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영화 준비하는 <발바리의 추억>의 만화가 강철수
다큐 영화 준비하는 <발바리의 추억>의 만화가 강철수
  • 김두호
  • 승인 200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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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생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침입한 왜군일 수도”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강철수 화백(62)은 1980년대 성인만화로 청춘문화의 한복판에 인기깃발을 꽂았던 스타 만화가였다. 한때 최고 대접을 받던 방송작가이며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요즘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을 준비 중이다. 구상중인 그의 영화는 동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밥을 먹고 사랑을 먹고 사는 인간 이야기 쪽이다.


진주중학교 3학년 무렵인 1960년대부터 반세기에 걸쳐 만화작가 활동을 해온 강 화백은 이순(耳順)에 이르러 인생을 조금 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림 그리고 글 짓는 작품생활에 혼이 빠져 살다가 유유자적(悠悠自適)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의 깊이도 가늠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나 인생살이의 이치도 달라져 있음을 자각하고 산다.


그는 <인터뷰365>와 만남에서 난생 처음으로 고백하는 추억담도 진솔하게 터놓았다. 기자는 신문 가판시장에서만 1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던 스포츠서울에 그의 만화 <발바리의 추억>이 연재물로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 모으던 시절부터 인연을 나누어 왔다. 1980년대 시위와 장발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대변하던 시절에 나타난 <발바리의 추억>의 주인공 달호는 투기꾼 졸부 가정의 백수 젊은이였다. 밥 먹고 사랑하는 일이 과업이었던 바람둥이 주인공의 삶은 그 시대 청춘문화의 심벌로 사랑을 받았다.


강 화백은 <발바리의 추억>에 앞서 <사랑의 낙서> <팔불출> 등으로 이미 성인극화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삼국지> <수호지>의 고우영, <애사당 홍도> <바리데기>의 방학기, <고인돌>의 박수동 화백들과 함께 어른이 보는 만화시대를 이끌었다. 이제 신문잡지 등 활자매체시대도 활기를 잃었지만 성인 만화의 전성기도 추억에 잠겨버렸다. 강 화백도 한동안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살다가 최근에 뮤지컬과 영화 쪽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얼마전 한국시나리오협회 이사직을 맡았다. 30여년 적을 두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일본을 자주 왕래한다. 일본인 지인과 내 친구 등 그곳에 친지도 많고 또 몇가지 사업도 추진했다.


어떤 사업인가?

뮤지컬과 일본의 에로물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의 포르노 형태의 영화들이 동물적인 욕구표현에만 치우쳐 격조를 달리한 작품세계를 열어보고 싶었다. 유머가 있고 아무리 성애영화라 해도 다양한 인간적인 감동과 체취도 느끼게 해야 한다.


사실 일본의 에로물은 저질 포르노로 악명이 높다. 그래도 영화 제작은 고비용 사업이 아닌가?

제작비의 규모가 크지 않다. 인기배우는 다르겠지만 신인배우는 출연료도 우리 돈 2,3백만 원 정도면 가능한 곳이다.




우리 만화 창작분야는 오래전부터 조용해졌다. 만화 작업은?

연재를 한다 해도 생활비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다. 만화 고료는 10년 전 원고료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스포츠서울에 <발발이의 추억>을 연재할 때 당신의 고료는 편집국장 월급보다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월 수천만 원의 고료를 받는다는 소문도 났던 시절이다. 1988년부터 시작해 3년간 실제는 월 3백만 원을 받았지만 그래도 당시로는 최고대우였고 거액이었다.


<발바이의 추억>을 추억하자면 정말 지금은 상상이 미치지 않을 정도의 폭발적인 독자반응이 따랐다. 연극과 영화로도 제작되어 바람을 몰고 다녔지 않는가? 돌이켜 보면 당시 가장 큰 성공 이유가 어디에 있었다고 보는가?

주인공 달호는 그 시대가 낳은 인물이다. 연애하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생물같이 움직이는 시대 변화를 배경으로 드라마의 요소를 풍자적으로 이끌어낸 덕분이다. 연인끼리도 손잡고 걷기가 쑥스럽던 시절에 연애의 선각자 같은 달호의 자유분방한 연애행각에 선망과 흥미의 눈길이 쏠렸다.

그러나 1974년 주간여성지에 <사랑의 낙서>,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주간경향에 <팔불출>을 연재할 무렵 이미 성인극화 시대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모두 젊은 시절 나와 운명을 함께한 소중한 것들이다. 주간지나 신문의 연재만화도 결국 패션계처럼 대중문화의 유행을 만들어 내는 민감한 상업성 장르로 볼 수 있다. 나는 인생의 가치를 추억을 얼마나 슬기롭게 정리하느냐에 둘 때가 있다. 하지만 추억에 빠져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을 경계한다.


전성기 때는 만화에만 머물지 않고 TV드라마 극본, 연극이나 영화 시나리오와 연출작업 등 작품 활동이 다양하고 다채로웠던 것 같다.

만화든 영화든 소설이든, 장르가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르다고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잘 웃기든지, 잘 울리든가 하는 작업이다. 결국 핵심은 아이디어다. 어떤 이야기인가로 승부를 보는 것이므로 창작세계는 서로 맥이 통한다는 생각이다.


만화를 시작한 초기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던 경남 산청의 첩첩산골 사람이다. 산청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고향을 물어오면 중학교를 다닌 진주를 팔 때가 많다.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으로 선비셨지만 아버지는 공부하기 싫어서 할아버지의 기대 밖으로 도망을 치셨고 나는 은행원이나 면서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진주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첫 작품 <명탐정> 만화를 발표한 것이 그때인가?

15살 때였다. 탐정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그린 만화였다. 진주에서 졸업식도 갖지 않고 서울로 왔지만 출판사의 배려로 서라벌 고교에 진학했고 고교 2학년 때 출판사 사장이 나를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색시들이 시중을 드는 요정에 데려가 대접할 정도였다. 스무살 때부터는 이른바 인기작가로 유명세를 탔다.

같은 시기의 수많은 매체에서 ‘강철수 만화’를 다투어 게재한 때가 있었다. 그 무렵 동시에 연재한 매체수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발행하는 일간 주간 월간잡지까지 30개 매체쯤 됐다. 어느 주간지는 최고액의 고료를 내걸어 죽기살기로 그려댔다. 3공에서 5공으로 넘어갈 무렵 경직된 사회분위기를 풀어주는 소재로 만화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당신의 이름은 한때 방송작가로도 분주하게 오르내렸지 않는가?

이수만 왕영은 명현숙 씨 등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 꽁트를 기고하기도 하고 어린이 TV프로 <호랑이 선생>은 4백회 넘게 썼다. 그 뒤 MBC-TV의 <테마게임>, 이어서 <베스트셀러극장>이 시청율 1위를 기록하는 바람에 몇 해 동안 만화를 그려가며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렇게 내 젊은 시간은 전력을 투구해 닥치는 대로 일과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남는 것이 없는 소모전이었다. 어느 분야든 걸작욕심을 가지고 일을 했다면 남을 만한 작품도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마음이 약해 들어오는 청탁들을 거절 못하고 시작하다가 또 고료문제로 헤어지기도 하고... 발목이 빠져 허우적거리며 지나온 진흙탕길 같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후회는 않는다.


일본어를 우리말처럼 잘한다는데 언제 익힌 것인가?

어릴 때는 교과서를 선배나 형이 사용하던 헌책을 물려받는다. 그런데 일본어 교육을 받은 삼촌이 어느 날 일본어 새 교과서를 가져와 나에게 선물했다. 어머니는 왜놈들 책을 왜 보느냐고 하셨지만 삼촌을 통해 일본어를 접하면서 일찍 말문이 열렸다. 삼촌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온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만화며 가전제품 등 일본 물건들이 밀려들어 왔으니 그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됐다.


일본을 자주 찾는 것도 일본어에 불편함이 없어서인가?

만화가는 상상 속에서 산다. 나는 간혹 전생에 일본인과 어떤 연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가령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 침입한 왜군이 그곳에서 뿌린 후손일 수도 있다든가.. 어떻든 나는 틈만 나면 일본으로 건너가 산간벽지에서 섬까지 전국을 여행했다. 안 가 본 곳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지도를 펴놓고 체크해보니 안 가 본 곳이 5분의 4가 넘었다. 섬만 해도 4천여 개라지만 100여개도 못가 봤다. 대마도 정도는 대여섯번 다녀왔다.


일본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딘가?

모리오카 북쪽 태평양 연안의 작은 항구 게센에는 매일 눈이 내린다. 그곳으로 가는 열차도 손잡이까지 수동 조작을 하는 구식이다. 의사 친구를 찾아 갔던 그곳이 인상적이었다. 좀 오래됐지만 일본 본토 최북단의 산리쿠라는 해안마을을 갔는데 주민들이 2차대전 때 미군을 본 뒤로 외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며 구경거리가 된 적이 있다.

나는 산골이나 그런 한적한 어촌 같은 곳을 좋아한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홋카이도 아바시리를 가보고 싶었는데 그곳엔 아직 못갔다. 지붕까지 눈이 쌓이는 날 하얀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인이 흉악범을 면회 온다는 교도소가 있는 곳이다. 언젠가는 여행중 목을 축이려고 어느 산골의 선술집에 들렸더니 주모가 75살 노인이었다.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순간들이 모두 내게는 창작의 소재가 된다.


로맨틱한 순간들도 많이 체험했을 것 같다.

내 주변사람들도 잘 모르는 고백인데 내게는 아주 오랜 일본 여자 친구도 있다. 1992년 우연히 잘못 걸린 전화로 인연이 되어 친구가 된 후 지금까지 순수하고 변함없는 정을 나누고 있다. 물론 그녀도 아이 셋에 의사인 남편이 있는 사람이다. 어느 해 그녀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오카야마라는 도시에 사는 친정집 부모 앞에 당당하게 나를 소개해 준 일이다. 그로부터 그의 부모는 사위보다 딸의 남자 친구인 나를 더 좋아해 일본에 가면 그 집에 초대받아 머물기도 했고 내가 그분들을 서울로 초청하기도 했다. 만나고 헤어질 때 눈물을 보일 정도로 우린 정말 정이 들었다.

일본은 사위들이 대체로 처갓집을 잊고 사는데 내가 사위보다 더 사랑을 받은 셈이다. 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자신의 남편과 서울로 여행 왔을 때는 나를 불러내 남편을 소개해 준 일이다. 그들은 동경 밑에 있는 시즈오카에 산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깊고 아름다운 우정관계이면서 한편은 연인처럼 가깝다.


자신의 실화를 그대로 영화를 만들어도 되겠다.

이 나이가 되니 이제 조금 인생을 알 것 같다. 사물을 보는 눈이나 세상살이의 이치도 과거와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다시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즘 다큐멘터리에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서 그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대작으로 일컫는 영화의 10분의 1정도면 얼마든지 좋은 영화 한편을 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도 가장 큰 밑천은 아이디어다.




강철수 화백은 언제나 가방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다닌다. 10년 전, 20년 전에도 신문사를 출입하는 그의 어깨에는 가방이 걸려 있었다. 이를테면 아이디어 쪽지들이 든 가방이다. 그 는 아마도 그 가방 안에서 웃기든가, 울리게 만드는 아이디어 하나를 끄집어내 머잖아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한 다큐 영화 한편의 연출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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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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