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에게 ‘마더’란? 그리고 ‘엄마’란?
김혜자에게 ‘마더’란? 그리고 ‘엄마’란?
  • 이승우
  • 승인 200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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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당신은 괜히 결혼해 고생했다 그랬지” / 이승우



[인터뷰365 이승우] '국민엄마'로 반평생을 살았는데, 30대를 갓 넘은 감독 한 명이 계속 '엄마'를 소재로 영화를 찍자고 매달렸다. 젊은 감독이 나를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또다시 엄마를 연기하라니, 처음부터 안 한다고 돌려보냈다. 귓등으로 흘려들었지만 그가 말하는 엄마는 보통 엄마랑 달랐다. 5년간 설득과 고사가 반복됐고, 정식으로 시나리오를 받고 나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마더'란 이름으로 크랭크인한 이 영화는 첫 촬영이 들어가는 날 이미 모든 촬영을 끝낸 날처럼 모든 게 너무 익숙해 김혜자를 놀라게 했다.

결국 김혜자는 이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에서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레드 카펫에 들어서는 김혜자의 모습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 부럽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나이 육십을 넘겼지만 현역으로 활동하며 칸영화제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여배우가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그 여배우는 지금, 연기의 고됨과 스포트라이트의 화려함이 끝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마더'의 김혜자를 만났다.



첫 영화인 '만추(1982)'로 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세 번째 영화 '마더'로는 칸 영화제를 다녀왔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 촬영보다 더 힘들었다. 아무래도 외국 기자들도 궁금한 건 비슷하니까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니 좀 지치더라.(웃음) 그래도 아무 선입견 없이 봐줘서 좋았다. 우리나라는 나를 '한국의 어머니상'으로만 보니까. 가장 인상 깊은 질문은 뭐였냐고? '나이 젊은 배우도 클로즈 업 촬영은 부담스러울 텐데 어떻게 소화했나'란 거였는데, 나를 50대 배우로만 알고 있어서 기뻤다.


현지 언론은 '한국에서 온 엄마가 칸을 휘어잡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어떤 기사에는 endless (끝이 없는, 영원히 풍부한)표정에 압도당했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실 국내에서는 기자들 앞에 서면 약간 죄인 같은 느낌이 드는데, 거기서는 박수에 후하고 표정들이 다양해서 기분이 많이 풀어졌다. 레드카펫 행사도 15분이 안넘게 강력하게 제지하고, 배우들이 신경 안 써도 되게끔 진행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끄는 게 인상 깊었다. 차에 탔는데, 어떤 기자가 엄지손가락을 두 개 올리는 거 그걸 뭐라고 하더라. "two thumbs up!" 이라며 창문을 두드리는데 그게 또 그렇게 설레고 많이 웃었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영화가 레드카펫 하는 경우도 드물다고 들었다.

거짓말 안하고, 극장 들어갈 때까지 떨렸다. 들어갈 때 기립박수를 쳤다는 것도 나중에 들었다. 단지 계단에서 넘어지지 말자는 생각만 했으니까.(웃음) 여신 컨셉의 드레스를 입어서 우아하게 걷고자 노력을 많이 했다. 사실 너무 감사하다. 비경쟁 부문이라 마음에 크게 부담이 없었다. 사실 경쟁부문이라면 누군가에게 타겟이 되고 노여움도 살 수 있는 거잖아. 평소 경쟁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비경쟁이라도 칸영화제에는 안 가려고 했는데, 내가 안가면 후배들이 모두 안 간다고 하더라. 그건 나만 생각하는 거란 생각에 이 나이에 칸까지 날아간 거지.(웃음)



아들을 지키기 위한 신들린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예우 차원에서라도 올해 여우주연상은 다 휩쓸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괜찮아, 내가 얼마나 오래 하겠어? 환갑이 넘은 여배우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다 주겠지.(웃음) 사실 남들이 칭찬해주는 게 너무 좋다. 연기하면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드니까. 음악을 맡은 이병우 씨가 음악을 넣으면서 "연기가 너무 좋다"면서 연신 감탄했다고 하더라. 그렇게 스태프들의 칭찬이 너무 위안이 된다. '마더'를 찍으면서는 정말 한참을 그 감정에 갇혀 지냈다. 그러면 봉 감독이 "가서 선생님 좀 말려드려. 쓰러질 것 같으니까"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곤 했지.


가장 긴 여운이 남았던 장면은 뭔가.

영화 마지막에 아들한테 침통을 건네받는 장면. 그거 찍으면서 한참 울었다. 지문에 '형언 할 수 없는 표정'이라고 써있는데 전혀 표현이 안되는 거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감독이 OK를 했는데도 내가 연기한 것 같지 않더라고. 속으로 '내가 더 이상 나올 게 없으니깐 OK 한 걸 거야'란 생각까지 들어서 더 서럽더라고.


시나리오상에도 이름이 '혜자'로 나온다. 받아들이기가 더 특별했을 것 같다.

극중 혜자는 삶이 불안한 여자다. 처음부터 '넋 나간 얼굴'이란 말이 나온다. 그걸 읽은 순간부터 연기가 불안하고, 항상 고단했다. 현장에서도 항상 도준(원빈)이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아주 잠깐 나오긴 하지만 혜자는 잘 때도 언제든지 뛰어나갈 채비를 하고 자고 있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다루지만 여성으로서의 감정도 언뜻언뜻 비친다.

모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참, 관능적인 여자다. 아기가 엄마 가슴에 손을 올리는 건 당연하지만 다 큰 아들이 엄마랑 자면서 그렇지 않은데, '마더'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다. 아들 친구로 나온 진구하고의 관계도 아들과 놀아줘서 기쁘기도 하지만 증오의 대상으로 나오지 않나. 친구 엄마인데도 나한테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부분이 약간 관능적으로 나왔다. 난 감독의 그런 의도가 정말 와 닿았다.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전해지더라.


광기로 치닫는 연기는 남자배우도 쉽지 않은데, 시나리오를 보고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

난 일상적인 엄마에 지쳐 있었다. 인생이 재미없을 정도였다. 예전에 '사랑이 뭐길래'랑 김정수 작가가 쓴 '전원일기'부분에서 나온 따스한 엄마 말고는 거기서 거기인 엄마만 수도 없이 했다. 배우로서 그건...(잠시 침묵) 정말 지치는 일이다.


현장에서 지나치게 디테일에 집착해서 '봉테일'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감독과의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별명을 알고 있었나.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그렇게 부르는 걸 보고 '그 사람이 찍자고 하면 나도 해야 되겠다'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형언할 수 없는 눈빛'은 너무 안되고 성에 안 차서 "그럼 봉 감독이 직접 해봐"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와 버렸다. 하고 싶은 말은 문자로 하라고 하면서. 내가 이 나이 될 때까지 휴대폰 없이 사니까 '마더'팀에서 너무 답답하다고 사준 전화가 있었거든. 그랬더니 바로 "세상이 환호할 때는 인정하세요"라며 문자가 뜨는 거야. 다시 돌아가서 마음 다잡고 촬영을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아들 도빈 역에 원빈을 먼저 제안했다고 들었다.

봉 감독도 이미 (원)빈이를 도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 이름도 본명인 도진이랑 비슷하다. 현장에서도 도준이라고 부르면서 대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미울 때가 있는 법인데, '마더'는 그런 감정을 너무 세세히 풀어냈다. 아들이 그런 생각을 알고 나를 미워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고. 영화엔 자세히 안 나오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크겠나. 사실 영화 초반에는 '이 여자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다 남편은 누구여도 좋다고, 도준이가 나오기 위해서 존재했던 사람이고,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후줄근한 의상이나, 관광버스춤을 추는 김혜자의 모습도 색달랐다.

의상이 너무 후져서 '이걸 어떻게 입고 해' 그랬다. 전원일기보다도 더 이상하더라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게, 나중엔 그 옷을 입어야 편하더라. 그 관광버스 춤도 사실 너무 무안한 거야. 대학교 때 농활 가면 시골 아줌마들이 많이 춘다는데, 본 적이 있어야지. 그게 막 추는 것 같아도 에너지 안배를 잘 해서 지치지 않고 몇 시간씩 춰지는 춤이래. 연습은 했는데, 막상 혼자 추려니 무안해서 모두 앞에서 춰 달라고 부탁하고 촬영한 신이다. 카메라는 나를 찍고, 카메라 뒤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봉 감독의 큐 사인이 나자마자 그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이데. 그냥 자연에 몸을 맡긴 거지, 춤이라고 할 수 없지. 풀잎이나 나무처럼 몸을 흔든 것뿐이다.


엔딩 부분에서 보여지는 허벅지는 대역인가. 20대 후반의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몸 같지 않게 뽀얗고 탄력적으로 나온다.

이 나이에 무슨 대역을 써.(웃음) 그렇게 봐주는 게 고마운 거지. 얼굴을 관리 받지만 몸 관리는 안한다. 탄력은 아예 없다고 봐야 돼. 난 사실 때도 잘 안 민다. 병원에서는 근력 운동을 추천하는데, 해보진 않았다. 나에게 운동은 아프리카 봉사인 것 같다. 거기 가면 내가 서울에서 한 고민들은 하나같이 쓰레기로 느껴진다. 깨끗이 씻겨져 오는 느낌이다. 가서는 가슴 아파 울지만 올 때는 좋은 생각만 하다 오게 된다. 사실 봉사라는 말도 부끄럽다. 그건 봉사가 아닌 나를 구원하러 가는 거다.


피부도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창피하지만 나는 씻는 걸 진짜 귀찮아한다. 심지어 머리도 '오늘 며칠이나 지났지?'라고 계산하고 겨우 감는 편이다. (웃음) 피부는 정말 관리 좀 받아야 하는데 그런 계획이 귀찮을 정도로 닦는 걸 싫어한다. 피부는 같이 봉사하러 가는 팀 중에 한 명인 의사가 아무리 타고난 피부여도, 60이 넘으면 관리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한 달에 한번 병원에 가는 게 다인데 좋아 보인다니 보람을 느끼네.


'마더'는 김혜자에게 어떤 영화인가.

'마더'는 그리스 비극 같은 영화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생각들이 점점 간소화 됐다. 대본에 있는 것만 표현하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건 아무 생각 없이 연기하는 것과는 엄연히 틀린 거다. '마더'는 복잡한 걸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나는 언제나 그런 연기를 갈망했다.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되레 심플하게 연기해 내는 것. '마더'는 그걸 만족시켜준 영화다. 그런 면에서 보면 봉 감독은 진짜 대단한 거야. 내가 처음 그를 알았을 때 봉 감독 나이가 마흔이 안됐다. 진짜로. 정말 젊었을 때였는데. 영화 찍을 때마다 그가 하는 디렉션이 모두 옳아서 너무 감탄하면서 찍었지.


'마더'를 찍으며 치열하게 매달렸고, 그 뒤로는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지금은 본연의 김혜자로 돌아왔나.

난 내가 연기한 인물이 빠져나가면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기운이 없어서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 연기 할 때만 힘이 나서, 그야말로 오롯이 가만히 앉아만 있다. 죽어있는 것처럼. 계획을 세우는 편도 아니고, 언제나 인연이 닿은 작품만 하게 된다. 연극배우로 막 활동할 때는 정말 밥도 안 먹고 기운이 빠져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 전 헤어진 남편이 나한테 "당신은 배우만 했어야 했는데, 괜히 결혼을 해서 부대끼고 고생했다"고 말하더라. 남편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알았던 거지. 난 내가 앞으로 뭘 할지 모르고, 내 앞에 있는 일만 충실하고 싶다.


가족들은 '국민 엄마'와 살았던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나.

난 여배우와 엄마가 분리된 삶을 살아왔다. 앞서 헤어졌다고 표현한 남편이랑은 췌장암으로 이별했는데, 한달 반 만에 내 곁을 떠났다. 그 사람한테 나를 다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병원 침대 옆에서 같이 먹고 자고 했더니, 남편 담당의사가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며 거울 좀 보라는 거야. 정말 거울 안에는 입술이 검게 변해버린 내가 서 있었다. 남편이 하루만이라도 집에 가서 자라고 하기에 망설이다 집에 도착하니, 그때 운명했다는 전화가 왔다. (잠시 침묵) 아들이 중학생이었을 때는 "엄마는 연기 할 때 주위에 보이지 않는 막이 쳐있는 것 같아. 가까이 갈 수 없는 힘이 느껴져"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은 식구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집에서의 김혜자는 어떤 엄마인가.

내 일이 우선이어서 애들한테 소원했다. 사실 난 아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손주가 더욱 애틋한 건, 친자식하고 비할 수는 없지만 내가 책임을 안 주고, 예뻐하기만 되는 존재니까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는 가족을 절대 대입시키지 않는다. 또 도준이는 특수한 상황이었고, 연기하는데 어떤 경험, 실제적인 게 연기하고 직결된다고 보진 않는다. 내가 보고, 읽었던 것, 인상적이었던 일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연기할 때 나오는 거다.


배우로서 '마더'는 몇만 관객이 들 것 같나.

이 영화가 성공해서 나한테 떠나가 버리면 차기작을 고려해 보려고 한다. 사실 숫자개념이 너무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든 관객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천만 관객이래. 그래서 '마더'는 1500만 아닐까? 그랬더니 다 놀라더라. 하지만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룬 게 아니지 않나. '마더'는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을 짐승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찍은 영화다. 새끼 갓 나았을 때 이빨 드러내듯이. 표현이 강렬하지 않지만 엄마라면 모두 공감하지 않을까. 자식들은 엄마의 생활이 그렇게 치열한지 모를 거다. 나는 첫 애를 낳고, 자는 아이의 목에 호흡이 발딱발딱 뛰는 게 멈출까 봐 불안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내 아들이 내가 자는 동안 혹시라도 죽으면 어쩌나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게 크니까 자기 잘나서 큰 줄 안다. 부모가 돼봐야 그 마음을 아는 거지.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같이 칸에 간 '박쥐'의 김해숙 씨가 내게 "우리의 멘토"라는 말을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후배들에게 끼칠 영향까지 생각 안하고 그냥 한 배우로서 생을 잘 끝맺고 싶었거든. 내가 일기에 "이제 커튼콜만 남았다"라고 쓴 지가 몇 십년 전이다. 이렇게 오래 살지 몰랐다. 외국 배우들은 인터뷰해도 나이를 안 쓰는데, 우리나라는 꼭 쓰는 바람에 속상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지. 좋은 배우보다 인생을 잘 마무리한 한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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