때까지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쉬운 곳이 아니었다. ‘사계’는 크고 화려하지만 절도 있는 곳이다. 워낙 소속 배우들도 많기 때문에 최고 높은 단계인 정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맨 밑바닥인 ‘연구생’이란 위치부터 시작한다. 연구생시절엔 청소로 시작하고 청소로 끝났다. 아침에 와서 청소하고 레슨받고 또 청소하고, 연습하기 전에 또 청소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연구생 6개월간 가장 기억났던 게 청소 한 기억밖에 없는 것 같다. 하하하.


극단에서의 연습이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는데.

수업 커리큘럼이 체계적으로 꽉 짜여 있는 곳이다. 수업은 오전 7시에 시작해 발레를 배우고 점심식사 후 재즈수업, 발성법 공부, 일본어 수업 등으로 진행됐다. 일정이 끝나면 숙제하고 개인 연습하고 집에 오면 밤 10시나 11시가 됐다. 식사시간과 취침시간 빼곤 모두 연습뿐이었다. 그야말로 스파르타 교육이 따로 없다. 더욱이 모국어로 공연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배우들이 일반적으로 한 달 할 연습 분량을 꼬박 3개월을 연습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첫 무대에 진출하게 됐나.

원래 연구생은 1년간 연수를 받아야 되지만, 운 좋게 6개월 연수 끝나고 중간시험에 합격 해 그 윗단계인 ‘시즌 멤버’로 활동할 수 있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앙상블로 투입된 후 ‘시몬’역을 맡아 무대에 서게 됐다. 이후 <아이다><라이언 킹><캣츠>등에 출연했다.


얼마동안 일본에서 활동을 했나. 일본에서 뮤지컬 배우로서 인지도는 어느 정도였는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있었으니 5년간 일본에 있었던 셈이다. 일본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했다. 처음 연구생으로 시작해서 한국에 오기 전까지 주연급으로 구성된 극단원으로 활동했으니. 극단원보다 높은 위치는 단원의 최고참인 정단원인데, 정단원은 나이가 많은 원로배우거나 10년 이상 경력자들이 주를 이뤘다.

일본에서 인정받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로서 인지도가 전무했던 한국행을 선택하기까지 고민도 많이 했겠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적응도 됐고, 뮤지컬 배우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해 흘러갈 때마다 고민도 됐다. 아마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이 가진 공통점이 아닐까 한다. 평생 살 것인가, 아님 돌아갈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생각.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봤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더라.

일본에서 내가 꼭 해보고 싶은 배역을 맡기 전까지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꼭 맡고 싶은 배역을 정해 순서를 나열해 봤더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시몬, <아이다>의 장군 라다메스, <에비타>의 체 게바라, <캣츠>의 럼텀터거와 멍커스트랩 순이었다. 내 목표는 이 배역들을 순차적으로 다 해본 다음 <캣츠>의 멍커스트랩을 제일 마지막에 해보는 것이었다. (극속 권위적이면서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멍커스트랩은 최고의 댄스 실력과 가창력을 갖춰야 되는 역할이다.)

운 좋게도 내가 원했던 역할을 다 해보기도 전에, 2008년 멍커스트랩 역을 맡게 됐다. ‘그래 이제 한국에 가자’고 결심했고 미련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일본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

일본에서 잘 풀린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아픈 일도 많다. 극단 ‘사계’ 소속 배우로 2006년 <라이언 킹> 첫 한국 내한 공연 당시 그 설움은 잊을 수가 없다. 공연에서 주인공 심바의 아버지인 사자왕 <무파사>역할과 앙상블을 맡아 함께 연습 했다. 일본에서 진행됐던 시연회에서 <무파사>로 무대에 올랐고, 당연히 이 역으로 무대에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내한 공연을 코앞에 앞두고 갑자기 캐스팅을 바꾸었고, 결국 나는 앙상블로 무대에 오르게 됐다.

캐스팅이 바뀌었음을 안 순간 무파사가 되기 위해 몇날 며칠을 노력했던 그 동안의 내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무파사로 멋있게 데뷔하고 싶었는데.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 그땐 정말 일본에서 고생했던 상황들이 필름처럼 머리 속에 하나씩 스쳐 지나가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일본에 갈 때 비행기표 살 돈과 1달치 생활비가 없어서 매달 1만엔씩 갚는다는 조건으로 친구한테 5만엔을 꾸어서 갔다. 가서는 가장 싼 음식을 사서 1주일 내내 같은 식사를 하며 열심히 연습하면서 버텼던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앙상블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 해 무파사를 맡아 한국 무대에 오르게 됐다.


<돈주앙> 공개 오디션에 3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발탁 당시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없었던 신인이였기에 공연계에 큰 이슈가 됐다.

6차로 진행된 <돈주앙>오디션은 그 기간만 6개월이었다.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이 오디션 선발에 참여했는데 극본 및 작곡을 담당한 펠릭스가 직접 내한했다. 오프라인 오디션을 진행 한 후 국내 최초 TV생방송 오디션, 동영상 포털 사이트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UCC오디션 등을 거쳤다. 오디션을 뽑힌 배우들은 오리지널 <돈주앙> 예술 감독 웨인 폭스와 함께 배역에 대한 워크숍을 참여한 후 배역에 가장 가까운 배우들이 최종적으로 선발됐다.

초반 오디션이 끝난 후 크리에이티브팀은 나를 돈주앙이 아니라 돈주앙과 라이벌 관계로 등장하는 라파엘역으로 염두해 두었던 것 같다. 오디션에 돈주앙역 노래와 라파엘역 노래를 준비해갔는데, 웨인폭스가 라파엘 노래를 들은 후 악수를 청했다. ‘아 라파엘이 되겠구나’ 느낌이 들었고, 최종 오디션을 앞두고 라파엘들 중 한명에 내가 뽑히게 됐다.

워크숍에서 웨인폭스가 라파엘과 돈주앙으로 뽑힌 배우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돈주앙과 마리아의 듀엣 곡 ‘난 새로워졌지(Changer)’를 다 시켰다. ‘돈주앙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라고 생각해 돈주앙 같은 음색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시선과 모습 등에서도 돈주앙 적인 모습을 부각시켰고. 워크숍 막바지쯤엔 라파엘 방에서 돈주앙 방으로 옮기라는 연락을 받았고, 결국 돈주앙 3명 중 한명으로 발탁됐다.


오디션 치르는 게 어렵지 않았나.

일본에 있었던 5년 내내 일본말로 크리에이티브팀과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이런 오디션이 익숙했다. 일본에서 진행되는 오디션은 정말 ‘번개 오디션’이다. 정해진 약속 없이 갑자기 불러내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킨다. 워낙 배우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고 평소 준비돼 있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든 곳이다. 언제 갑자기 나에게 노래를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연습벌레가 돼야 했다. 어쩌다가 몸이 안좋아 연습실이 아닌 집이라도 있는 날엔 오디션 기회조차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극단에서는 일반적으로 선배가 가르쳐주는데, 선배가 한 얘기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 후배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써주기 힘든데다가, 뛰어난 배우들도 많아 세 번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되면 무대에 오를 기회조차 박탈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배들로부터 지적을 받거나 설명을 들을 때는 항상 메모했다. 그 메모 노트를 보고 또 봤는데, 이건 정말 굉장한 효능을 발휘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항상 머리속에 상기시켰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항상 긴장감을 갖고 공연장에 살게 해준 원동력이 됐다.

일본 공연계가 한국과 비교해서 다른 점은 어떤 것인가.

일본 공연은 정확하게 짜여진 각본과 스케줄에서만 허용 된다. 일본에서는 배우만의 색깔을 표현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한국 배우들이 가장 많이 지적받는 말이 ‘작품이 중요하지 너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쇼가 아니다. 네 쇼처럼 보이지 말라’이다.

한국에서 공연하면서 일본과 방식이 달라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

일본에 비교해 한국에서는 배우들이 자기 색깔을 많이 표현한다. <대장금>의 조광조역은 감정을 표출하고 내뱉기 보다는 점잖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역이었는데, 그동안 일본에서도 선이 굵은 역할을 많이 해왔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록키호러쇼>에서 프랑큰 퍼터로 출연했을 때는 혼란스러웠다. 일본의 공연 분위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내게 배우가 극을 이끌어가는 이런 공연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다보니 공연 중간 중간 나도 모르게 애드립이 툭툭 튀어나왔고, 관객들이 보내주는 호응에 힘을 얻으며 조금씩 나만의 쇼를 완성해나갔다. 아직도 이런 공연 분위기에 많이 부족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돈주앙>과 <대장금>으로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자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신인상 호명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시상 소감 준비도 못해서 개미만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소감을 마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고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도 너무 많더라. 왜 그렇게 짧게 얘기했는지 후회된다.


아버지가 유명한 연극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연극인이자 명상가로 유명한 연극연출가 강만홍씨는 1996년 서울예대 연극과 교수로 재직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실험연극의 메카인 뉴욕 라마마 극단에서 배우 겸 연극연출가로 활동을 했다. 정지영 감독의 <까>(1998)의 소재가 된 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내 훌륭한 스승이자 선배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공연을 보여 주셨다. 내가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와 할아버지 덕분이다. 운동신경이나 몸짓에 대한 연극적인 부분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가창력은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할아버지가 노래를 잘 부르셨는데, 소싯적 가수를 꿈꾸셨다가 8남매의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양장기술을 배워 생업에 뛰어드셨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보면 딱 뮤지컬 하기 좋은 조건만 물려받은 셈이다.

사실 학창시절 내 꿈은 원래 농구선수였다. 고교시절까지 아마추어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고교 때 키가 더이상 크지 않아 농구는 그만뒀지만. 농구를 그만둔 후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해선 연기를 먼저 해보라고 제안하시더라. 결국 대학도 아버지가 몸담으셨던 서울예대 연극과에 지원하게 됐다.




신인상을 타니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던가.

시상식장에도 오셨는데 너무 좋아하시면서 꼭 안아주셨다. 시상 후 트로피를 서재에 놔두었는데 어느날 집에 와보니 거실 TV위에 올려져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에게 이게 왜 여기 있냐고 여쭈니 ‘보기 좋잖아’ 하시더라. 하하하.


30살이다. 많으면 많다고도, 적으면 적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이다. 30살이 되니 뭔가 바뀐 게 있는 것 같나.

예전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주변의 많은 상황들이 나를 좀 더 성숙하게 해주더라. 작년 한해 <대장금> <록키호러쇼>등에 출연했고, <돈주앙> 오디션에 참여하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본격적인 한국 활동에 너무 신이 났고, 더 좋은 모습을 한국 관객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덕분에 ‘3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신인상을 타는 등 행복한 해를 보냈지만, 한해 동안 너무 앞만 보고 바쁘게만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시간적 여유가 있어 중국 상하이에 5박 6일 정도로 여행을 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내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 시간이 많았다. 한층 심적으로 안정도 됐고, 성숙해진 느낌이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지금까지 거친 남성적인 이미지를 많이 보여드렸다. 그 이유는 지금 내 모습을 가장 많이 담고 있고, 때문에 더 잘 표현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 때문이다.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싶지 않다. 애써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내 모습을 담아내고 싶다. 로맨틱 코미디를 해야 될 때가 되면 할 거고, 청춘극을 할 기회가 되면 또 그때의 강태을을 보여드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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