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의 ‘지구생활’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의 ‘지구생활’
  • 김우성
  • 승인 200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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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발사영상 보면 두근거리고 눈물 나"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1년여 전,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탄생했다. 우주정거장으로부터 생생하게 중계된 우주인 이소연의 일거수일투족은, 어린이들에게는 우주로 향한 원대한 꿈을 어른들에게는 자긍심을 느끼게 했다.

물론 비판의 시각도 있었다. 자력으로 발사한 우주선이 아니었으므로 우주관광객에 불과했다는 것, 우주에서 실시한 실험도 초중등 교과과정에서나 배울 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비판론의 요지였다.

하지만 우주산업과 관련된 데이터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게 각국의 관례임을 볼 때,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이소연 박사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이소연 박사는 꾸밈없고 긍정적인 태도에 자연미가 넘쳐났다. 섬세한 감성과 장수의 기개가 교차하는 인간적 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인터뷰는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우주인 이소연은 귀환 이후 지구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일까.



귀환 당시 몸에 충격이 상당했던 걸로 아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충격이 컸다는 건 오해예요. 어떻게 내려오든지 그 정도 충격은 피할 수 없거든요. 귀환궤도에서 4백km 바깥으로 벗어난 것 때문에 우주선 안에서 G-force(내부기압)를 조금 더 크게 받긴 했지만, 바닥에 부딪혔을 때의 충격은 진짜 '사고'라고 할 만한 것들에 비할 수준이 아니었어요. 허리가 아팠던 것도 우주에서 키가 확 컸다가 줄어들고 또 G-force 받는 과정에서 생긴 통증이었지, 돌아와서 한 달 정도 지나고는 그런 통증도 사라졌어요. 단지 다른 사람보다 제가 좀 더 아팠던 건 부딪히는 자리가 하필 제 자리였기 때문이고요.(웃음)


우주인이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었겠지만 막상 가려고 했을 때 두렵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발사 실패의 두려움이라든지.

비행기 사고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비행기를 못타는 것처럼, 두려움이 있었다면 우주인 지원까지는 몰라도 마지막 탑승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두려움이란 것도 시간이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사람이 너무 바쁘면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아픔을 느끼지 못 하듯이, 훈련 일정이 뭐 하나 끝나면 다음 거, 그거 끝나면 또 다음 거 하는 식으로 빡빡하게 밀려있어서 두려움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어요. 게다가 갑자기 최종 탑승자가 되는 바람에 대부분의 우주인들이 6개월 만에 준비할 것들을 한 달 만에 소화하느라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어떻게 보면 고마운 거죠. 시간을 많이 줬다면,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크게 다치면 어떡하나, 못 돌아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했더라면 훈련조차도 끝까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 차원이 다른 세계를 경험하다보니 우주인들이 현실세계에 적응 못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고 하던데요. 우주에서 돌아온 후 가치관에 있어 달라진 게 있다면 뭔가요.

음... 확실히 변하기는 했어요. 우주를 경험한 뒤 주변 모든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 반대였어요. '나'라는 존재가 정말 나약하고 먼지보다 작은 존재임을 느낌과 동시에, 숨 쉬고 지상에 살 수 있는 것조차 감사해졌어요. 생물이라는 게 맨 처음 조그만 바이러스 같은 형태가 우연히 생겨났고 그 다음부터 진화라고 하잖아요. 그 우연히 생긴 게 나였다는 거죠. 우주를 관장하는 큰 힘이 있다면 나 하나 살고 죽고는 아무 상관없을 텐데, 길게는 70년 짧게는 30, 40년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는 게 너무나 감사하더라고요. 돈을 적게 벌고 많이 벌고, 잘사는 나라에 태어나고 못 태어나고, 총알이 빗발치는 사선의 한 가운데 있다한들 (우주를 관장하는 힘은) 어쨌든 그 사람에게 아무런 노력 없이도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지구를 선물해 준 게 아닐까 해요. 그렇게 생각하니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 한 명, 앞에 놓여있는 종이쪽지마저도 소중해지더라고요.



또 바뀐 게 있다면 이건 나이가 들어서인지 우주를 다녀와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좀 불합리한 상황이랄까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예전 같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리 구조가 잘못되었어도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면 안 돼'라며 화를 참을 수 없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이 나한테까지 이렇게 할 때에는 본인도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힘들기 때문일 거야' 내가 저 자리에 가도 저렇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 밉고 안 좋은 사람이기보다는 불쌍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본인도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기득권이라 비판받는 현재의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환멸을 느끼고 슬프겠어요. 그런 면에서 생각의 관점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많이 여유로워졌다고 볼 수 있겠군요.

욱하는 게 좀 줄었다고 해야 하나. 하하.


우주인 사업에 대해 일부 폄훼하는 의견도 있었고 고산 씨를 대신해 탑승하게 된 것 때문에도 심적 부담이 엄청났을 것 같은데, 다녀온 직후부터 줄곧 밝은 모습으로 대응하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밝게 살고자 노력하는 편이예요.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밝아지기 힘들어요.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밝게 태어난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밝게 살 수 없다고 비관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밝게 생각하고 밝게 살려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고,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웃게 되는 게 아닐까 해요. 어떤 분이 얼마 전 좋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것, 나를 화나게 하는 것 중에서 내 능력으로 고쳐질 수 있는 건 1%도 안 된다. 그렇다면 굳이 얼굴을 찌푸리고 살 필요가 없다"... 되게 와 닿더라고요. 우리가 하루 종일 걱정하는 문제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뭔가 노력해서 풀 수 있는 게 거의 없잖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기분 나쁜 걸 온 세상에 알리는 유형인데요. 그러기 보다는 나의 웃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수많은 돌발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갔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신기했던 건 뭔가요?

'수많은 돌발상황'을 상상했을 거라고들 말씀하시는데(웃음)... 우리는 우주를 그렇게 빨리 간 편이 아니예요. 무슨 말이냐면, 러시아나 미국은 30년 4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6개월씩 체류한 우주인들이 줄줄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예측 못할 상황이 별로 없다는 거죠. 운석이 날아와 태양전지판에 부딪히는 사고 정도가 돌발상황이겠지만, 그건 지상에서의 천재지변과 같은 거잖아요. 지상에서의 천재지변처럼 그것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까지 다 알고 있어요. 우주의 화장실이 남성 위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뭘 가져다 덧대야 편하다든지, 우주에서는 어떤 브랜드의 화장지를 쓰는 게 좋은지, 심지어 속옷 얘기까지 해요. 러시아에서 주는 속옷은 이렇고, 사전에 누구와 상의를 하면 네가 입던 걸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코치를 받는 상황이었어요. 그만큼 그들에겐 일상이었죠. 올라갈 날이 가까워지면서 러시아 우주인들이 해주는 말 때문에 '신기해 할' 기회가 줄더라고요. 그런 게 참 속상했어요. 그들에게 그렇게 익숙한 우주를, 우리나라에서 내가 처음 간다는 사실이요. 어떻게 보면, 한국에 와서 만나는 분들마다 돌발상황에 대해 물어보시던 자체가 슬픈 거예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 어떤 전례도 우리에게는 없었으니까요... 그것 말고도 다른 아쉬운 점은 없었나요?

과거에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공부만 하느라 친구도 못 사귀고 주말에 다들 파티할 때도 혼자 남아 공부하고 그랬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에 돌아와도, 나중에 유학했던 나라 사람들에게 업무 차 접근할 때 어려움을 겪고 하니까 요즘은 인간관계나 사회적인 부분을 간과하지 않으려고 파티 참석도 권장하고 있는데요. 우주도 우리나라에서 제가 처음이다보니 동승한 우주인들과 교류하거나, 여유를 갖고 바깥을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어요. 이공계 쪽에서 하드웨어로 실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게 3시간 계획된 실험이 시간 안에 절대 안 끝나요. 같은 실험을 열 몇 번 반복하다보면 계획했던 대로 끝낼 수 있겠지만 맨 처음 하는 실험은 3시간 계획했던 걸 6시간 안에만 끝내도 '운 좋다'고 하거든요. 우리가 우주에서 한 번도 실험을 진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측으로부터 지상에서 소요된 실험시간의 3배를 책정하라는 조언을 받았었어요. 그렇게 계산하고 갔어도 실험 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스케줄 자체가 확 늘어났죠. 한 편으로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 보내지기도 했지만 우주를 체험하고 돌아와서 전달해 줘야 하는 것도 제 임무였는데 그 임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게 무척 아쉬워요.


그 정도로 시간이 빠듯했나요?

올라가보지 않은 분들 입장에서는 열흘이나 주어지는데 그 실험도 다 못하냐고 하실 수 있어요. 실험을 기획한 분들마저도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고... 그런데 유일하게 러시아 측에서만 그러지 않았어요. 돌아왔을 때 러시아 실험 담당자가 말하기를 "열여덟 개의 실험 중 열 개만 성공하고 돌아와도 우리는 널 칭찬해주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비난여론이 생기면 도와주려고 작정했는데 열여덟 개 모두 마치고 왔다는 자체가 놀랍다."고 했어요. 칭찬이라기보다는 혀를 내두르는 분위기였죠. 그것도 남자도 아닌 여자가 해냈다는 것에 대해 '독하다'는 시선이 있었어요. 특히나 러시아는 남녀 간의 성적인 구분이 분명하거든요.



남성 우월적인 분위기를 말하는 건가요.

그보다 여자는 무슨 일을 하고 남자는 무슨 일을 한다는 식으로 미국이나 우리에 비해 성에 따른 임무가 굉장히 명확해요. 러시아에서 우주는 남자들이 가는 곳이예요. 국제사회에서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10년에 한 명 정도 여성을 보내는 것뿐이지, 자기들이 필요해서 보내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더더욱 놀랐던 거죠. 몇몇 우주인은 농담처럼 "너 때문에 우리 임무시간 늘어나겠다"고 푸념했어요. 여덟 시간은 꼭 잠을 자야하고 몇 시간 이상은 쉬어야한다는 자기들 규칙이 있는데 제가 다 깨버렸다는 거죠. 물론 머물렀던 기간이 6개월 정도 됐으면 저도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정신적 스트레스는 둘째 치고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었겠는데요.

내려오면서 들었던 생각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나의 뒤를 이어 우주에 가게 되었을 때 힘들지 않게 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였어요. 그 일은 저밖에 할 수 없잖아요. 내 온몸으로 총알받이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보호해줘야겠다 싶었죠. 저는 그런 선배가 없었으니까요.


우주에서는 어떤 실험을 한 건가요.

실험 내용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뭐냐면, 실험 하나하나가 너무나 프로페셔널 했어요. 분야별로 오랫동안 연구를 해온 분들이 각각 기획한 실험이었고,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실릴만한 수준이었다고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열여덟 개 실험 중에 열네 개가 그랬어요. 실험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를 변수에 대비해 기본적인 내용은 배우고 갔지만 데이터 분석을 보면서 저도 잘 몰랐어요. 그 분야 분들이 "우와 이건 진짜 대단한거야!" 라고 하시니까 '아 내가 대단한 거 했구나' 이랬죠.(웃음) 나머지 네 개의 실험은 초등학생 중학생들에게 필요한 내용이었어요. 학교에서 중력이 없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배우기는 하지만, 백 번 설명을 들어도 중력환경에 너무 익숙해서 중력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뉴턴의 법칙 등 기본적인 과학기술현상을 보여주기 위한 실험을 한 거예요. 그 실험들은 TV에 많이 방송됐고 만천여개 학교에 DVD로도 배포됐어요. 그런데 그 실험들이 더 힘들었어요. 보이기 위한 실험이라 손을 많이 쓰고 카메라 앵글도 연출해야하는 등 데이터만 얻으려는 실험보다 훨씬 힘들었는데, 그 실험들이 또 제일 재밌고 보람 있었어요.


우주에 다녀와서 좀 더 배워보고 싶거나 해보고 싶은 일은 없었나요?

일단 우주에 오래 있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이러이러한 실험을 좀 더 길게 해보면 훨씬 가치 있는 데이터가 나오지 않을까. 내 몸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공학적으로 의미있는 자료가 될 테고요. 그런 많은 것들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리고 이번에 느낀 게, 우리나라가 여러 면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러시아 측에서 우리를 칭찬해줌에도 불구하고 제 입장에서는 부족한 게 많이 보였어요. 그래서 그 부족을 보완할 수 있는, 나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위치까지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무리 우주를 다녀왔다고 해도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에서는 나이도 어리고 여성이기에 영향력을 얻기가 쉽지 않잖아요.





대한민국은 우주산업에 관한한 변방이었다. 미국의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남겼던 당시부터 세계 각국은 이미 본격적인 우주경쟁에 돌입했고, 우주인을 배출한 국가만도 35개국에 이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2007년 들어서야 '국가 우주개발 세부실천 로드맵'이 마련됐다. 그러던 것이 우주인 사업을 기점으로 한층 괄목할만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우주인 이소연과 고산이 연구원으로 있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최근 내놓은 달 탐사 계획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기존의 로드맵을 앞당겨 2018년에 달 탐사 위성을 쏘아 올리고 2020년에는 달착륙선을 보낼 예정이다. 당장 오는 5월이면 전남 고흥 외나로도 나로우주센터에서 러시아와 공동 개발한 최초의 발사체 KSLV-1이 발사된다. 베른트 포이에르바허 국제우주연맹 회장은 "한국은 아주 짧은 시간에 위성을 쏘고 우주발사장을 짓고 우주인을 배출한, 최근 우주 분야에서 가장 성장하고 있는 모범"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올해 우리나라는 세계 아홉 번째 위성 발사국이 됩니다. 지금의 추세라면 머지않아 유인우주선의 발사도 기대해 볼만한데요.

아무리 안전하게 우주선을 만들었고 또 누군가 그 우주선을 타겠다고 자원해 각서를 썼다 하더라도, 안전이 확실히 검증되지 않으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사람을 태울 수 없을 거예요. 현재 화물선을 쏘아 올리는 유럽이 유인우주선을 발사하지 않는 이유도 사람을 태우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를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러시아나 미국이야 지금처럼 인권을 중요시하던 시대가 아니었을 때부터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거고, 중국은 아직도 인권이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는 까닭에 (중국 첫 우주인)양리웨이 이전에 과연 아무도 죽지 않고 테스트 없이 한 번에 성공한 것일까하는 의혹이 공공연하게 제기되는 실정이예요.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만 할 수 있는 걸 찾아야한다고 봐요. 사람 보내는 것 이상으로 힘든 걸 우리가 먼저 개발하자는 거죠. 유인우주선 시스템을 안전하게 갖춘 나라로부터 '너희나라 우주인 태워 보내줄 테니까 대신 우리에게 이것 좀 해줘라'는 부탁을 받을 수 있게끔 방향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최소한 우주선진국들이 해놓은 건 바삐 쫓아가야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데요.

괜히 목숨 걸고 사람 보내는 일에 집착할 게 아니예요. 이미 남이 했는데 굳이 우리가 훨씬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그걸 또 할 필요가 없잖아요. 큰 나라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작은 나라에서 할 수 있다고 봐요. 여기서 크고 작다는 기준은 '능력'보다는 인구수나 국민총생산 등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 부분이 우주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거든요. 러시아 같은 나라는 비용이 천억씩 드는 로켓 하나 추가해서 쏴도 다른 일하는 사람들이 영향을 안 받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로켓 하나 쏘고 안 쏘고가 다른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커요. 그런 규모의 나라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자는 거죠. 중국이나 인도가 뒤늦게라도 사람 태워 보내는 일에 집중하는데 반해 일본은 안하고 있어요. 중국보다 우주개발을 먼저 시작한 일본이 못해서 안하는 게 절대 아닐 거라고요. 자기들만의 작전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나 일본이 왜 우주 강국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그들이 우주인을 열 몇 명씩 데리고 있는 건 그 나라만의 강점이 있기 때문이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 이스라엘도 못하고, 러시나 미국 또한 같이 일하자고 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저 같은 범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이 분야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우리나라에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저는 그 분들이 정말 마음 편히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아까도 그렇고 '돕는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인슈타인이이나 에디슨이 혼자서 대단한 발견을 한 건 아닐 거예요. 그들을 믿고 지원해준 사람들이 있었을 거란 말이죠. 다른 나라에도 분명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 같은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여건이 안 되니까 그만한 발견을 하지 못하고 사라졌을 겁니다. 지금도 분명 어딘가 그런 사람이 있어요. 모두가 반대할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과학기술분야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필요해요. 과거에 장영실이 천문의 만들고 측우기 만들 때도 대신들이 반대했다고 전해져요. 천하게 태어난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냐고. 그 돈으로 길에 헐벗은 사람을 도와야한다고... 당시에는 반대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에 장영실을 지지하면 나쁜 거고 그의 연구를 막는 게 좋은 거라 여겨졌을 거예요. 끝내 장영실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거고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돌아볼 때 어떻게 됐나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반대했던 세력이 악인이고,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를 했던 그들이 훌륭한 조상이 됐어요.


우주개발 사업도 같은 맥락이란 거죠? 앞으로 수천억 수조원의 비용이 들어가려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굶주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 사람들 밥 안주고 우주사업 하는 게 무슨 의미냐. 당신도 우주 갔다 왔지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몇 백년 뒤 우리가 기술선진국의 속국이 되었을 때, 그 후세들이 우리를 보면서 "그때 조금 힘들어도 과학기술에 투자해서 원천기술 가지고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이제 너무 늦었다. 선진국이 선점하기 전에 좀 하지 그랬냐"고 성토할 수 있어요. 거꾸로, 수많은 반대를 뿌리치고 힘들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 했던 사람들이 지금의 전자레인지나 네비게이터같은 것들을 개발해 놓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만들지 않고도 엄청난 기술료를 받는 그런 나라가 된다면 평가는 또 달라질 거예요. 실제로 예전에 미국 우주인들은 계란도 맞고 그랬어요. 홈리스들 몇 명을 먹일 수 있는 돈으로 우주인들 수십억짜리 옷 입히냐. 실험기구라고 만든 전자렌지에 무슨 수억씩이나 들어가냐고 말이죠. 그런데 그 때 들어갔던 비용이 만 명의 홈리스를 먹일 수 있는 돈이었다면, 지금은 전자레인지나 라텍스 팔아서 만든 제품으로 수십만 수백만을 먹일 수 있는 사회복지 재정을 얻고 있어요. 우리가 과학기술과 우주에 투자를 안 하고 그 돈을 써버리겠다는 건, 배고프다고 씨앗까지 먹어버려서 내년에 열매는커녕 뿌릴 씨앗조차 없어지는 것과 똑같아요. 지금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50, 60년대보다 힘들지는 않잖아요. 그때처럼 길에서 주워 먹는 사람, 들에서 산에서 벗겨먹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명백하게 그때보다 나아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훨씬 더 힘들다고 해요. 그 당시에도 "우리도 미국처럼 자동차 텔레비전 만들어서 팔아보자" 해서 공부하는 사람들 지원은 해줬어요.





우주인 배출사업을 두고 우주인이라기보다 우주비행 참가자에 가까웠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 과학계 원로인 한국외국어대 박성래 명예교수는 "우리 형편에서는 이 정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한국의 우주개발이 초기의 원자력 발전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1978년 운전을 시작한 고리1호 원자력발전소는 선진국 기술진이 다 지어놓고 열쇠만 받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턴키(turn-key)' 방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배워 들인 기술을 국산화하여 이제 외국에 원자력 발전소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그동안 우주 개발에 전혀 손쓰지 못하고 있었다. 금년 5월의 발사체 역시 아직은 러시아에서 제공하는 로켓에 우리 기술진이 간접 참여하는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우주개발 사업이 바로 그 '턴키'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과학기술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또 한 번의 추월을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우주인 탄생을 계기로 국민들의 시야가 우주까지 뻗어나간 느낌입니다. 우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단계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데요. 특히 과학미래들에게 던진 메시지가 대단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계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유형의 것에만 집중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TV를 보는 어린아이 한 명이 꾸는 꿈을 돈으로 어떻게 환산할까요. 부모가 수 십만원짜리 과외를 시켜도 그 꼬마가 우주나 과학에 관심을 가질 지는 미지수인데, 우주에서 날아다니는 사람과 로켓을 보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건 수천억을 주고도 가질 수 없는 것일 수 있어요. 나중에 꼭 과학자가 아니어도 돼요. 그 어릴 때의 희열감으로 무엇이든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소연이 우주 가서 금을 캐왔어. 다이아를 캐왔어. 2백억 줬는데 해온 게 뭐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요. 또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도 '우주인 보내서 얼마치의 효과였고, 실험결과의 재산가치가...'하는 식이었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논쟁 안했으면 좋겠어요. 관심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10원의 가치도 없는 실험일 수 있잖아요. 누구에게나 아들딸이 있고 조카가 있기에 그 아이들이 꿈을 갖고 공부 열심히 한다면 좋은 건데, 그걸 꼭 돈으로 계산해야 하나요. 우주 선진국들 보면 당장 내년에 돈 벌려고 우주개발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게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그 자긍심이 우주에만 결과물을 내는 게 아니라 문화 예술 정치 등 사회 전반에서 힘이 발휘된다는 거죠.


과학고 졸업하면서 전혀 다른 전공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계속해서 전공을 이어간 걸 보면 오래 전부터 과학도를 지망한 건가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죠.

사실 중학교 때 예고 원서를 쥐고 있다가 안 썼어요.


예고요?

성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자식들이 뭐 하겠다면 엄마가 말리는 사람이 아닌데 당시에는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하고 싶을 때 취미로 노래하는 거랑, 정말 하기 싫은데 불러야만 하는 거랑은 다르다. 평생 즐거워하며 할 수 있을지 냉정하게 판단해라. 사람들이 잘한다잘한다 하지만, 전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잘한다고 생각하니"... 아니더라고요. 그길로 접긴 했는데 사실 과학고는 친한 친구들이 전부 가겠다고 해서 어릴 때 으레 그러듯이 친구들 따라간 거예요.(웃음) 적성이고 뭐고 관심 없었는데 일단 합격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어렵게 붙었죠. 합격하고 나니까 다음 공부, 당시 연합고사까지 공부하기가 그렇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과학고에 가게 된 거예요. 어리석었죠. 근데 다행히 잘 맞았어요. 저랑 비슷하게 왔는데 나중에 안 맞아서 떠난 친구도 많거든요.

전 다시 태어나도 이공계로 지원할 것 같아요. 누군가 저에게 "그 성적이면 더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도 갈 수 있는데 그래도 이공계 갈래?"하더라도 말이죠. 즐겁게 일하는 게 더 중요해요. 일할 때마다 즐겁고 희열을 느끼는 게, 고소득의 연봉보다 더 크게 페이백을 준다고 믿어요. 강연을 다니면 어린아이들이 이공계에 진학할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지만, 저는 정말 하고 싶은 사람만 오라고 해요. 월급 적고 대우 못 받아도 일이 정말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에라야 그 분야가 발전하는 거지, 이공계 가면 장학금을 준다느니 하면서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의학계만 봐도 돈에 상관없이 순수하게 사람 치료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의학적 발견이 좋아서 하는 분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의학발전에 큰 공헌을 하잖아요.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박사까지 할 정도로 잘 맞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분야보다 재밌긴 한데, 정말 큰 발견을 하는 사람들처럼 실험실에 꼼작 않고 몰두하는 연구자가 아니라는 걸 박사과정 하며 깨달았어요. 그러기에는 제가 노는 걸 너무 좋아하고,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아요. 천재라고 느껴지는 분들 보면 자기가 하는 연구 외에 아무것도 몰라요. 바깥세상의 당연한 상식조차 몰라요. 그런 사람들은 엄청난 발견을 하는데 문제는 그들이 연구만 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딸 기저귀 입히고 가족들 밥 먹이려고 결국 떠나버려요. 그 사람들을 잡아줄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해요. 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이공계도 이해하고 일반사람도 설득할 수 있는 중간자적 역할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도 그런 역할이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저처럼 연구만 하는 체질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발견한 사람이 있다면 괜히 다른 곳에 가서 돈 벌 생각할 게 아니라 중간자 역할을 해주면 좋겠어요.


박사학위 받은 '바이오시스템' 내용 좀 소개해 주세요.

DNA 분리하는 칩을 만들었어요. 기계학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데 요즘은 워낙 분야를 넘나들며 연구가 이루어지죠. 제가 만든 건 큰 기계가 아니라 조그만 칩 안에서 움직이는, 현미경으로 봐야만 작동하는 게 보이는 기계장치를 만들었어요. DNA 내 인체데이터는 잘 모르지만 그걸 분리하는 칩을 개발한 거니까 DNA가 저의 연구재료이자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소속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죠? 우주인 선발 이후로 고산 씨와 두 분 다 진로가 완전히 바뀐 건가요?

그렇죠. 저희 둘 다 원래 이쪽 분야가 아니었으니까요.


연구원 내에서 아무래도 긴밀하게 협력하겠군요. (사전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측으로부터 두 사람의 임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지 말아달라고 요청받았음을 밝힌다)

업무적으로는 서로 만나기 힘들어요. 사무실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거든요. 게다가 각자 대외 일정이 많다보니까 제가 밖에 나가있을 때는 산이 오빠가 들어와 있고, 또 반대로 엇갈리고 그래요.(웃음)


인생에 가장 영향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지금도 제가 이공계라고 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아빠예요. 할머니는 아프시고 할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던 통에 본인은 이공계의 피가 흐르는데도 얼마 전 정년퇴임하실 때까지 농협에 다니셨어요. 밑으로 동생들까지 있으니까 적성에 맞지 않아도 먹고 살기 위해 참아야 했던 거죠. 저 어릴 때 아빠가 집에 보일러 직접 놓고, 전기공사 혼자 다하고, 자동차도 직접 수리하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느 집이나 다 아빠가 보일러 고치고 자동차 고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러는 집이 많지 않더라고요.(웃음)


‘못질’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하. 저는 아빠가 보일러 놓으실 때 옆에서 모래치고 그랬어요. 밸브 연결하는 것도 물 지나가는 거 봐가면서 "아빠 이쪽이야" 외치면 저쪽에서 아빠가 잠그시고. 아빠가 자동차 밑에서 수리하실 때 와셔 달라 니퍼 달라하시면 딱딱 챙겨드리고. 그게 다 초등학교 시절에 공구통 들고 아빠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랬던 거예요. 그런 게 저에게 영향을 참 많이 미쳤던 것 같아요. 여자들은 보통 제 나이가 되어도 볼트너트 구분 못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박사과정 실험할 때도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을 안 해본 친구들은 남자라 할지라도 기술자 분들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면서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런데 저희 팀은 직접 판 잘라서 뚝딱뚝딱 만들어가면서 했어요.(웃음) 지금은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커요.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엔지니어가 되셨을 분인데 우리를 키우시느라...

엄마도 요즘 학부형의 모델과는 달랐어요. 제가 공부 안하고 딴 짓 하겠다는데도 절대 억지로 끌고 가는 법이 없었어요. '해보고 후회되면 오겠지'하는 심정으로 항상 기다려주셨어요. 제가 우주인 지원한다고 했을 때도 걱정 많이 하시고 속으로는 안 갔으면 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딸이 꿈꾸는 거라면 지켜보는 게 엄마의 도리라고 항상 얘기해주셨어요. 그런 엄마가 고마웠어요. 동생들은 또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줘서 똑같이 과학고 다니고 카이스트 오고 그랬어요. 그런 동생들을 보면서 누군가 날 믿어주고 따라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기쁘면서도, 허튼 길을 갈 수가 없었어요. 무너질 수가 없는 거죠. 너무 힘들면 어디로 숨고 싶다가도 저를 보고 있을 동생, 후배들을 생각하면 다시 일어나게 돼요. 친구들도 선배들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어마어마한 힘이 됐어요.


태권도가 3단이라던데...

하하하. 이것도 우리 엄마 멋있다는 말을 해야 돼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내성적이었어요. 무언가 하고 있을 때 남자애들이 건드리면 따지지도 못하고 집에 와서 울고.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도 말 못하고 담아두는 성격이었어요. 지금 이런 말 하면 거짓말이라고들 하시는데. 하하. 엄마는 이런 딸이 걱정이 되었던 거예요. 좀 활동적으로 키우고 싶어서 고민을 하시다가 체육관에 보낸 거죠. 마침 친척 언니가 태권도 사범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운동신경이 무지 안 좋았어요. 피구하면 맨 처음 공 맞아서 나오고 100m 달리기는 30초까지 걸린 적도 있어요. 그걸 안 친척언니가 "이대로 데려다 놓으면 얘는 따돌림 당한다. 2~3주라도 가르쳐서 데려가자"하고는 집에 와서 태권도를 가르쳐줬어요. 그때가 5학년 때였던가. 아무튼 그렇게 해서 체육관에 갔더니 기본자세를 배운 상태라 자신감이 생겼고 친구들과 잘 어울렸어요. 중학교 때는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실이라는 게 있어서 과학관으로 영어 수학 과학을 배우러 다녔어요. 엄마 입장에서는 돈 들여서 학원 안보내도 되고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돌아와서 숙제하고 복습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절 체육관에 보냈어요. 영재교실 끝나고 가방 메고 운동하러 갔다가 돌아오면 10시를 훌쩍 넘겼죠. 그 때문에 다른 엄마들이 우리 엄마를 좀 유별나게 봤어요. 과학고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운동을 못했어요. 그런데 태권도를 전공한 체육선생님이 오래 전 승단심사 보던 저를 기억하시고는 졸업할 무렵이 되어 몇 달만 해보지 않겠냐며 권하셨어요. 그렇게 3개월 정도 다시 재밌게 해서 3단까지 된 거예요.


중학교 때 성악가를 꿈꿨다고 했는데 어떤 노래 잘 불러요? 즐겨 듣는 음악은 뭐고요.

되게 '잡식성'이예요. 들어보고 기분 좋으면 그 시리즈 다 구해서 들어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고요. 가요 중에는 <봄여름가을겨울> '브라보마이라이프', 영화 <쿨러닝>에 삽입된 'I Can See Clearly Now'도 좋아해요. 대중없어요. 어떨 땐 해금 라이브음반도 듣다가 클래식도 듣고, 조시 글로반도 좋아하고. 대학교 록밴드 보컬일 때는 '노 다웃' '크랜베리스' '자우림' 많이 들었어요.(웃음)





미의 기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그거 억지 같아요. 하하하하. 여전히 마르고 얼굴 작은 여성들이 인기가 좋은데. 하하하. 만약에... 조금이라도 그런 영향을 미쳤다면 영광이예요. 개인적으로 그런 영향을 미친 분들을 존경했고,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보니까 그런 기사가 났더라고요. '이소연 키드'도 생기고 미의 기준도 달라졌다고요. 마지막 두 명의 우주인 후보였을 때 "이소연 당신의 신조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크레이지 섹시 앤 쿨이다"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 그 때 무슨 전화를 받았냐면 "섹시란 단어를 빼라. 그건 품위있는 과학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섹시'는 빨간 불 켜있고 야한 옷 입고 화장 진하게 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외국 사람들은 우직한 남자가 자기일 열심히 하며 집중해 있는 모습을 보고도 섹시하다고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섹시'라는 단어가 왜곡되고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이예요. 그 단어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해석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답변에서 끝까지 안 뺐어요. 어린학생들이 보는데 꼭 그 단어를 넣어야겠냐고 했지만 지금의 어린학생들이라도 '섹시'라는 단어를 바르게 알고 썼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로 인해 조금이라도 이루어졌다면 기분 좋은 일이죠. 앞으로 그런 노력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난 그 얘기만 나오면 벌 받는 기분이야. 제가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스물 여섯살이셨는데 만날 친구들이랑 떠들면서 노처녀라고 놀렸었거든요. 그랬던 제가 서른둘이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스물여섯은 노처녀가 아닌데. 나 스물 여섯때 노처녀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하하.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 선생님을 노처녀라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사죄를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사죄 드려서라도 제가 결혼 할 수 있다면.(좌중 웃음) 결혼이 하기 싫은 건 아니예요. 절대 혼자 살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도 혼자 살지만 룸메이트 있을 때가 행복했어요. 어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편해서 좋다고 하는데 불편한 만큼 그 사람이 나에게 채워주는 게 있어요. 적어도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캄캄함 밤에 혼자 불 켜고 밤새 심심하지는 않잖아요. 평생 혼자 살아야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누군가를 입양하거나 집이 없는 사람을 우리 집에 공짜로 살게 했으면 했지 혼자 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기왕에 결혼관도 밝혀주시죠. 배우자의 기준으로 어떤 것들을 볼 건가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엄마예요. 물론 엄마는 말도 안 돼는 소리라고 하실 거예요. 저희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상투 틀고 계셨던 분이예요. 굉장히 유교적인 분이라 여자 많이 가르치면 남편 말 안 듣는다고 하시며 학교를 안 보내셨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검정고시로 어렵게 공부한 분이라 엄마는 오히려 지금의 제가 부러울 거예요. 하지만 제가 엄마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화목한 가정의 엄마'라는 거예요. 저나 동생들이 여기저기 자랑할 만한 자식들은 아니지만, 고민이 될 정도로 걱정되는 자식도 아니거든요. 아빠도 너무 친절하고 성실한 분이고 도대체 엄마는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아빠는 겉보기에 무뚝뚝하시지만 정이 깊으세요. 엄마가 어디 갈 때 버스도 택시도 없으면 월차내서까지 데려다 주던 자상한 분이죠. 정년퇴직하신 뒤로는 엄마랑 같이 산에도 자주 다니시고요. 아빠 같은 남편 만나서 엄마처럼 살게 해준다고 누가 보장해주면 저의 지금 직업, 우주인의 명예, 유명세 모든 걸 버리고 당장 가겠다고 할 정도로 저에게는 큰 가치예요. 엄마는 저에게 "아빠로 보는 너에게는 완벽해 보일지라도 남편으로 보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너에게 맞는 기준으로 배우자를 찾으면 세상에 없다"고 하세요. 맞는 말이죠. 아내에게 잘하는 것과 딸에게 잘하는 건 다르니까. 그렇지만 내 자식들에게 아빠처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우리 엄마아빠처럼 가끔 티격태격하면서 30년 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인생은 아름다워>인데요. 그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이 너무 멋있었어요. 죽기 전까지 아들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 영화를 보자마자 친구에게 저렇게 못생기고 바싹 마른 남자가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고 했어요. 저런 사람이면 결혼 할 것 같다고요.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3차원 영상처럼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느낌, 아직 간직하고 있나요?

물론이죠. 어떨 때는 우주에 갔던 게 아주 아득한 옛날일 같다가도 또 어떨 때는 바로 어제 일 같아요. 지금도 가끔 눈 뜨면 여기가 우주 다녀온 직후의 러시아였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가 있어요. 그때 몸이 안 좋아서 하루 종일 누운 채로 우주에 다녀오던 생각만 하고 무척 행복했거든요. 행사장 같은 곳에서 의도하지 않게 그때 영상을 볼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청승맞게 눈물이 나는 거예요. 특히 발사영상은 아직도 두근거리고 눈물 나요. 어깨에 붙은 태극기만 봐도 그래요. 저게 한국인이 탔으니까 붙은 태극기구나. 친한 친구들은 막 뭐라 해요. 제가 좀 짓궂어서 올림픽 단상 올라서 눈물 흘리는 선수들 보면 장난처럼 “정말 슬퍼서 울까”라고 했었거든요. 그 말을 하던 제가 친구들끼리 있을 때 펄럭거리는 태극기 보면서 울 때가 있으니. 하하. 저에 대해 '뭘 해도 혼자 잘할 것 같고 특히 우주인 되니까 남자도 이겨먹을 여자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절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요. 잘 울고 잘 감동하고 잘 울컥하거든요. 그 때 만났던 사람들하고 통화할 때도 많이 울어요. 국내에선 좋은 모습만 TV에 나왔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힘든 일이 많았거든요. 러시아에서 혼자 떨어져서 이일 저일 겪을 때면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정부 측끼리 얽혀서 가운데에서 정말 연약한 여자로 힘없이 서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 생각나는 일이 생기면 눈물 나요.


발사되는 순간을 생중계로 보면서 저 역시 뭉클하더라고요.

소유즈호 안에 있을 때는 그냥 신나기만 했어요. 나중에 입원해서 그 영상을 보는데 펑펑 울었죠.(웃음)

[인터뷰이 나우]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35)이 미국에서 MBA과정을 공부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2006년 정부가 선발한 우주여행자가 되어 한국인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고 매스컴에 그 이름과 일거일동을 널리 알렸다.


당시 우주여행자 선발에는 지원자가 3만6000여명이 몰렸고 이씨는 고산씨와 함께 최종 후보 2인으로 선발됐다.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고씨가 우주비행 참가자로, 이씨는 만일을 대비한 백업 우주 비행 참가자로 선정됐지만 2008년 고씨의 보안 규정 위반으로 인해 이씨가 최종적으로 우주여행자가 됐다. 이씨는 우주정거장에서 9박 10일을 머물렀다.


우주여행 후 이씨는 항공연구원 소속으로 쏟아지는 강연 요청을 소화하느라 몇 년 동안 줄곧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지난해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재 시애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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