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차(茶) 녹색혁명 주도한 귀농민 백종우
보성차(茶) 녹색혁명 주도한 귀농민 백종우
  • 김두호
  • 승인 200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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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차(茶)밭 일궈 한 해 2억 소득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전남 보성이라면 초록의 차(茶)밭으로 명승지이며 명산지가 된 곳이다. 보성군에서도 회천면에 차밭이 가장 많다. 또 회천면에서 차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사람이 보성차 생산협의회 회천면회장 백종우 씨(48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368)다.


보성차는 일제 강점기 전부터 재배되긴 했으나 오랫동안 생산 및 소비 물량이 적어 소규모 농가 부업거리에 불과했다. 보성차가 우리나라 차생산의 본고장으로 크게 떠오르고 녹차의 대표상품으로 주가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였다. 바로 30대 청년 백종우 씨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1998년 귀농을 하면서 그의 차밭부터 기업형 경작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0여년 만에 계곡과 산허리를 휘감은 녹색의 보성 차밭을 찾아 관광인파가 몰려들기까지 그의 개척정신이 촉매가 됐다. 보성군 녹차사업단의 담당자에게 ‘보성 차밭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서슴없이 추천해준 인물이다. 한옥으로 큼직하게 두 채를 지어 놓은 자택 앞의 녹차 식품체험장을 찾았을 때 그는 “기사를 쓸 만한 유명한 사람이 못된다”며 사양했지만 손수 차 한 잔을 대접하며 시작한 삶의 이야기는 농촌생활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귀농인의 남다른 성공 사례였다.



녹차사업단의 추천을 받았다. 왜 인터뷰를 원치 않는가?

<인터뷰365>는 유명한 사람들만 한다는데 나는 그만한 인물이 아니다.


유명한 분들만 인터뷰하는 것이 아니다. 귀감이 되고 감동이 있는 삶을 사는 분이면 어떤 직종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인터뷰로 소개하는 매체다.

멀리서 오셨으니 차나 한잔 하자. 마침 귀한 손님이 올 때 대접하는 청명차가 있다.


청명차는 어떤 차인가?

차는 절기에 맞추어 새순을 채취하고 차 이름이 붙는다. 4월 20일께 이전에 딴 것을 우전차로 부르고 곡우(穀雨)가 되는 20일께 딴 차는 곡우차, 그 다음부터 세작, 중자, 대자, 엽차로 호칭한다. 청명(淸明)은 4월 5일께인데 그때는 채취 시기가 아니지만 특별히 조숙한 새순이 있어서 채취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보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보성녹차대축제’ 현수막을 보았다. 5월 8일 개막하는 녹차축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올해 35회로 꽤 오래된 행사다. 보성다향추진위원회라는 주민자치기구에서 주관하고 있다. 녹차 체취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5월에 맞추어 녹차밭의 추억 캠프를 만들고 차예절과 차음식 경연대회 등을 개최한다.


5월이 보성 차밭이 가장 싱그러운 절정기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뽀얀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면 차밭에 윤기가 나고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녹차 체험장 건물이 화려하게 보인다. 집안에 여러 개 걸어 둔 가마솥은 어디에 쓰이는가?

약간 물기있는 음식을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는 것을 ‘덖는다’고 말한다. 콩을 볶는데는 섭씨 120도의 열을 가하면 되지만 차는 섭씨 250∼300도의 열을 가해야 한다. 솥에 넣고 찻잎을 덖는 작업에 사용한다. 숨을 죽이는 작업인데 타지 않도록 덖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두두둑 소리를 들으며 2초 정도의 간격으로 뒤집어 가며 덖는다.


근래 들어 차를 마시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과연 녹차는 마셔서 어떤 효능이 있는가?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몸 안의 지방분을 분해하고 카페인을 중화 억제하는 카테인 성분이 함유돼 있다. 커피는 많이 마시면 수면에 문제가 따르지만 녹차는 그런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커피는 열을 올려주고 녹차는 열을 내려준다고 해서 고혈압에도 좋은 식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성녹차의 유래를 알고 싶다.

보성차는 일본이 원산지인 야부기다종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씨를 가져와 재배를 시작한 것인데 보성이 토질과 기후 등에서 일본보다 오히려 더 적합한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품종은 병충해와 냉에 약하다. 2∼3년 안에 보성차 연구소가 그 점을 보완한 새 품종을 선보일 계획에 있어서 앞으로 우리나라에 맞는 새로운 차생산 산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도 씨로 재배되는가?

아니다. 씨를 뿌려서 나오는 싹은 잡종이 되고 성장해도 기계작업이 어렵다. 삽목으로 재배해야 성장균형이 유지되고 작업이나 우량품종 유지에도 용이하다.


차밭을 경작해 연간 어느 정도의 소득을 올리나?

2억원 정도 된다. 내가 개발하고 내손으로 조성한 차밭이 4만평(13만2천232㎡)이고 그중 현재 내가 경작하고 소유한 차밭이 2만여 평이다.


놀랍다. 어릴 때부터 차밭농사를 짓고 살았는가?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차밭을 놀이터 삼아 자랐지만 아버지가 지방 전매청에 다녀 큰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농촌에서 성장해 농사일 경험은 있다. 이곳 회천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성북동에 있는 경신고교에 입학하면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언제 귀향한 것인가?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귀향이라기보다 귀농을 한 것이다. 1998년 37살 때였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해 별로 걱정거리 없이 살았다. 마지막 직장이 남양유업이었고 성실하게 근무해 그만둘 이유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고향의 차밭이 그리웠다. 친구들과 소풍가서 놀던 곳도 차밭이었다. 결혼도 하고 뒤늦게 방송통신대도 졸업하고 자식도 태어났지만 미련을 씻지 못해 어느 날 아내에게 내 결심을 얘기했다.


설득이 힘들었을 같다.

아니다. 아내는 쉽게 내 뜻을 받아들였다. 순천대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해 차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남편의 간절한 꿈을 따뜻하게 받아들일 만큼 이해심이 있었다. 우린 미련없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집을 찾았다. 바로 이 집이다. 지금은 다시 지었지만 처음 돌아왔을 때 방 두 칸의 초가삼간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방 한 칸에 처조모님을 모시고 다른 방에 우리 가족이 겨우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집이었다.


가져 온 재산은 많았는가?

월급쟁이라는 것이 월급받아 먹고 사는 생활 아닌가? 본격적으로 차밭을 조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자금을 벌기 위해 품팔이를 시작했다. 경운기 등 농기구를 마련해 농기계 작업을 대신 해주고 품삯을 받는 일에 매달렸다. 보통 밤 11시에 논밭 일을 하고 돌아오면 다음 날 새벽 6시에 다시 일터로 달려 나가는 생활을 꼬박 4년간 하고 모은 돈으로 차밭을 매입하고 조성하기 시작했다.

놀고 있는 남의 빈 땅도 차밭으로 개간하며 모든 것을 차밭 조성에 올인했다. 돈이 생기면 차밭을 조성하면서 해마다 차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수입도 늘어나 점점 한 곳으로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차는 다른 농산물과 달라 흉년이 없다.


보성 차밭이 일종의 중흥기로 접어든 시기인가?

보성 차밭이 유명해 진 것을 두고 어느 한 개인의 노력이나 공로로 돌릴 수는 없다. 공교롭게도 나의 차밭농사가 번창하면서 녹차바람이 불고 보성차밭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보성군 13개 읍면 가운데 우리 회천면이 제1 생산단지가 된 것도 이곳 모든 분들의 땀방울 덕분이다.


고생했던 이야기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농기계로 막노동을 할 때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밤하늘을 쳐다보며 내 신세가 처량해 혼자 울먹인 때도 많았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그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길이 내가 선택한 길이니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신세가 그렇게 초라하게 느낄 때도 다시 서울로 돌아갈 생각은 안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내 성격의 좋은 점이 하나 있다. 나는 돈을 좇아다니며 살지 않는다. 일이 좋아서 죽기 살기로 일을 따라 가다보니 돈이 생기더라. 솔직한 고백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차밭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고 차밭에 내 어릴 때의 꿈과 사랑이 배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산다. 나는 푸른빛이 변하지 않는 차를 사랑한다. 가지가 하나 부러져도 내 신체의 일부가 당한 고통처럼 아픔을 느낀다.


당신은 보성차밭의 전도사처럼 보인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녹차 체험장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전도사의 입장에서 그들을 모시고 보성차를 소개하며 얘기를 나눈다. 잊지 않고 해주는 말 중에는 차를 덖을 때의 요령은 가마솥에 들어 있는 찻잎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정성껏 덖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향기가 나는 맛있는 차가 나온다고. 차를 만드는 사람은 차와 혼연일체가 안되면 좋은 맛이 전달이 되지 않는다.




체험장에는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찾아오는가?

5월부터 9월까지 체취기간 내내 발걸음이 멎지 않고 있다. 학생들도 있고 관광객도 있다. 하루 2백여 명이 버스로 찾아올 때도 있다.


자녀를 소개해 달라.

아들 형제인데 모두 보성에서 중고교에 다니고 있다. 보성예당고교에 다니는 큰 아들은 이미 후계자로 결정을 해 두고 있다. 본인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내 인생과 내 자손의 머물 곳은 오르지 차밭뿐이다.



여러 잔의 차를 마시며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 부인 정혜영 여사(40)는 “해지기 전에 빨리 차를 따야 한다”며 부군이 차밭으로 가기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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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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