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6)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6)
  • 유지형
  • 승인 200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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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유지형 감독이 쓰는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인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을 그려 낸다.

출생부터 기구했던 이월화는 극단에서의 혹독한 배우수업을 거쳐 윤백남의 도움으로 조선의 첫 영화 <월하(月下)의 맹서>에 출연,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가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이월화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 한국 연극 영화사와 그 주역의 인물들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편집자주


등장인물


이월화(본명 이정숙)=이화학당을 나온 연극배우 출신 은막의 여배우. 계모의 손에 자라나 연극과 영화에 투신하고 자신을 키워준 영원한 스승 윤백남을 운명 직전까지 연모한다. 결국 기생으로 전락하고 중국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 가서 신혼생활을 영위하나 일본인 시어머니의 학대로 불행하게 그곳에서 죽는다.


윤백남 / 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조선 연극 영화계의 거목. 이 월화를 무명극단에서 발굴해 연극계의 스타로 만들고 조선최초의 활동사진을 찍으며 이월화를 대 배우로 출세시킨다. 선비적 기질과 대쪽 같은 성격으로 월화의 방종을 보고 절연한다.


안종화 / 배우 감독=이월화의 평생 친구. 끝까지 순수함으로 월화를 대한다. 최근 발굴되어 화제가 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감독이기도 하다.


박승희 / 배우 연출자=극단 토월회의 대표. 미주대사를 역임한 박정양 대감의 장남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극단에서 여배우 이월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만 약혼녀의 등장으로 결국 월화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박승규 / 극장 단성사 부사장=단성사 사주 박승필의 친동생. 기생인 월화를 만나 동거하나 주위의 반대로 결국 헤어진다.


윤기성 / 연극배우=월화의 연하의 남자. 고아로 자라난 불우한 청년이다. 월화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나 결국 마약밀매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이응수 / 연극배우 여장배우=극단에서 월화를 만나 변태적 관계로 발전한다. 월화에게 많은 도움과 길잡이가 된다.


조씨 / 월화의 계모, 기생출신=고아인 월화를 키워준 은인이다. 월화를 괴롭히기도 자책도 하는 이중적 성격의 여인이다.




(36) 인력거


[인터뷰365 유지형] 월화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요정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층 서양식 양관으로 지은 <태화관> 정문 앞을 나서자 인력거 한대가 월화를 기다리고 있다.

인력거 손잡이에 기대 앉아 졸고 있던 늙은 인력거꾼은 월화를 보자 서둘러 상반신을 일으켜 허리를 구십 도로 읊조리며 반긴다.

“월화 선생님! 오늘밤은 제가 모시게 됐습죠.”

월화는 인력거에 오르며 말 한다.

“가당치 않게 선생이라니? 그냥 아씨라고 불러요.”

아씨란 그래도 기생을 존경하여 부르는 인력거꾼들의 명칭이다. 월화의 말에 그는 더욱 너스레를 떨며

“아이고! 무슨 아니 될 말씀을.. 기생은 다 같은 기생인 갑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예술계에 투신 하셨던 유명한 배우 선생님이신데...”

인력거꾼의 아부에는 후한 팁이 뒤 따른다. 그러니 인력거꾼들은 한 푼이라도 더 팁을 타내려고

‘아씨는 분명 항아월궁에서 온 선녀라는 둥’

‘착한 효심이 화류계로 내 몰았다느니..’

그렇게 넌지시 아부를 하노라면 가뜩이나 심사가 허전하고 술도 취해 있는 기생들은 허리춤에서 역시 자신들도 행하로 받아 낸 지전 한두 장 쯤은 서슴없이 건네준다. 물론 월화도 그런 호기를 자주 부린 덕에 인력거꾼들이나 운전수에게 인기가 많다. 월화는 인력거꾼의 부축을 받아 인력거에 올라 두툼한 가죽좌석에 몸을 내 맡긴다. 지친 것 보다는 술이 많이 취 했다.

오늘밤도 황금정에 있는 <고려관>을 시작으로 공평동의 <창서원>, 인사동의 <태화관>, 등 세 군데나 뺑뺑이를 돌았다. 일진이 사나운지 손님들이 다들 만만치 않았다.

<창서원>에서는 술병돌림을 당해 벌주를 열잔 이상이나 마셨다. 술병 돌림이란 술상 위에 빈 술병을 돌려 그 병 꼭지가 향한 쪽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놀이인데 서너 명이 짜고 하면 충분히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악의 없는 장난 같은 것 이었다.

“하하.. 자! 벌주 들어갑니다.”

술꾼 하나가 재미있다는 듯 웃어 재키며 월화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른다.

“왜 나만 걸리지?”

월화는 찡그리며 방금 마신 술잔을 또 비운다.

“요놈의 술병 주둥이가 제 딴에 삐쭉 나왔다고 계집만 찾는 모양이네. 하하..”

이들이 술상의 한쪽을 기울어 술병 주둥이가 그녀 쪽으로 향하는 걸 그녀는 조금도 눈치를 못 챈다. 월화는 체질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술을 마시면 심장이 돌처럼 굳어가듯 아프고 숨이 가빠 온다. 그러나 술을 따르는 기생의 주제에 어찌 손님이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래저래 주는 잔을 받다보니 많이도 취했다.

마지막으로 들린 <태화관>에서는 카르멘을 흉내 내어 여섯 폭 치마를 반으로 치켜 조아 입고 유성기 소리에 맞춰 후라멩고를 추어야 했다. 어느 술꾼 하나가 몇 년 전 무대 위에서 공연한 월화의 카르멘을 본 모양이었다.

“자! 조선의 카르멘 이월화 씨를 소개 합니다”

술꾼이 마치 무대 위의 사회자처럼 손을 내밀어 월화를 소개한다.

“자! 이제부터 그녀의 카르멘의 춤이 펼쳐집니다! 자! 박수!”

짝짝..짝..시들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왜들 이래요? 카르멘을 한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

월화는 손을 훼훼 내저으며 거절 한다. 실제로 카르멘은 극단에서 공연한지가 사오년은 족히 지났다. 월화가 몸을 사리자 박수를 치지 않던 술꾼들 까지 합세하여

“카르멘! 카르멘!”

목소리를 높여 더욱 거세게 춤이 아니라도 뭔가를 보여 주길 쌍 박수를 치며 요청한다.

개화의 바람을 타고 청루에도 기생들의 역할도 달라졌다. 가야금을 뜯고 소리를 하고 먹을 갈아 화선지에 사군자를 치고 글문이나 나누던 그런 전통은 사라지고 이제는 누구나 일본 유행가 한곡쯤은 간드러지게 부를 줄 알아야 기생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다못해 피아노를 갖다 놓은 기방도 있다더라. 그러니 월화의 양춤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다.

그런 술꾼들의 요청보다도 술에 취한 월화의 마음 한곳에 기억되는 애잔한 무대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월화는 그 시절의 향수에 젖듯 버선을 벗고 맨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비를 풀고 머리를 내려 트려 머리카락 한 가닥을 붉은 입술에 물었다. 급조된 카르멘의 모습이다.

기생 하나가 구석 화초장위에 놓인 유성기위에 판 하나를 골라 얹어 놓고 핸들을 돌리고 바늘을 올려놓았다. 치직 치직...소리와 함께 유성기의 나팔관을 타고 소리가 들려 왔다. 다행이도 음악은 하바넬라는 아니라도 스페인 무곡이 흘러나온다. 월화는 서서히 발을 구르며 카르멘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못 해낼 줄 알았던 후라멩고에 그녀의 몸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기녀들은 황급히 장구며 북 등을 치우기 시작 했고 술상마저 구석으로 밀려 났다. 더욱 넓어진 방안에서 월화는 두 손을 치켜 박수를 치며 풍만한 가슴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순간, 방안에는 남자들의 요란한 기성소리와 장단을 맞추는 힘찬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방안은 순식간에 세빌리아의 담배공장 앞 광장으로 변하고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스페인 무곡이 더욱 고조되며 카르멘의 독무를 더욱 자극적으로 몰아갔다.

월화는 이렇게라도 후라멩고를 추니 마치 연극 무대로 돌아간 듯 흥분과 희열이 밀려 왔다.

‘그 시절 함께 무대에 섰던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밤도 무대 위에서 오색 조명 불빛을 받으며 카르멘이 되고 카츄사가 되고 춘향이가 되어 있겠지. 아니면 이름 없는 산골 가설무대 위에서 남포 불빛에 향수를 달래며 이수일과 심순애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 내가 그들에게 달려간다면 그들이 날 알아보고 반겨 줄까? 그곳으로 돌아 갈 수는 있을까? 아니.. 영영 돌아 갈수 없을 거야.’

월화는 왈칵 솟아오르는 슬픔을 참으며 춤에 열중했다.

“그래 오늘밤은 누가 뭐래도 나는 카르멘이다. 누구든 나와 함께 춤을 추는 용기 있는 자 ! 나의 사랑을 바칠 그 남자의 이름은 호세.. 호세!”

월화는 호세! 를 외치며 손짓으로 술꾼들 중 한 사람을 불러냈다. 키 큰 사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 나 손을 허공에 치켜 올리고 힘 찬 박수와 발장단을 굴리며 월화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 했다. 제법 카르멘과 잘 어울리는 조선인 호세 이었다.

“하하..한 쌍의 잘 어울리는 파트너일세.”

“어떤가? 오늘밤 두 사람이 만리성을 쌓아 보는 것이?”

술꾼들도 한마디씩 해댄다. 그렇게 춤판은 끝나고 이어 술판도 곧 끝났다.

겨우 몸을 추려, 요정을 빠져 나오려는데 동아일보에서 신문기자가 찾아 왔다고 해서 한 방으로 가보니 토월회에서 함께 연극을 하던 이서구였다. 이서구는 빈 방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것도 안주도 없이 강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월화를 보자 버럭 술에 취해 소리를 질렀다.

“어서 연극무대로 돌아가! 어서!”

그 소리에 월화는 어의가 없다.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아 상위에 놓인 권련갑을 집어 들어 담배를 한가치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몽롱한 구름처럼 담배연기가 월화의 입가에 세어 나왔다.

“아! 담배 참 맛 있다. 내가 이 맛에 산다니까.”

이서구는 과부 청승을 떨 듯 연기를 품어 대는 그런 월화를 외면하더니 갑자기 대성통곡으로 울기 시작 했다. 월화는 어의가 없어 이서구를 본다.

“왜 울어요? 내가 이 선생을 때리기라도 했나요?”

그 말에 이서구는 두 손으로 방바닥을 치며 더욱 서럽게 울어 댄다.

“월화가 기생이 된 것이 매를 맞는 것 보다 더 아프다고. 그러니 제발 부탁이야. 어서 영화계로 돌아가든 무대로 돌아가라고”

“이 철없는 남자를 어이 달랜담?”

월화는 보이를 불러 술상을 들이라 했다. 그리고는 훌쩍이는 이서구의 커다란 등을 향해 뇌까리듯 입을 열었다.

“무대로 돌아가라고요? 누가 이 한 물간걸 불러 줘야지 은막으로 돌아가든 금막으로 돌아갈 것 아니에요?”

그러자 이서구는 언제 울었냐는 듯 말짱한 얼굴로 돌아보며 말한다.

“내가 알아볼게. 요즘 새로운 신생극단이 많이 생겼어. 영화계도 활동사진을 박느라 활발하고 말이야.”

물론 신생극단도 많고 활동사진도 그 편수가 해마다 늘고 있다. 그러자니 어부지리 극단들이 출몰하여 악극도 아니요, 신파극도 아닌 만담수준의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려 관객들의 빈축을 사고, 영화계 역시 생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이 감독이랍시고 영화를 찍어대니 오늘의 조선 영화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니던가? 월화가 기생이 되고 얼마 후 유장안 이라는 신인감독의 <지나가의 비밀>이라는 영화에 출연 한 적이 있다. 만주까지 가서 찍은 영화인데 제작비의 부족과 현장에서 연출력 부족으로 헷갈리는 감독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고 또 극장에 개봉한 후 관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쓰라린 비평을 들었던가? 출연료는 고사하고 여비가 떨어져 함께 출연한 복혜숙과 함께 갈보 촌으로 끌려 갈 뻔한 생각을 하면 그저 눈앞이 아찔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순진한 양반은 나보고 다시 은막이나 무대로 돌아가라고...

월화는 차갑게 권련을 상 모퉁이 위에 난폭하게 비벼 끄었다. 권련이 잘 꺼지지 않고 쓰디 쓴 생 연기가 타 올랐다. 그녀는 눈을 찡그리며 호소와 같은 소프라노의 대사를 씹어 대었다.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조선의 극단에서 하다못해 오십 원 씩만 월급을 주면 다시 극단으로 돌아가겠어요. 영화계는 더욱 더 마찬가지고요.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자니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을 던지고는 월화는 그 방을 빠져 나와 버렸다. 마치 연극의 피날레가 끝나 막이 내리기 전에 서두르듯 황급한 퇴장이었다.

월화는 인력거에 의지해 장명등이 졸고 있는 철시한 종로통의 야시장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달려가고 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창선동으로 향한 인력거는 종로통을 달려 비각을 꺾어 총독부 건물 앞을 지나 인왕산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가야 한다. 그녀의 어깨를 아프게 짓누르듯 무거운 회색빛 어둠이 길목 곳곳 마다 축축이 늘어져 있었고 일력거의 휘장 사이로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 왔다. 월화는 휘장을 들치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 다 본다. 그녀의 눈에는 일렁이듯 이슬 같은 눈물이 고여 있다. 그녀의 흐린 눈빛 속으로 희뿌연 새벽하늘을 가득 담아 본다. 그 하늘 한곳에 아직도 지지 않은 눈썹 같은 초승달이 실눈을 뜨고 그녀를 슬픈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앗!”

순간, 월화는 눈을 의심 했다. 그 초승달 아래로 새벽빛에 물든 희미한 유성별 한 개가 저쪽 하늘 저편으로 떨어지며 사라지고 있다. 월화는 내 마음속에 또 하나의 문성별이 떨어지고 있구나 하는 체념의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문성별은 월화의 운명 속에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금세 서글퍼진다.

그리고 이렇게 발을 들여 논 노류장화의 생활이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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