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
  • 유지형
  • 승인 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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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여배우의 꿈 / 유지형




(3) 백남

[인터뷰365 유지형] 영화감독 윤백남! 물론 백남이라는 이름은 본인 스스로가 지은 예명이다. 그는 두 번의 도일 후, 극단을 창단하고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활동을 하며 중국고전소설 <수호지>을 번역하여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또한 <안조화><기연><시주> 등의 단편소설을 문단에 발표하며 소설가로써의 입지를 다진다. 그러자니 근사한 필명이며 연극계에서 사용할 예명이 필요 했다. 그래서 며칠을 고심 끝에 작명한 이름이 백남이다.

“이제 나의 이름은 교중이 아니고 백남이다! 윤.백.남! 이.. 아니 조선의 문화계를 뒤흔들 멋진 이름이 아니더냐?”

백남은 자신이 작명한 이 이름에 만족 했고 사람들이 그를 백남이라 불러 주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백/남(白/南) 흰 남쪽이라는 뜻이 있으나 한문의 뜻과는 별 상관이 없다.

단지 그가 흰 백자를 호와 예명으로 쓸 정도로 흰색을 좋아해선지 그는 늘 흰 명주 한복에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다녔다. 당시는 물산절약운동의 일환으로 짧은 두루마기가 유행 이었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신장에 짧은 흰 두루마기를 입고 흰 중절모를 즐겨 쓰고 다녔다. 더욱이 미남형 얼굴에 날카로운 하관은 예리한 그의 예술적 면모를 느끼게 한다. 또한 반듯한 코 위에 동그란 뿔테 안경은 그를 더욱 중후하고 지사적인 풍모를 풍겨 나오게 하고 있다.

그는 약관 15세의 나이에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것은 엄연한 가출 이었다. 더욱이 그해 백남은 부모의 강요로 일찍 결혼하여 3살 연상의 아내가 있었다. 어쩌면 백남의 일본행은 그런 조혼에 대한 전통적 패습의 영향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소년 교중은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중대 발표를 한다.

“난 집을 떠나 일본으로 갈 참이오. 그곳에서 신학문을 배워 오겠소. 언제 올지도 기약이 없소. 당신이 친정으로 돌아가든 재가를 하던 나는 상관을 않겠소.”

“..........”

3살이나 어린 솜털 투성이의 신랑이 그렇게 말할 때 아내 서씨는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그날 새벽 집을 나와 인천 행 첫 기차를 탄 교중은 이제 제물포에 도착하자 주머니에 백동전 이 십 원이 전 재산일 뿐이다. 교중은 막막한 사막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아직 이건 약과다. 갈 길은 더욱 멀고멀다. 사막은 가다보면 끝이 있겠지만 내가 가는 이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없는 길이다.허지만 사내대장부가 가는 길을 누가 막을 소냐? 항구에는 일본으로 가는 이천 톤 급 연락선이 붕-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 준비를 알리고 있다.

‘어떻게든 저 배를 타야 한다.’

빙표(승선표)를 사지 않고는 배를 탈 수가 없다. 빙표는 3등표로 대인이 아닌 소인 표를 산다 해도 백동전 삼십 원은 있어야 한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교중은 혹시나 하며 한곳으로 가본다. 그곳은 배의 선두로 화물을 실기 위해 출구가 있는 곳 이었다. 마치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듯 활짝 열려져 있는 화물출구는 지키는 경비원들로 물샐 틈 없이 외부인의 접근을 막고 있다.

교중은 산처럼 쌓인 화물 사이를 요리 조리 마치 다람쥐처럼 빠르게 다가선다. 인부들은 리어카로 조선의 쌀이며 면화 그리고 조선의 특산품들을 배로 옮기기에 정신들이 없었다.

교중은 그런 인부 틈에 끼어 리어카를 미는 척 하며 배의 화물칸 안으로 들어선다. 일단 배를 탄 것은 성공적 이었다. 다시 눈치를 보며 구석으로 달려가 높이 쌓여진 화물 뒤로 몸을 숨긴다. 마침 면화를 쌓은 포대 위가 숨기 마땅한 장소로 보이었다.

“이곳에서 푹 잠을 자고 깨어나면 일본 땅에 닿아 있겠지.”

교중은 이제 여유 작작 면화포대 위에 길게 다리를 뻗고 눕는다. 잠시 후,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리며 털컹 요동을 치는 것이 배가 출항을 하는 모양이다. 교중은 금방 드르렁 코를 골고 잠이 든다. 이제 하루가 지나고 반나절은 더 흐른 것 같다.배는 고파 오고 더욱이 탱탱하게 차오른 오줌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잠에서 깨어난 교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면화 포대 위에서 아래로 오줌을 싸 갈기고 만다. 마침 이때, 송장을 확인하며 순찰을 돌고 있던 선원의 머리위에 오줌 줄기가 쏟아진다. 선원은 졸지에 화물위에서 쏟아지는 오줌세례를 받고

“칙쇼(짐승)!”

화가 치솟아 위를 올려다보니 쥐새끼 같은 조선 소년이 오줌을 누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게 아닌가? 교중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선원에게 목덜미가 잡혀 갑판으로 끌려 나온다. 이미 바다는 수평선 저 멀리 석양이 지고 있다.

“빠가야로(바보)! 요런 쥐새끼 같은 조선 놈의 새끼!”

화가 머리끝 까지 치솟은 선원은 교중을 검고 거센 파도가 물결치는 현해탄의 바다 속으로 당장 집어 던질 자세이다. 교중은 주머니에서 백동전 이십 원을 꺼내 주며

“가진 거라고 이 돈이 전 제산입니다. 제발 이걸 받으시고 눈 감아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빈다.

“이 짐승 놈의 새끼! 누굴 거지로 아나?”

선원은 더욱 화가 치솟아 당장 하선을 명령한다. 이 바다 한가운데서 하선이 웬 말이냐? 이때, 바다 저편에 희뿌연 섬 하나가 보였다. 대마도다. 선원은 그 섬에 교중을 내려놓을 참 이었다. 그곳 부두에 근무하는 경찰에게 인계되면 강제로 조선으로 되돌아간다. 교중은 이왕 배를 탄 이상 절대로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중은 이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당당하게 일본어로 입을 열었다.

“일본은 위대한 나라이며 그 신민 역시 위대한 국민입니다. 나 조선의 소년 윤 교중은 그런 야마또의 혼과 정신을 배우고자 일본에 가려 합니다.”

지금 조선을 망하게 하고 그 조선을 먹어치우기 위해 온갖 획책을 자행하는 일본이란 나라와 그 국민이 결코 위대하지도 않았지만 우선 이 위기를 넘기는 방법은 이 방법이 최상일 수밖에 없다. 초라한 복색의 조선소년은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이 꼭 일본으로 가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목적과 일본에서 공부를 하여 일본과 조선의 교량적 역할의 인물이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큰 소리로 설토한다. 그러자 선원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귀를 의심한다. 순간, 교중은 선원의 표정을 감지하고 목청을 높여 일본민요 한곡을 능청스럽게 뽑는다. <소란부시>라는 일본 북해도 지방의 어부들이 부르는 뱃노래다.

“아- 토쿠리쇼 쇼쿠리쇼

소란 소란 소란

소란의 노래를 부르자.

푸른 바다로 배를 띄어라.

어기 영차 노를 저어라.

던지는 그물 마다 청어가 가득하네.

소란 소란 소란 황금의 바다로 나가자-”

이 노래는 서너 해 전 교중이 남촌의 진고개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마쯔리를 우연히 구경하다가 그 가사와 멜로디가 흥겨워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다 보니 따라 하게 되었다.

그날 축제에서 본 군무를 흉내 내어 마치 뱃사람들이 노를 젓는 시늉을 해가며 교중이 노래를 부르자

“조선의 소년이 내 고향 북해도의 뱃노래를 부르다니?”

선원은 고향노래를 듣자 감동에 벅차 어쩔 줄 모른다. 또 한 소년의 그 만만한 뱃장과 당당한 포부가 마음에 와 닫는다.

“오늘 너 같은 소년을 만난 것이 네게 큰 기쁨이다. 너는 분명 훌륭한 사람이 꼭 되고도 남을 것이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선원은 교중을 선원식당으로 데려가 배불리 밥을 먹인다. 날이 밝자 연락선은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잘 가라... 꼬마 대장!”

“정말 고마웠습니다!”

배에서 내리며 두 사람은 오래전 만났던 사이처럼 손을 흔들고 또 흔든다. 이제 교중은 어디다 떨어트려 놔도 살아 버틸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후쿠시마겡의 반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그 다음해 봄 와세다 전문학교로 전학한다. 교중의 유학생활은 그야말로 힘든 고생의 연속 이었다. 고학과 장학금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신문배달과 우유배달, 공사장에서 죽을힘을 다해 노동을 했다. 이후, 와세다 대학 전경과에 입학하여 그는 대학생이 된다. 대학생이 된다는 건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 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다행히 조선황실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그런 대로 여유 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청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일합방이 되고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정치와 경제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억측으로 백남은 대학에서 쫓겨난다. 그것은 청년 백남에게 있어서 커다란 좌절과 민족적 서러움이었다.

“아! 이제 나라를 잃었구나. 나라 없는 백성의 서름이 학업조차 할 수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구나.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백남은 다시금 길 없는 사막에 버려졌다. 그래도 위로가 되었던 건 일본에서 물결치는 예술과 문화, 특히 문학과 연극, 영화 등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유학생활 6년 만에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수료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덕에 그는 식산은행의 전신인 수형조합에 취직하여 부이사라는 꽤 높은 직책으로 근무를 한다.

그러나 곧 이일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알고 전업을 서두른다. 그가 척박한 조선에서 할일은 하루빨리 사회를 개명 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문학과 연극 운동이었다.

그는 매일신보 기자도 근무하며 소설과 희곡을 쓰며 연극운동에 뛰어든다.

연극은 당시에도 배고픈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밝혔듯 그는 이미 15세에 조혼하여 아내와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다. 당시의 조혼의 풍습은 서로 사상이 맞지 않는 부부간의 가치관으로 인해 별거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것이 당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적당한 무질서와 자유, 그리고 자신들과 수준이 맞는 신여성들과의 도덕적 기준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연애를 즐기며 살아간다.

백남은 그런 허깨비 같은 생활을 영위하며 살지 않았다. 비록 집에는 자주 들어가진 못했지만 아내야 그렇다 치고 어린 첫 딸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의 고고하고 선비적 자존심은 오직 문필과 연극에만 투자 했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의 유일한 오락이며 구경꺼리는 연극이었다. 당시 극단은 임성구의 <혁신당> 이기세의 <유일단> 김도산의 <신극좌> 김소랑의 <취성좌>등의 극단들이 창단 되었고 그 극단에 소속되지 못하거나 잠시 몸 닮았던 사람들이 만든 무명극단이 수십 개의 넘어 그야말로 연극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다. 당시 연극은 신파극과 신극으로 놔 누었는데 신파극은 주로 서민들의 연극이었고 신극은 그래도 지식층의 사람들이 감상하는 고급취미의 예술이었다. 백남은 인천갑부의 아들 차관호가 제공한 오천 원의 거금으로 극단 <문수성>을 창단하고 극장 원각사를 전용극장으로 활용한다. 그러자 유년학교교관, 궁내부전의사, 또는 현역 소설가와 화가들이 단원으로 모여 들었고 그런 단원들의 경력과 더불어 극단에 대한 사회적 덕망이 높았다.

그러나 작품선정에는 문제가 많았다. 물론 백남 자신이 기획하고 연출한 작품이지만 솔직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 아니다. 첫 작품 <불여귀>는 독구토미의 동명희곡을 각색한 작품이고 <장한몽>은 오자키의 <금색야차>를, 그리고 <나의 죄>도 기꾸찌의 소설을 그대로 옮겨 온 신파조의 연극이었다. 이래저래 백남과 당시의 연극계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 드린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후 이기세의 <유일단>과 합쳐 <예성좌>를 조직하고 <코르시카의 형제><단장록>등을 공연하나 역시 운영실패로 해산하고 다시 심기일전 하여 동경유학생들을 모아 극단 <예술좌>을 창단하여 자신의 처녀 희곡작품인 <운명>을 단성사에서 공연한다. 그렇게 연극에 투신한 세월이 십여 년을 넘어 이제 백남은 조선 연극계에 거목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척박한 조선의 연극계에 백남의 연극 활동은 그저 거친 파도 위를 정처 없이 떠가는 외로운 일엽편주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그가 남쪽의 끝, 항도 부산에 나타났다. 늘 즐겨 입은 흰색 짧은 두루마기를 벗고 흰색 양복에 하얀 파나마 중절모를 쓴 멋쟁이 신사의 모습으로 제자이며 조연출인 안종화와 동행하여 부산에 온 것이다. 백남이 부산에 온 이유는 지금의 국립극장격인 중앙극장을 지으려는 계획으로 극장 건립기금을 모금 하던 중이었다. 당시 부산은 일본과의 가장 가까운 관문으로 많은 일본 사람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는 일본 일련종의 종파인 한 절의 승려를 만나 기부금을 요청하려는 의도로 부산에 내려 온 것이다. 그 일본인 승려의 이름은 다카사 간조라는 중으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다카사의 사찰인 남천사는 용두산 기슭에 지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의 모습은 일본의 신사 모습을 닮아 있다. 다카사는 이 절의 주지였다. 그런데 그의 방에는 불경은 안보이고 벽장에 가득한 세계문학전집과 <예활시대>나 <예술계>등의 대중 예술지와 전문영화잡지 <키네마 순보>, 그리고 소파 방정환이 창간한 조선의 영화잡지 <녹성>등이 널려 있었다.

“조선에는 이렇다 할 마땅한 극장이 없습니다. 극장이 없으니 공터에 가마니를 치고 연극을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연극인이 한곳에 모여 연극을 할 수 있는 상설극장이 필요 합니다.”

백남은 예의 이 범상치 않은 승려에게 조선에 중앙극장이 꼭 건립되어야 하는 취지를 설명한다.

“중앙극장이라면 동경에 있는 제국극장 같은 대형극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역시 문화와 예술 쪽에 이해가 빠른 다카사 이다.

“제국극장도 이제는 낡았으니 시설 면에서 좀 더 월등한 극장을 지어야 하겠지요.”

“그런 신형극장을 지으려면 꽤 많은 거금이 들어 갈 텐데요?”

“그래서 이렇게 십시일반 전국에 모금을 하고 다닌담니다.”

“목탁이나 치며 염불이나 외는 청빈한 빈도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만 내 성의껏 협조하리다. 한 백 원 정도를 기부한다면 조선의 문화와 연극을 위해 도움이 되려는지?”

“백 원씩이나요? 너무 거금이 아닙니까?”

백남과 종화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 마주보다가 다시 카다사를 바라본다.

“마침...불당증축목적으로 시주가 좀 들어온 게 있습니다. 조선에는 절이 많으니 꼭 일본 절을 크게 지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다카사는 백남에게 거금 이 백 원의 기부약속을 했다. 그러더니 백남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한다.

“윤 선생님은 앞으로 조선의 문화와 예술에 큰 공을 쌓을 사람입니다. 결코 연극운동이나 극장주로 만족할 분이 아니지요.”

이렇게 백남을 치켜 올리고는 엉뚱하게도

“혹시 활동사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묻는 표정만은 더욱 진지하다.

“아! 허상 말이군요? ”

“허상이라?”

그렇다. 당시 사람들은 활동사진을 허상으로 이해했다. 진짜 그림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더욱이 그 허상이 빛과 그림자를 통해 아무것도 없는 흰 막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러니 허상 일 수밖에...그러나 연극은 무대 위에 직접 배우가 등장하여 사실적인 연기를 보여 준다. 물론 각본과 연출, 그리고 무대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나 연극을 감상하는 동안은 관객은 그 진실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결코 활동사진처럼 거짓일 수 없다.

다카사는 백남의 허상이라는 말에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허허...그건 허상이 아니라 영상입니다. 이제 온 세계는 활동사진의 개명의 시대가 이미 도래 했습니다. 이제 모든 예술은 영상이라는 종합예술로 합일 되어 바야흐로 아세아에도 영상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영상의 시대라?”

이때 만해도 백남은 자신이 조선최초의 활동사진 감독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다카사는 더욱 자세를 바로 잡더니 정중하고 단호하게 백남에게 입을 연다.

“언제가 될지는 예견할 수 없다만 이 빈도가 꼭 백남 선생을 그 영상의 세계로 모시겠습니다.”

다카사의 말대로 그건 예견 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다. 하여튼 다카사를 만난 일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백남과 종화는 다카사와 헤어져 절을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산의 번화가를 걷는다. 이때, 이들의 시야에 한 건물이 나타났다.

본정에 있는 <국제관>이라는 극장이다. 극장입구에는 높게 간판이 걸려 있었다.

“ 여성극단 <여명>전국 순회 대공연

윤백남 작 /정일국 연출 감독

<운명> 전 2막”

먼저 간판을 본 것은 종화이다.

“어? 선생님 작품을 공연하네요?”

“뭐? 내 희곡을 공연한다고? 극단이 어딘데?”

“극단 여명이라고 여성들만이 출연하는 극단 이예요”

“그럼 조선에도 다카라즈카를 닮은 극단이 생겼담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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