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제주도에 사랑과 꿈을 심는 탤런트 고두심
고향 제주도에 사랑과 꿈을 심는 탤런트 고두심
  • 김두호
  • 승인 200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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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으로 연기운명 바뀔 뻔했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큰 얼굴의 연기인 고두심은 고향 제주도의 영원한 홍보대사다. 홍보에 머물지 않고 장학사업, 애향사업 등에 쉬지 않고 참여하고 앞장선다. 모교인 제주여고에 두심장학회를 창립했던 그는 지금 ‘김만덕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로 꾸준히 새로운 행사를 준비하며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김만덕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구해낸 제주도 의녀(義女)로 조선 정조 때의 인물이다. 그와 연관된 기념사업은 제주도민들의 특별한 긍지와 기대가 걸려 있다.


‘정갈하고 단아한 여인상’의 배역이라면 고두심부터 떠오른다. 드라마 속의 모습이지만 며느리역이든 어머니역이든 작은 몸 안에서 나오는 언행이 모두 흐트러짐이 없이 기품 있고 반듯해 보이는 이미지 탓이다.


1974년 MBC 공채 5기생으로 뽑혀 연기의 길로 들어선지 올해로 35년째, 연기인 고두심의 지나온 길은 한번 받기도 어려운 3개 방송사 연말 연기대상을 다섯 차례나 차지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길이었다. 그의 젊은 날은 영화에서도 빛을 발했다. 지금도 신작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 출연중이다.


고두심은 특별한 데가 많은 연기인이다. 2003년 10월 연기생활 30주년을 기념하며 7박8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걸어서 일주한 애향운동은 아름다운 정신을 실천에 옮긴 용기 있는 사례였다. 204km의 장정이었다. 뒤에 올레길 걷기 관광트레킹코스가 등장하는 길을 터 주었으니 고두심은 자신의 이름 ‘高斗心’ 처럼 ‘높고 큰 마음을 가진 여자’로 느껴진다.



역사의 실존 인물이라고 하지만 김만덕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당신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내력을 듣고 싶다.

김만덕 어른은 200년 전 조선 정조 때의 인물이다. 문헌에는 몇 줄 정도의 기록밖에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많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5세 때 기녀로 의탁되었으나 스스로 관청에 기녀의 적을 지워달라는 요구를 관철시킨 후 바닷가에서 객주집을 차려 어깨 너머로 상인들의 상술을 익혀 거부가 된 분이다. 그는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할 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 사들인 쌀로 3년간 죽을 써서 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나중에 제주목사가 그의 선행을 조정에 알려 정조가 치하하려고 그녀를 불렀다고 한다. 벼슬이 없으면 왕을 알현 못해 의녀반수라는 직함을 받아 왕을 만났고, 소원을 묻는 왕에게 금강산 구경을 원해 그곳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만덕이라는 이름은 만인에게 공덕을 편 한마디로 전설적인 사랑의 어머니상(像)이다.


기념사업회는 언제 발족했는가?

5년 전이다. 이 사업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초를 닦은 분이 동양자수 인간문화재인 한상수 어른이다. 팔순이 넘으셨다. 공동대표로 참여한 것이 그 분의 간곡한 요청이었지만 뜻이 있고 보람도 크다. 학술서적을 편찬하고 묘를 성역화 하는 일, 신사임당처럼 화폐의 인물로 수록하는 일, 드라마나 영화로 옮기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무엇보다 그 분을 알리는 사업이 더 소중한 것 같다.


언젠가 걸어서 제주도를 일주하는 모습을 뉴스로 접한 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의 행사였는가?

2003년 연기생활 30년 기념으로 섬을 걸어서 한 바퀴 돌았다. 7박8일 걸렸고 204km의 거리였다. 동기는 단순했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사랑하는 고향, 그 고향을 왜 사랑하는지 발로 걸어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 때 후원 기금으로 1억7백만 원이 들어와 전액을 제주도예술인회관 건립 기금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김만덕 기념사업회에도 많은 기금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CF 출연료 1억 원과 연극으로 받은 2천만 원을 내놓기도 했지만 나의 힘은 일부분이다. 서울 강남에서 정형외과병원을 운영하는 양원찬 박사는 숫제 자신의 사무실을 사업회 사무실로 활용하며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또 제주특별자치도의 초ㆍ중ㆍ고생을 통해 10만 가정 참여운동을 폈는데 20만 가정이 참여했다. 기금으로 1천석 모으기를 목표로 세웠는데 3천석이 쌓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 오는 10월 17일 1만석 모금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김만덕 나눔쌀 만석쌓기’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10월 17일은 유엔이 정한 빈곤퇴치의 날이다. 김만덕 정신을 되살리는 전국적인 행사로 떠올리는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모교인 제주여고에 거액의 장학금도 기부했다는데.

자꾸 돈 얘기만 하니 부끄럽다. 제주여고 시절 나는 무용에 빠져 공부 잘하는 장학생이 가장 부러웠다. 가난하고 공부 잘하는 후배를 돕고 싶어서 2억 원을 기금으로 두심장학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제 돈 얘기 그만하고 당신의 인생과 연기역정(歷程)에 쌓인 얘기를 듣고 싶다. 먼저 당신을 예쁘게 낳으시고 키워주신 가족 얘기, 부모님 이야기부터 들려달라.

아버지는 20대에 일본 사이판을 거쳐 괌섬 부근에 있는 얍(Yap)이라는 작은 섬에 이주해 사셨다. 그곳에서 10년간 살며 그곳 토산품을 일본에 내다팔고 생활필수품을 수입하는 교역으로 돈을 버셨다. 10년간 살며 그곳에서 11살 어린 고향(제주도) 아가씨를 데려가 결혼하셨다. 어머니는 아주 예쁘게 생겨 배를 타고 가는 도중 모르는 사람들이 아버지가 납치해서 데려가는 것으로 오해를 살 정도였다.

3남 4녀 7남매 중 내가 다섯 번째인데 큰오빠와 큰언니가 얍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혜로운 여자여서 아버지가 번 돈을 베개로 만들어 가져오셨다는데 그 돈은 서울의 명동 같은 제주시의 칠성동을 다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가 농부의 집안이니 땅을 사야한다며 한라산 밑에 큰 땅을 장만하고 제주 남문동(일명 두묵골로 지금의 중앙로)에 기와집 3채를 지어 오빠가족과 함께 43년을 살았다. 제주도 구경 와서 돈이 떨어진 학생들이 우리집 식객으로 찾아올 정도로 여유있게 살았다. 사람들은 남쪽에서 살다 왔다고 우리 집을 남양집으로 불렀다.


어린 시절은 부러움 없이 산 것 같다.

4.3사태 때 우리 땅이 쑥대밭이 되는 수난도 있었다. 나는 제주여중 1학년 때부터 여고 3학년 때까지 제주도의 민속문화를 지켜오신 송근우 선생 밑에서 고전무용을 배웠다. 우리 팀이 전국 경연에 나가 대통령상 국무총리상을 받을 정도로 잘했다. 덕분에 무용가 김백봉 교수가 있는 경희대 무용과의 특채생으로 뽑혔지만 가족들이 모두 무용을 대학까지 배우게 할 수 없다고 반대해 포기했다. 무용을 춤꾼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연기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어릴 때부터 막연하지만 배우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았다. 왜 어떤 동기에서 비롯됐는지 기억할 수 없으나 중학시절부터 배우가 꿈이었다. 서울에 유학한 오빠의 뒷바라지를 위해 상경하면서 모든 운명이 새로 시작됐다.


그 무렵 탤런트 공채에 응시한 건가?

아니다. 오빠가 취업을 권유하면서 세종문화회관 부근에 있는 타자학원을 추천했다. 영문타자를 배운 뒤 천성물산이라는 건실한 기업체의 공채에 합격해 회사원 생활을 먼저 시작했다. 주유기의 펌프를 공급하는 무역회사인데 비서겸 재무를 담당하는 사원으로 4년간 말없이 일했다. 그러다가 TV를 보고 MBC 탤런트 공모에 지원했다.


예나 지금이나 좁은 문이었을 것 같다.

5기생 42명을 뽑는데 내 수험번호가 1513번이다. 가족 몰래 응시를 해 1차를 거쳐 2차는 실기를 겸한 카메라테스트, 3차는 당시 이환의 사장까지 면접심사를 보는 관문을 통과했다. 사장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보고 합격을 예감했는데, 나중에 들었지만 공채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던 모양이다.




1974년 MBC 드라마 <갈대>가 데뷔작품으로 이력에 올라있다. 쉽게 연기자로 인정을 받은 것인가?

천만에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연기자가 되고 수천대 일의 경쟁에서 뽑혔지만 ‘동네아낙 A’ ‘호스티스 F’ 따위의 지나가는 장면에 잠깐 귀나 보여주는 역이 고작이었고 분장실에서 선배들 옷 털어주고 심부름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참고 견디는 시간이 지루하고 길었겠다.

실망감에서 하루하루를 참다가 다니던 회사로 돌아갔다.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가 좋아 2년을 잊고 살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1등으로 들어온 사람이 왜 포기하느냐며 새 주말연속극에 출연하라는 통지였다. 가정부 역이었지만 홍세미 김성옥 씨 등 스타들과 얼굴이 마주치면서 흥분이 되고 연기 의욕이 되살아나더라. 그러나 대본을 받아들고 초라한 배역이 서러워서 화장실에 들어가 눈이 충혈 되도록 울었다.


그로부터 연기자로는 유례없이 세 방송사에서 다섯 차례나 연기대상을 받는 화려한 연기인의 길을 걸어왔다. <새아씨> <사랑의 굴레> <전원일기> <춤추는 가얏고> <마당 깊은 집> <코리아게이트> <박봉숙변호사> <목욕탕집 남자들> <임꺽정> <엄마의 깃발> <내가 사는 이유> <방울이> <사랑해 사랑해> <미우나 고우나> <덕이> <엄마야 누나야> <신화> <여우와 솜사탕> <인어아가씨> <야인시대> <꽃보다 아름다워> <한강수타령> 등등 고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작이 수없이 많다. 어떤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고 자신의 연기에도 만족감을 느끼는가?

하나하나 사연이 스며 있고 내 나름으로 정을 남긴 작품들이다. 그 가운데 역시 22년간 세월 모르고 출연한 <전원일기>, 의처증 남자의 아내역인 <사랑의 굴레>, 누구든지 탐내는 역인 <춤추는 가얏고> 등 열거하려면 길어진다.


영화도 1979년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를 시작으로 <깃발없는 기수> <두여인> <질투> <신자유부인> <청춘> <굳세어라 금순아> <엄마> 등 적잖은 편수를 남겼고 <두여인>으로 아태영화제 여우조연상도 받아냈다. 출연 영화중에는 <이혼하지 않는 여자> 같은 진한 애정영화도 기억난다.

아, 연하의 남자(박상민 연기)와 나눈 러브스토리였다. 그런데 1980년대 초 정인엽 감독이 <애마부인>을 준비하며 나를 타이틀롤로 캐스팅하려고 했다. 사실 그 무렵 내 앞가슴의 볼륨이 특별했는데 그 감독이 제대로 발견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거절했다. 아마도 그 영화에 출연했다면 내 연기 운명이나 배우로써의 이미지, 연기 성향도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하하.


그랬다면 그 후 쏟아져 나온 애정물의 대표적인 에로배우로 이름을 떨쳤을 것도 같다. 많은 작품에서 남자 파트너를 만났는데 비교적 연기 호흡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남자 연기인은 누구인가?

이정길 씨 같은 분이 편하게 느껴진다. 축축한 그의 눈빛은 언제나 정감이 느껴진다. 왠지 따뜻하고 함께 연기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싫어할 질문이지만 묻고 싶다. 1976년에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22년만인 1998년에 사업가인 부군과 결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동안 재혼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는지?

인터뷰도 잘 안하는 편인 내가 설명을 하기 귀찮아하는 질문이다. 나의 독신생활은 매우 편안하고 외롭지도 않고 불편함이 없다. 언젠가 두 아이를 뒷자리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큰아이인 딸과 아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딸이 동생에게 엄마의 장래문제를 이해 깊게 말하는 것을 듣고 감동 같은 것을 받았다. 이제 딸은 출가했고 아들도 다 컸다. 굳이 재혼하는 것보다 친구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독신이어서 유혹도 많았을 것 같다.

그 점이 오해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선입견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쉽게 접근을 해오지 않는다. 며칠 전 내 생일(5월 22일) 때 미국에 있는 아이들이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아이들도 엄마가 외롭고 슬픈 표정을 보이면 안된다며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두 자녀를 소개해 달라.

딸(김영 30)은 2007년에 미국에 유학생으로 가서 사회활동을 시작한 후 재미동포와 결혼했고, 아들(김정환 24)은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다.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했는데 내가 설득해 2학년 때 전공을 바꾸었다.


왜 엄마의 뒤를 잇는 것이 싫은가?

엄마가 살아온 길이 그렇게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니란 것을 얘기했다. 점점 경쟁도 치열하고. 배우가 되어봤자 평생 누구 아들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교수나 외교관 등 다른 전문직을 권했다. 이번 여름방학 때 귀국하면 상의할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무슨 내용인지 겁이 난다.


중국의 인민배우 팡창조어와 친밀한 우정관계가 간혹 화제에 오른다. 어떻게 깊은 인연이 되었는가?

1988년 중국과 수교가 안 이루어졌던 때에 일본 NHK의 초청으로 라는 시사프로그램에 공동 출연한 일이 있다. 그 때 나는 한복에 스카프를 두른 옷차림으로 나갔는데 내 옷차림에 감탄하며 틈틈이 손으로 어루만지곤 했다. 나는 강렬한 호감을 잊지 못해 그의 방을 찾아가 내가 가져간 샤넬 스카프를 선물했다. 그는 답례로 빨간 스웨터를 주었다. 잠시 머물렀지만 벚꽃이 피는 계절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정취를 함께 즐기며 정을 나누었다. 우린 말이 안 통하지만 눈빛으로 우정을 나눈 것이다.

그후 <전원일기>에 나가면 그녀가 준 빨간 스웨터를 굳세게 입었다. 혹시 그녀가 봐 줄지 모른다는 기대도 했다. 그녀도 그곳에서 만나는 한국인 사업가 편에 안부를 전해오며 나를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20년 만에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이다. 우린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반갑게 회포를 풀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물심양면 준비를 했고 그녀의 저택에서 내가 예쁘다고 하는 것은 모두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아주 극진한 접대를 받았다. 돌아와 그녀가 좋아하는 김치와 깻잎반찬을 보내주기도 했다.




꿈이 있다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에 옛날 집 같은 작은 오두막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 내 고향친구 은희(가수)랑 흰머리 휘날리며 돌담 정겨운 고향에 살자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은희는 바다를 향해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띄우고. 아마도 그럴 때가 오면 젊은 친구들이 지나다가 저 집에 옛날 배우 고두심이 산다고 할 것 같다.


참, 고향의 부모님은?

아버지는 14년 전, 어머니는 10년 전에 떠나셨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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