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파괴 무한도전의 연기인 이순재
정년파괴 무한도전의 연기인 이순재
  • 김두호
  • 승인 200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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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교본은 중학시절 은사였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거침없이 하이킥> <이산> <엄마가 뿔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사랑해 울지마> 등 근래에 방영되어 고시청률을 기록한 시트콤, 사극, 현대물 등 다양한 장르의 TV 드라마에서 쉬지 않고 출연하고 변신해 온 이순재는 고희를 훌쩍 뛰어넘은 원로 TV연기인이다. 그를 만 74세 국내 최고령 탤런트로 밝히는 것은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 스스로가 10년전, 20년전과 다름없는 활동성을 유지하며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는 초인인가? 건강관리에 특별한 비결도 없는 보통사람에 평범한 생활인이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있었다. 대학에서 철학(서울대)을 전공한 덕분인지 인생관과 직업관이 뚜렷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삶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와 실천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실천에 옮겨왔다는 점이다.


장시간의 인터뷰에서 단 한마디의 허튼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케케묵은 사극을 연기하지만 자신의 극중 캐릭터를 대본의 꼭두각시에서 머물지 않고 이 시대의 귀감이 될만한 캐릭터로 끌어내는 프로 연기인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연기무대의 현인(賢人)이다. 한 때 정치도 했지만 그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면서 미련없이 본업으로 돌아왔다. 원칙을 지키며 지혜로운 인생을 살고 정년의 한계를 초월한 성공한 그의 삶의 비결은 좋은 스승을 만난데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했다.



가장 바쁘게 사는 분 같다. 지금 하시는 일은?

MBC-TV <사랑해 울지마>에 출연하면서 세종대 석좌교수로 워크숍을 강의하고 있다. 작년까지는 학부에서 강의를 했고 이번 학기부터는 대학원에 출강한다. 각종 단체의 홍보대사를 맡지만 틈나면 애정을 쏟는 곳은 우리 동네인 중랑사회복지회 일과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일이다. 또 하나는 우리 연예인들이 고통받는 악플과 관련해 ‘햇살이 가득한 사이버 세상’이란 뜻의 선플(Sun full) 무브먼트 운동을 민병철 박사와 함께 펼치고 있다.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질문이 건강관리다. 어떻게 체력을 유지하시는지, 기력이 왕성한 어느 원로 한분은 산삼을 상용하다는 소문도 있다. 혹시 보약 덕분은 아닌가?

난 아주 평범한 보통 생활인이다. 특별히 무엇을 먹고 운동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비타민제를 간혹 복용하는 정도다. 아마도 모계의 건강 체질을 물려받은 것 같다. 작년에 별세하신 어머니가 95세까지 건강하게 사셨다.


고향이 함북 회령으로 알고 있다. 가족분들이 일찍 월남하신건가?

부모님과 나는 회령에 살았지만 조부모님께서 서울에 사셨다. 내 나이 4살 때 서울 구경 왔다가 조부모님 곁에서 살게 되었으니 사실상 서울사람이다. 아직도 친척들은 선영이 있는 회령과 중국 연변에 일부가 살고 있다. 해방 후 가족이 서울로 오셨고 아버님은 63세 되시던 해 1970년에 별세하셨다.


한 때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셨다. 정치는 마약과도 같다는데 쉽게 몸을 뗀 동기가 궁금하다.

정치를 하는 8년간 한번도 행복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건 내 본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제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관료든, 정치를 하든, 연예인이든 주어진 위치에서 국가에 기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출세라면 가치가 없다. 나는 정치보다 연기자로 사회에 일익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나선 동기도 내 의지보다 타의에서 비롯됐다.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출연 직후 1992년 총선에 출마했을 때 배역이었던 ‘대발이 아의 인기 덕분에 당선됐다는 소리가 나왔다. 정말인지 한번쯤 짚고 넘어갈 얘기 같다.

지금 유권자의 수준과 선거문화를 제대로 모르고 한 소리다. 만일 그런 분이 있다면 100표도 안됐을 것이다. 막상 투표용지를 들면 냉정하게 사리를 가려서 찍는 시대가 아닌가.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을 위해 정치를 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열심히 일익을 다하며 살고 있다.




당신이 남다르게 사는 모습은 연기활동 초기부터 보여주었다. 의자 몇 개 놓고 이화여대를 졸업한 부인 최정희 여사가 앞치마를 두르고 만두가게를 열 때부터 씩씩한 가족으로 화제가 됐다. 6년만에 거상이라는 중국집 빌딩을 세웠다는 성공담도 남겼다.

하하하. 아들의 돌반지 42개가 장사 밑천이었다. 연기자는 출연 작품이 없으면 실직자가 된다. 그 무렵 공백기가 오면서 위기감을 그렇게 해결했다. 그후 친척의 보증을 섰다가 빌딩이 넘어가 망했다.


요즘 ‘국민 할배’라는 별칭이 따른다. 연예인 중 현역으로 최고령이 맞는가?

TV 연기자로는 그럴 것이다. 신구 최불암도 우리 또래지만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씨(82)는 나보다 어른이고 연극분야에서는 국립극단에 장민호 선생(85)이 계신다.


최근에 출연 작품 중 <이산>에서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영조역은 일품이었다. 스스로도 만족하는가?

출연 당시가 대선 선거 기간이었다. 나는 영조라는 인물을 통해 이 시대 지도자의 리더십을 반영하려고 심혈을 쏟았다. 그는 사가에서 서민 속에 살아봤던 인물이고 개혁적이며 학문적인 깊이도 갖춘 인물이었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고뇌와 손자에 대한 교육문제 등 어떻게 하면 국가적 사회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하며 연기했다.

그러나 <이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나는 요즘 드라마 전반의 제작 풍토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 한편을 제작하기 위해 몇 달을 두고 제작하는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는 방영 일주일 전에 녹화작업이 진행된다. 심한 경우는 작가의 대본이 나오지 않아 쪽지 대본을 들고 녹화되는 사태도 벌어진다. 마치 축구시합을 앞두고 두세달 연습한 팀과 연습없이 바로 시합에 뛰어드는 팀의 결전인데 그럼 지금 같이 한류문화가 등장하는 등 글로벌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화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는가 고민해야한다.

<이산>을 찍을 때도 냉난방이 안되는 용인의 창고 세트장에서 오들오들 떨며 주로 야간을 이용한 철야 촬영을 했으니 편안하게 연기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충분한 연습이나 토론시간을 거쳐 작품이 제작되는 환경이 온다면 지금보다 우수한 작품들이나 좋은 연기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1960년대부터 영화와 TV 연기자로 활동해 오셨다. 반세기에 이르는 연예계의 변화를 돌이켜 보면 세태가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는가?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자질이 우수한 점이다. 연예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치게 상업주의 성향으로 흐른 지금의 작품 제작풍토를 개선하면 30% 이상의 상승효과가 있다고 본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한류 신드롬은 영상산업, 문화 컨텐츠가 주력인데 작가나 연기자나 인기의 숨이 길지 못한 원인이 돈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는 풍토 때문이다.

과거에는 작가 사회에도 산맥같은 인맥이 있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운사 김영수 이서구 김희창 유호 같은 작가들이 드라마의 길을 잡았다. 그후 신봉승 김수현 세대가 등장했다. 새로운 작가가 등장하면 어느 작가 또는 어떤 작품의 성향인지 맥이 이어졌으나 지금은 정체성도 깊이도 측정하기 어렵다. 물론 좋은 작가와 작품도 나오지만 인기의 숨이 길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젊은 요즘 연기자들도 너무 성급하다. 연극 등을 통해 제대로 수업을 받고 연기를 시작하지 않고 처음부터 욕심을 앞세워 배역 경쟁만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1990년대 이후 21세기가 시작하면서 100억 200억짜리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고 배우의 출연료도 상승해 결국 지금은 투자자가 줄어들어 주저앉을 위기에 놓여 있다. 배우들도 배짱으로 거액의 출연료를 요구하거나 돈 때문에 싫은 작품도 선택해 수명을 단축하고 있다.


성장기의 일화가 궁금하다.

매우 보수적이고 완고한 한학자 조부모님 슬하에서 주로 성장했다. 할머니는 생부를 낳은 분이 아니지만 친조모보다 더 극진한 사랑으로 손자를 아들처럼 돌봐주셨다. 그러나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은 서울중학 시절의 은사들과 학교 분위기였다. 당시 일본인 학교는 4년제였던 서울중과 용산중 뿐이었다.

해방후 김원규 교장 시절의 서울중은 최우수학교의 수준을 스파르타식의 교육풍토로 운영했다. 놀라운 것은 교장선생 자신이 바른 교육의 실천자였다. 운동장에 떨어진 휴지를 직접 줍고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학교를 거울 같이 깨끗하게 만들었다.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어도 배탈이 안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결한 교정을 만들었고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절대로 못 벗어나게 하며 오르지 교육에 전념하도록 완벽하게 통제했다.


찢어진 모자에 바느질을 한 모자를 멋으로 쓰다가 들키면 퇴학을 시킬 정도였다. 소풍도 기념일을 택해 가게 했다. 학교가 지금의 경희궁터에 있었는데 인접한 이화여고생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야유를 했다고 해서 학생들을 모조리 뺨을 때리는 체벌을 가할만큼 엄격했다. 교장 선생은 3가지를 강조하셨다. ‘있어야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 중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자’가 교훈이기도 했다.

교장선생이 그런 정도였으니 교사들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견뎌낼 수 없었고,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시인 조병화 선생은 수학을 가르쳤는데 45분 수업중 15분은 시낭송의 시간이라 즐거웠다. 원래 물리학을 전공하신 분으로 수학을 담당하셨는데 수학시간에 듣는 시문학은 감미로웠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 안병욱 선생은 영어를, 그밖에 소설가 황순원 선생 같은 분들이 우리 학교에 계셨다.


언젠가 우리 동네에 있는 고교에서 사회교육을 위해 강사 한분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그 분을 모시고 간 일이 있다. 한심한 사태는 교장과 교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강연 중 너무 시끄러워 훈육교사가 9차례나 잡음이 없도록 학생들에게 경고를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제자가 스승에게 반발하고 학부모가 자식의 스승도 구타하는 세상에서 좋은 학교, 경쟁력 있는 학생이 나올 수 있겠는가? 나는 학교의 평준화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나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1980년 언론통폐합 사건 이후인 1982년에 방영된 사극드라마 <풍운>에서 대원군역이 먼저 떠오른다. 드라마가 그 시대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인데 내 나름으로 시대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려 애를 썼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그 역에 심취해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다.

또 KBS-TV 최장수 드라마였던 <보통사람들>과 <목욕탕 사람들> <사랑이 뭐길래> <상도> <이산> 등의 작품들도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영화 출연도 적잖은 기록을 남기셨지 않은가?

그렇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70여 편에 출연했다. 주로 애정 멜로드라마가 많았다.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과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 계몽성 영화인 <어머니> 등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어머니>로 대종상주연상에 유력한 후보로 올랐으나 영화쪽 보다 TV연기인으로 분류되어 특별남우주연상이란 이름으로 보상을 받았던 일이 있다.


언젠가 ‘좋은 연기자’의 선택을 요구받는 질문에서 ‘김희애’라고 대답한 것을 보았다. 후배들 중에 뛰어난 연기자로 김희애를 꼽는 이유라면?

좋은 연기자, 뛰어난 연기자는 얼마든지 있다. 나와 공연을 많이 한 김혜자 강부자 여운계를 비롯해 고두심 김영애 김혜숙 등등. 굳이 젊은 연기자 중에 꼽는다면 연기를 제대로 터득한 김희애가 떠올랐다. 그는 주어진 배역에 전력을 투구하는 연기자로, 심층 연기를 보여주는 젊은 연기그룹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캐릭터에 따라 연기력에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준비할 때 나는 적역의 상대역으로 나문희가 떠올라 그녀를 추천했다.


그렇다면 각종 장르의 드라마 가운데 자신은 어느 쪽에 적합한 연기자로 생각하는가?

이 나이가 되면 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원군이나 영조 같이 선이 굵고 선명한 풍운과 개혁의 캐릭터가 몸에 맞는 것도 같다. 나는 그런 인물을 통해 드라마를 뛰어 넘는 어떤 메시지를 배역을 통해 전달하고 시청자의 맺힌 가슴을 풀어주려고 시도한다. 비록 드라마이지만 연기자에게 주어진 책임감으로 생각한다.

실존 세계인 정치의 리더십도 맺힌 것을 해소시켜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맥이 통한다. 예를들어 지역감정도 그것을 저지른 사람들이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해야 하는데 그냥 넘어갔다. 군사정부가 원인 제공을 했는지 모르지만 지역감정의 양대 심볼은 DJ와 YS 아닌가. 그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누구도 그걸 해소하지 못하고 떠났다.




젊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을 것 같다.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 시대의 언어를 잘 모른다. 좋은 말 좋은 생각이나 행동은 이어가고 본받아야 하는데 시야가 너무 짧고 깊이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동네 고교를 지나다보니 ‘Be Ambitious!’(포부를 가져라)라는 격문이 교문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좋은 말이다. 큰 꿈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소중한 시대인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유아기 교육부터 시작해야한다. 큰나무를 만들기 위해서는 싹이 틀 때의 기초 작업에서 큰 터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어른들이 젊은 세대를 탓하기 전에 반성해야할 점도 그래서 많다. 자식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한다.

사람의 덕목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인사예절이다. 설날 세뱃돈 만원 주는 아저씨와 천원짜리 주는 아저씨를 좋다 나쁘다로 평가하는 어린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를테면 버르장머리 있는 자녀교육을 유아기 때부터 시켜야하고 이 시대의 어른들도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미래가 있는 국가에 살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의 어른이나 지도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이 떠난 자리에 모인 감동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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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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