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남편, 해외입양 아들과의 행복의 삶, 배우 김진아
외국인 남편, 해외입양 아들과의 행복의 삶, 배우 김진아
  • 김두호
  • 승인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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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는 나의 수렁이었다. 이제는 흐르는 물처럼 산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춘 여배우 김진아가 몰라보게 변해서 산다. 삶의 스케일도 바뀌었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는 의식도 달라졌다. 아들을 입양해 엄마가 된 것도 큰 변화중의 하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활동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고, 자살 충동을 느끼며 지낸 젊은 날의 방황을 이제는 자식에 대한 엄마의 진정한 애정의 거울로 바꾸었다. 남편은 미국의 부동산 금융기업인 와코비아 은행 한국지사에 근무하는 케빈 오제이씨, 5년전 갓난아기로 입양한 아들 메튜도 아버지의 선량한 눈빛을 닮은 벽안이다.


김진아는 영화시장 개방과 제작자율화로 충무로시대가 막을 내리기 전인 1983년 <다른시간 다른 장소> (조명화 감독)로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영화배우 부모(김진규, 김보애)의 후광을 업고 등장했으나 타고난 연기자의 기질과 매력적인 미모로 충무로시대의 말미(末尾)에 인기스타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마지막 충무로 세대다. 지금 막 인생의 중간 지점을 넘어서고 있는 45살 김진아의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겨울의 햇빛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하이야트 호텔 식당 정원에서였다.



2000년 10월 이 호텔 홀에서 올린 결혼식에 참석한 기억이 난다. 벌써 7년이 됐다. 그동안 변한 것도 많을 것 같다.
지난 10월 7일이 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잤던 호텔의 그때 그 방에 다시 들어가 이틀간 지냈다. 물론 아들 메튜(Matthew)를 곁에 두고 결혼기념일 이벤트도 가졌다. 남편은 꽃과 촛불과 샴페인을 마련하고 나에게 특별히 케시미어 코트를 선물했다. 결혼하던 날 밤은 남편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이날 밤은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우리들의 입에서는 노래가 나왔다.


부군의 아내에 대한 배려가 놀랍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도 있어야하지만 세심한 정성과 사랑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매년 기념일이면 남편이 무슨 계획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작년에는 제주도를 다녀왔고 그 전에는 하와이에 갔었다. 서양 남자들은 가족들의 각종 기념일에 대한 이벤트를 잘 챙겨 주고 자신도 함께 즐긴다. 우리 사회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젊은 부부들에게는 재미있는 기념이벤트들이 성행하고 있다.



메튜군은 어떻게 입양했나? 그동안 아기는 왜 갖지 않은 건가?

결혼 후 아기를 갖기 위해 시험관 아기까지 생각하며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유산도 경험했는데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일찍 아기를 낳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아기를 가지려 한 것이 무리였다.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메튜를 만났다. 아기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남편의 눈빛과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남편도 적극 동의했다. 지금 나의 일과 중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문이 입양기관의 자원봉사 활동이다. 2005년부터 홀트아동복지회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고 또 성가정입양단체의 일도 돕고 있다. 이 세상의 미래는 아기들의 것이고 아기들을 위한 봉사활동만큼 더 값진 일이 없다.


해외에서 입양한 것은 어떤 동기가 있어서인가?

아니다. 단순히 아기를 보는 순간의 느낌이 선택의 동기였다고 본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입양 신청자가 늘어나 과거만큼 해외로 입양되는 아기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김진규)가 돌아가신지도 1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생전에 인터뷰도 많이 했다. 만날 때마다 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자식이 많지만 그 중에도 둘째 딸 진아에 대한 정은 유별났었다.

그랬다.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무엇부터 어떻게 무엇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내 가슴에 한가득 아빠가 들어와 계신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다. 어린 딸을 두고 엄마와 헤어져 집을 나간 것이 그분에게도 가장 큰 슬픔이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후에도 아빠는 나를 “아가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이듯이 불렀다. 늘 애처로운 딸이었다.




나는 엄마를 많이 괴롭혔지만 어쩌다 만나는 아빠 앞에서는 양처럼 온순했다. 여고시절 딸이 보고 싶어서 학교로 몰래 찾아와 손을 꼭 잡아주고 가셨는데 미남배우가 왔다고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내 성격은 자존심 강하고 고집이 센 아빠를 닮았다. 얼굴은 코만 아빠를 닮고 윤곽이나 눈매 등 분위기는 엄마를 닮은 편이다.

<벙어리 삼룡> <잉여인간> <삼포가는 길> 등 영화사에 각인된 아버지의 작품이 2백여 편 넘는다.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계실 때 극진하게 간병을 한 딸의 효행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는 당신이 늘 영생불멸의 인간인줄 알고 사셨다.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생명의 선고를 받으셔도 결코 죽는다는 생각을 안 하셨다. 두 달간 침묵에 빠지셨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가, 수고 많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평소에도 “아가, 고맙다” “아가, 미안하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셔서 그 한마디가 유언이 될 줄 몰랐다.


호스피스(hospice) 봉사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버지 간병과 관련된 것인가?
아빠를 보내드린 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의 병상 이웃에서 신음하던 환자들을 외면하고 나올 수 없었다. 아빠와 헤어진 슬픔을 달래는 길도 그분들에게 나의 못다한 정성을 바치는 걸로 생각이 들어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해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갔다. 몸을 가누기 힘든 환자들의 이를 닦아주고 목욕을 시켜주며 말벗이 되어 주고 수족이 되어드리는 일이다. 언젠가는 아주 엄격하게 보이는 할아버지 한분이 나의 목욕도우미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젊은 여자가 남자를 발가벗겨 목욕을 시킨다니 그게 될법한 소리냐고. 설득을 해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드리자, 찾아온 아들에게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알고 보니 아드님은 나를 잘 알고 있는 언론인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목욕하신 후 3일 만에 떠나셨다.




데뷔 1년만인 1984년 김진아가 출연한 이미례감독의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은 발랄하고 도발적이며 이기적이기도 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작품이 한층 화제가 된 것은 김진아가 어머니(김보애)와 작품에서도 나란히 모녀관계로 출연했다는 점이다.

미모와 함께 윤기를 발하는 밀빛 피부의 신세대 스타 김진아는 가는 곳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시선을 끌어 잡았다. 그로부터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 까지 14편의 작품을 찍었다. 그 후의 작품은 TV드라마와 뮤지컬이다.

젊은 시절 그녀는 한창 바쁜 일정 속에서도 소리 없이 훌쩍 미국으로 사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이제 그 때의 이야기를 터놓고 들을 때가 온 것 같다.


한창 인기가 있을 때 곧잘 모습을 감추곤 했다. 젊은 시절에 있었던 사연들이 궁금하다.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은 바로 무서운 게 없는 아이와 전쟁을 벌이는 엄마의 이야기였다. 드라마 내용과는 다르지만 실제 모녀인 나와 엄마의 관계도 평온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나에게 많았다. 아빠가 곁에 없었으므로 엄마가 대신 규율을 잡았지만 반항적인 면과 매사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자제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자존심에 손상을 입거나 내 마음 먹은대로 안되면 반항도 하게 된다. 미국은 나의 도피처였다. 그래서 간혹 엄마 속을 썩이기도 했고 심한 우울증이 오면 자살도 많이 생각했다. 젊은 날은 그렇게 희비의 극과 극 사이를 오가며 지나갔다.


성격이나 마음에 변화와 안정이 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아빠가 떠나시고 한동안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성격이 순화되고 침착해졌다. 삶의 한 켠에 죽음이 쫓아다닌다는 생각을 하면 남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도 생긴다. 내 인생에서 아주 황폐하고 절박할 때 남편을 만났다. 결혼하면서 모든 것이 안정권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지금의 마음가짐이 스스로 생각해도 흐뭇하다. 특히 여배우는 생활이나 생각에서 변화가 심하다. 인기란 것이 추락의 불씨를 함께 달고 다니는 것인데 여자는 꽃처럼 피었다가 시드는 시기를 잘 극복해야 한다.


우연한 기회에 배우가 된 걸로 알고 있다. 원래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는가?

정지영 감독의 영화 <여자는 안개처럼 속삭인다>의 시사회에 갔다가 다른 감독의 눈에 띄어 배우가 됐다. 부모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출연 요청을 받았으니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배우가 된 셈이다. 처음에는 하던 음악 공부도 있고 용기도 나지 않아 거부를 했으나 엄마가 딱 한편만 나가보라고 권해 시작했다. 사실 뮤지컬 배우가 내 몸에 맞는 연기 같아 한 때 애정을 가졌다. 1997년 뮤지컬 <겨울 나그네>에 출연하면서 발성연습을 잘못해 목소리가 변했지만 기회가 오면 뮤지컬 무대에 오르고 싶다. 얼마 전 송승환 뮤지컬 제작자로부터 <맘마미아> 출연을 제의 받았지만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길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요즘 일과는?
남편과 유치원 가는 아들의 도시락 준비로 하루가 시작된다. 남편은 식당 음식보다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을 좋아한다. 샐러드와 샌드위치 류인데 한식도 좋아한다. 아들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낮 시간은 핼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그 시간이 끝나면 아들을 데려오고 이어서 미팅이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하루일과다. 그리고 틈틈이 닥종이 공예와 케이크 만드는 취미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만나기 전 어머니(김보애)와 안부 전화를 나누었다. 인터뷰 대상으로 아들 성준도 있다는 말을 했다. 동생 리나도 한때 연예계로 들어설 것 같았는데 말그대로 연예인 가족이 된 것같다.

성준(본명 김진근)이는 TV 드라마 <불량주부> <제5공화국> <주홍글씨> 등에 출연해 제법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의 꿈이 성준이에게 옮겨진 것 같다. 아버지를 닮은 좋은 여기자가 되기를 나도 바라고 있다. 다른 것 보다 아버지같이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마음에 든다.


아직도 은퇴한 연예인으로 볼 수 없다. 연기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스스로도 연예인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밤새도록 촬영을 하고 하품을 해가며 스태프들과 새벽에 먹던 설렁탕이나 해장국 맛이 그립다. 어딜 가도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직 영화배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번 배우는 평생 배우라고도 한다.


소망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리한 욕심을 갖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도 물처럼 흘러가고 우리 인생도 그 시간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간다. 무책임하게 일을 벌이거나 감당 못할 욕심을 부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 시간이 허락하면 우리 귀여운 아들의 고향 같은 입양기관의 일을 많이 돕고 싶다.


김진아는 티없이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을 닮아가고 있었다. 아주 선량한 아내와 엄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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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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